65.
강윤은 먹잇감을 발견한 재규어처럼 성큼성큼 움직였다. 주저 없이 조수석에 접근하여, 벌컥 열어 상체를 들이밀었다.
“나와.”
은재의 안전벨트를 단박에 풀어버린 그가 팔목을 거머쥐어 당겼다.
“……도강윤.”
납치하듯 끌고 가는 그를 따르던 은재는 함부로 나서지 못한 채 멀뚱한 민서와 눈이 마주쳤다.
비로소 은재는 넋 나간 정신을 차렸다.
“놔.”
“날 돌게 만들지 않으려면…….”
탁하고 거친 음색이 낮게 깔렸다. 어렴풋이 어금니가 바드득 갈리는 소리와 함께 위협적인 눈빛이 내려왔다.
“조용히 따라와.”
도강윤은 시한폭탄이었다.
음험하게 도사리는 분노가 통제권에서 벗어나기 직전으로 느껴졌다.
“…….”
저지른 짓을 통감하기에 은재는 저항하지 않고서 크고 사나운 남자의 손에 이끌려 갔다.
‘은재야, 전화해.’
갈팡질팡하던 민서가 손 모양 전화를 만들어 신호를 보냈고, 힐끗 일별한 은재는 끄덕이며, 세단의 조수석에 올랐다.
탁!
강윤의 거친 힘으로 닫히는 문의 소음마저 살벌했다.
잔뜩 긴장한 은재를 태운 세단이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질주하듯 도로를 달렸다.
강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과녁 보듯 전방만 뚫어지게 주시했다.
‘숨통이 터질 것 같아.’
은재는 곁눈질했다.
깎아놓은 듯한 옆모습의 표정만으로도 거역할 수 없는 위압이 읽혔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좀 멈춰.”
은재는 건조한 입술을 축이고, 서느런 음색을 내려 노력했다.
“멈추라고!”
끼익―
강윤의 팔이 거침없이 핸들을 꺾었고, 스키드마크를 그릴 정도로 타이어 바퀴가 첨예하게 미끄러졌다. 세단이 갓길에 멈추자마자 은재는 차에서 뛰어내려 거리로 도주했다.
“서은재!”
득달같은 남자한테 즉시 잡혔지만.
“왜 이러는 건데?”
“그건 내가 할 소리 아닌가?”
은재의 고함에 강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황당하다는 듯 그가 사나운 야수처럼 그르렁거렸다.
“이유가 뭐야?”
“우리 조건 잊었어?”
은재는 독한 마음을 먹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난 망설임 없이 떠난다고 했어.”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듯.
“한데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조건이었지. 둘이 나한테 사기를 쳤으니까.”
“그래서?”
“속은 게 분해서라도 떠나야겠어. 할아버지도 퇴원하셨으니, 난 자유를 찾을래.”
“어설픈 핑계 대지 마.”
도강윤을 속이는 자체가 고난도였다.
영민한 남자는 한 가닥의 의심스러운 낌새로도 은재의 마음속을 꿰뚫었다.
“감추고 있는 진실을 말해. 진짜 이유를 말하라고!”
“깔끔히 왜 못 받아들이지?”
은재는 그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악독한 표정을 지었다.
“도강윤답지 않게 왜 이렇게 질척거려?”
“은재야.”
“이런 건, 집착이야.”
혀 밑으로 한기가 돌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렸다.
***
숨어버린 여자를 추격하며, 충격으로 들끓었던 강윤은 막상 은재와 마주하고 나서는 냉정을 되찾았다.
“이러는 건, 집착이야.”
표독한 가면 같은 표정의 은재가 낯설었다. 이 표정은 결혼생활 중 자신에게 드러냈던 경멸과도 사뭇 달랐다.
왜?
“그래.”
무엇 때문에.
“네가 집착으로 느껴진다면, 집착이겠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속이 뜨거웠다. 체기처럼 위장은 매스꺼웠고.
“그래서 어떻게 할까?”
강윤은 신랄하게 되물었다.
“물러날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 속을 너는 왜 모를까.
너 없인 나는 살 수 없는데….
“하지만 어쩌지?”
강윤은 그녀의 팔뚝을 거머쥐고서 강렬한 눈빛을 들이밀었다.
“나는 구제 불능일 정도로 서은재한테 집착할 것 같은데.”
“놓아줘.”
강윤의 집념 같은 눈빛에 은재는 위축되었다. 뜨거운 기세에 눌린 심장도 터질 것처럼 뛰어댔다.
“서은재.”
강한 손에 악력이 가해졌다. 강윤의 빨려 들어갈 듯한 눈동자가 코앞이었다.
“내 말 허투루 듣지 마.”
“아.”
방심한 사이, 은재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읽고 말았다.
“네가 진실을 밝히지 않는 한,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도강윤은 간절했다.
고압적인 태도였지만, 눈동자는 상처받은 초식 동물 같았다. 아주 덩치 큰 수사슴이 절절하게 무언의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아프다고.
아프게 하지 말라고.
‘이 남자를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
은재는 뜨끔뜨끔한 심장에 애써 힘주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눈동자에 바락 힘줬다.
