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64화 (64/84)

64.

예상했던 바다.

그렇기에 갈등할 새도 없이 도강윤을 단념한 거였다.

자신이 도강윤과 함께 있는 한 삼현에 빌붙으려는 습성은 버리지 않을 테니.

“서두르자.”

은재는 쓴 숨을 삼키고, 지체하지 않고 펜트하우스로 올라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진입했다.

“업무시간이니까 안 오겠지?”

목적은 2층에 있는 제 물건이었다. 속히 2층의 드레스룸으로 이동했다.

통 큰 도강윤 덕분에 드레스룸의 물건이 그득그득했지만, 은재는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처럼 간편한 제 짐만 쌌다.

“그사이 많이도 늘었네.”

은재는 담담한 심경을 유지하려 짐 정리에만 몰두했다. 캐리어에 옷가지를 쑤셔 넣는데, 문득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아.”

쇄골에 반짝이는 목걸이가 초점을 사로잡았다.

“빼야겠지….”

미련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슬픈 감각이 깨어나려 했다.

“후.”

은재는 대번에 목걸이를 빼내어 상자에 넣었다. 빠른 해결책이 필요했다. 공연히 쿵쾅거리며 1층 그의 침실로 내려갔다.

“똑똑한 인간이니까, 대번에 알겠지.”

이 목걸이는 그와의 인연이 끊겼음을 각인해 줄 매개체 역할을 할 것이다.

탁.

은재는 침대 서랍장 위에 상자를 내려놓는데, 닫히다가 만 서랍 속의 물체가 아른거렸다.

“이게 왜…….”

호기심에 사진을 꺼냈다.

“뭐야, 이런 걸 왜?”

초음파 사진이었다. 의아해하며, 상단에 인쇄된 날짜를 확인한 순간.

“하!”

은재의 안색이 창백하게 죽었다.

6주 차인 태아 사진은 은재가 인생 최초로 산부인과에 방문하고, 삼현가로 귀가한 후 강윤의 서재로 가서 전달했던 것이었다.

우리의 아기.

잃어버린 아기.

“여태까지 갖고 있었던 거야….”

정작 엄마인 은재는 아기를 유산하고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울부짖으며, 자신이 매달 정성스럽게 기록했던 아기 수첩을 불태워 버렸었다.

그런데 아빠인 도강윤은 간직해 왔던 거다. 내색도 안 했으면서…….

불현듯, 그 당시의 강윤이 떠올랐다.

“그럼, 다음엔 언제…….”

“몸은 어때?”

“임신하면 입덧 이런 걸 한다던데…….”

어쩌다 한 번 마주칠 때마다 강윤은 물었었다.

그럴 때마다 몰인정하게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발길을 돌리며 ‘괜찮아’, ‘신경 쓰지 마’를 반복했던 은재였다.

“어떻게…….”

은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리도록 아리게 달궈진 눈을 무릎에 묻었다.

이제야 알아버렸다.

그의 음색이 얼마나 애탔는지.

다소 단조로운 투로 물었던 것도 자신의 눈치를 살폈던 것임을.

도강윤도 아기를 기다리며, 임신한 아내를 염려했음을.

“아, 제발 그만해.”

은재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입술을 악다물고서 울기를 지우고,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펜트하우스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6년 전 그를 외면했던 것처럼 또다시 그를 버린다.

***

꽃다발 한 아름과 케이크를 들고 펜트하우스로 들어선 강윤의 몸짓이 한껏 들떴다. 정식 프러포즈를 할 생각에 심장도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은재야.”

거실은 어둡고 캄캄했고, 묘하게 썰렁한 기류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아직 안 왔나?”

강윤은 꽃다발과 케이크를 내려놓고 내부를 수색했다. 치밀한 그의 동작을 감지한 센서 조명이 유일하게 그를 쫓았다.

“연락도 없고…….”

난제를 만난 듯 복잡한 기분이 드는데, 침대 서랍장 위에 놓인 상자를 포착했다.

아침에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물건임을 강윤은 정확히 기억했다. 상자 뚜껑을 열었을 때는 불길함이 엄습했다.

“목걸이를 왜…….”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강윤은 핸드폰을 들었다.

은재와의 통화를 시도하려는 찰나, 부르르― 선수 치듯 은재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극히 황당무계한.

―나 인제 떠나.

―내 조건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만이었지만, 건강하게 퇴원하셨으니 내가 더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그동안 고마웠어.

“서은재.”

혈관에 뜨겁고 차디찬 기류가 동시에 역류했다. 폭주하는 혈액으로 불끈불끈 뛰는 맥박을 진정하지 못한 채, 통화버튼을 눌렀다.

[전원이 꺼져 있어…….]

“하!”

문자를 발송해 놓고, 의도적으로 전원을 꺼놓은 거다.

“진심이야?”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어째서.”

모르겠다.

도무지 네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도…….

‘널 떠나게 둘 수 없어.’

아무리 쥐어짜도 도출되지 않는 결론을 붙들고서 무기력하게 대처할 강윤이 아니었다.

강윤은 망설이지 않고 펜트하우스에서 나왔다.

‘집으로 간 건가?’

아니다.

은재는 단박에 잡힐 선택은 하지 않을 거다. 속임수가 아닌 이상.

강윤은 세단을 운전하며, 블루투스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 만에 까불거리는 음성이 넘어왔다.

[오, 도강윤.]

“김민서 연락처하고 주소 확보해 줘. 둘 다.”

[이 새끼야, 내가 네 정보책이냐? 틈만 나면…….]

“당장!”

채종훈의 투덜거림을 강윤의 격한 고함이 막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종훈이 딸꾹질을 해댔다.

“하.”

강윤은 부들부들 경련하는 팔에 힘을 줬다. 핸들을 움켜쥔 손등에 퍼런 힘줄이 도드라졌다.

“종훈아, 부탁할게.”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은재, 찾아야 해. 빨리…….”

***

탁.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지만, 은재의 젓가락은 밥알을 세는 중이었다. 보다 못한 민서가 가시눈을 뜬 채 타박했다.

“깨작거리기만 할 거야? 안 먹고, 안 자고… 이럴 거면서 도강윤과 왜 헤어져?”

민서의 질책에 입맛 없는 은재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민서야.”

화제를 돌렸다.

“미도 작가의 매니지먼트를 맡아주었으면 해.”

“정식으로?”

“응.”

“당장 시급한 사안은, 작가의 개인 사정으로 상생 프로젝트는 더는 참여 못 한다고 전달해 줘.”

“은재야.”

“예정된 전시회는 진행하되, 그에 관한 전반적인 결정 권한을 일임할게. 매니지먼트에 대한 비용은 출판권의 수익 배분을 새로 조정해. 네가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만큼 가져가.”

“너, 떠나려는 거지?”

“계약서는 안 쓸게.”

확고한 표정에 민서가 한숨을 내쉬다가 속상한 티를 내며 말했다.

“목포로 갈 거야?”

“당분간은.”

“예전처럼 멀리 갈 거고?”

“지구를 정복하려면.”

“마음 결정한 거야?”

“응.”

“왜 갑자기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거야?”

민서가 허탈한 웃음을 머금었다. 은재는 담담한 감정을 유지하며 물을 마셨다.

“삼현가와 엮이는 게 피곤해졌어.”

비겁하다.

기껏 해서 택한 것이 삼현가 핑계라니.

예전에도 그랬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서 꾸역꾸역 감추고 있었지만, 힘겨울 때마다 민경애 여사를 탓하고 도강윤을 원망했지만, 사실 가장 강력한 악재는 아버지 서정탁이었다.

“은재야.”

“일어나자.”

은재는 회피했다. 룸에서 나가려는 그녀의 등 뒤에서 민서가 격하게 소리쳤다.

“도강윤 좋아하잖아!”

움찔.

문손잡이를 잡은 채 은재는 망연히 멈췄다.

“사람한테 격을 주지도 않고, 정 주지도 않는 네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도강윤은 네 첫사랑이기도 하고…….”

들켰구나.

“결혼도 그래. 정략결혼 같은 걸 네가 왜 했겠어? 상대가 도강윤이니까 한 거잖아!”

틀린 소리가 하나도 없다.

“첫사랑하고 결혼해 놓고도, 병신처럼 자기감정은 숨기고, 불행하게 이혼하고, 쫓겨나듯 한국에서 떠나고….”

참으려 했는데…….

“그런 네가 돌아와서, 이제라도 도강윤하고 잘 지내니까, 내가 너무 좋았어.”

참을 줄 알았는데…….

“나는 정말 한시름 놓았었어. 도강윤도 널 사랑하는 게 역력해 보여서 내가 얼마나 좋았는지 알아? 그런데 그런 남자 곁을 왜 떠나니?”

소리가 없어도 눈물은 아프다.

심장이 고요해도 마음은 아리다.

“은재야,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는데…… 도강윤한테 털어놔.”

“…가자.”

은재는 촉촉한 눈가를 훔치고 한식당을 나섰다. 뒤에서 친구의 손동작을 인식한 민서는 묵직한 날숨을 내쉬었다.

***

“은재야, 편의점에서 맥주 사갈까?”

아파트 정문에 다다르자, 민서가 편의점을 일별하며 물었다. 은재는 차창 너머 밤거리에 시선을 꽂은 채 성의 없이 응수했다.

“마음대로.”

“됐다.”

의욕 상실한 민서는 아파트 정문 쪽으로 우회전했다.

그때.

끼익―

검은색 세단이 급발진하듯 튀어나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꺅!”

질겁한 민서가 비명을 내지르며 브레이크를 밟았고, 은재의 상체도 튕겨 나가듯 반동했다.

탁!

자동차 보닛과 맞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멈춘 세단의 운전석에서 시커먼 남자가 나왔다.

“저 미친 새끼!”

성질 급한 그녀가 운전석에서 튀어 나갔다. 가로등의 그늘 속에 선 남자의 얼굴을 민서는 알아봤다.

“허, 미쳤어요!”

그리고 실수했다.

“우릴 죽일 작정이에요?”

“우리?”

음산한 저음이 공기를 갈랐고, 날카로운 초점이 검게 선팅된 차량의 조수석으로 옮겨졌다.

그제야 은재는 숙였던 시선을 들었다.

흠칫.

남자를 시커멓게 가린 음영에서 유독 번뜩이는 눈빛을 인지한 순간.

“아.”

은재의 숨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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