“실토할게.”
나도 떠나고 싶지 않아.
잡아줘.
잡아줘, 도강윤.
“먼저 놓아줘.”
은재는 억척스레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각오 어린 기색을 읽은 강윤이 순순히 팔을 풀며, 한 걸음 물러났다.
“하아.”
비로소 자유로워진 은재는 긴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이마로 번지는 열감에 관자놀이가 쪼개질 듯했다.
“솔직히 말하면….”
어쩔 수 없다.
“삼현가에 가서 각성했어.”
꿈틀.
강윤의 눈썹이 동요했다.
“내가 감옥 같던 그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나날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더라고….”
아버지와 재회한 날은 다름 아닌, 도성만 회장을 따라 삼현가에 방문했던 날이기도 했다.
그를 속이기 위해선 정신적인 부담이 컸다는 구실이 가장 적절했다.
“그 당시 내 곁엔 아무도… 아무도 없었어. 딱딱하고 살벌한 그 웅장한 저택에서 나 혼자였어.”
“기껏 스무두셋밖에 안 되었던 나야. 그런 내가 견딜 수 있었겠어? 죽고 싶었던 날들이 숱해.”
“…하, 은재야.”
“그런데 내가 그날들을 답습하려 하다니…. 너무 미련하잖아.”
“미안해.”
제 집안에서의 일로 숱하게 미안한 점이 많았던 강윤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은재의 말을 의심할 수 없었다.
암담한 나머지 넓고 딴딴한 가슴팍을 크게 들썩이며, 애처로운 눈동자를 깜박이지도 못했다.
“미안해, 은재야.”
“안 할 거야.”
은재는 무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강윤하고는 이제 절대로 안 할래.”
“은재야, 내가…….”
“독립해서 삼현가로 들어갈 일 없다고 회유해도 소용없어. 하늘이 두 쪽 나도 삼현가의 도강윤인 건 변함없잖아.”
내가 서정탁의 딸인 것처럼.
“이해했으리라 믿어.”
회색빛이 된 강윤의 얼굴을 외면하며, 은재는 발길을 틀었다.
“갈게.”
“안 돼.”
강윤이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토해냈다.
“가지 마.”
본능적으로 튕겨 나온 그가 가려는 은재를 와락 끌어안았다.
“가지 마, 은재야.”
좁은 등과 밀착한 가슴팍을 통해 격동적으로 불끈거리는 그의 심장박동이 여실히 전해졌고, 그의 목울대가 바람 든 것처럼 세차게 떨렸다.
“내 가족 때문이라면, 내가 많이 미안해.”
도강윤이 매달린다.
애걸복걸하듯이.
“네 말대로 내가 삼현가의 도강윤이라서, 더 미안해.”
도강윤이 사과한다.
사과할 이유가 없는데.
“그래도… 한 번만 봐줘. 삼현가의 도강윤이 아닌, 그냥 도강윤으로 봐줘.”
백 번, 천 번.
아니, 만 번, 억만 번 봐줄 수 있다.
봐주고 싶다.
‘흑.’
은재는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솟구치는 사무침으로 위경련이 일 듯 심장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나 제 안의 울기를 단단한 매듭처럼 묶고 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
가능하다면, 먼지처럼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안 될 것 같아.”
은재는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기엔 내 상처가 너무 커.”
제 몸을 감은 강직한 팔을 풀고서, 목소리를 쥐어짰다.
“우리 관계, 그만 끝내자.”
툭.
강윤의 팔이 무기력하게 풀렸다.
제자리에서 굳어버린 남자를 두고, 은재는 규칙적인 걸음으로 직진했다.
때마침 택시가 달려오고 있었다.
휙.
손을 들어 멈춰 세우고, 도망치듯 올라탔다.
“서은재.”
잔뜩 쉬어서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귀도 눈도 닫았다.
‘도강윤….’
눈알이 얼어붙는 것처럼 시렸다.
‘미안해…….’
그와 반대로 닫힌 눈꺼풀 틈으로 이탈하는 눈물은 살갗이 태울 듯 뜨거웠다.
미안해.
***
딸깍.
칠흑처럼 어둑한 공간에 번쩍 센서등이 켜졌다. 까맣게 물든 통창에 비척비척 들어서는 강윤의 모습이 반사되었다.
풀썩.
비틀하던 강윤은 그대로 쓰러지듯이 소파에 드러누웠다.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웠고,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손가락을 들 힘조차 없었다.
지쳤던 신체의 피로가 물밀듯이 그를 덮었고, 간간이 미열처럼 느껴지는 열감이 급상승했다.
“하아.”
막힌 숨통을 여는데, 잇새에서 새는 숨결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
초점 없는 눈동자가 창밖의 야외 테라스를 망연히 응시했다. 명멸하던 조명이 삽시간이 꺼지며, 공간은 암흑에 휩싸였다.
“은재야…….”
강윤은 무너졌다.
그저 어둡고 캄캄하고, 적막하고 쓸쓸한 곳에서 혼자.
아무도 없이.
‘은재야…….’
오롯이 은재만 그리며.
생명이 꺼져가는 촛불처럼 힘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