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은 여지없이 도강윤이었다.
―어디야? 집에 오고 있어?
메시지의 주인공도 어김없이 도강윤이었다.
띠. 띠.
그리고 이어서 온 메시지는.
―기다리고 있어.
“아, 도강윤.”
은재는 탄식했다.
도강윤의 다정한 메시지가 담긴 핸드폰을 제 가슴에 대고 오열하듯 소리 내어 울었다.
“나 어떡해.”
어린아이처럼 서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나 어떡해.”
***
펜트하우스 지하주차장으로 진입한 세단이 정차했다. 뒷좌석에서 제안서를 살피던 강윤은 바인더를 닫고 여유롭게 내렸다.
“수고했어. 조심히 들어가.”
“상무님!”
호석이 다급히 뛰쳐나오더니 약 봉투를 넘겼다.
“피로회복제하고 자양강장제, 그리고 두통약입니다. 피로회복제는 주무시기 전에, 자양강장제는 내일 아침에 각각 드세요. 그리고 두통약은 혹시 몰라서 준비했습니다.”
“쓸데없이.”
“상무님, 이러다 과로로 쓰러지시겠어요. 그날 이후… 암튼 혈색이 굉장히 안 좋으시단 말이에요.”
호석은 두루뭉술하게 얘기했지만, 강윤은 알아들었다.
카페에서 백지연과 마주한 날 이후 수시로 두통이 일었고, 몸도 유난히 찌뿌드드했다. 단언컨대 신경성일 것이다.
“고맙다.”
강윤은 잠자코 약 봉투를 받았다.
호석이 떠나고 펜트하우스에 들어서는데, 퇴근하면서 은재에게 보냈던 메시지의 답장이 왔다.
―민서 집에 왔어. 잘 자.
―그래, 잘 자.
묘하게 쌀쌀맞은 기운이 느껴졌지만, 강윤은 무던한 응답을 보냈다.
‘김민서 눈치 보여서겠지.’
강윤은 무서운 김민서에게 포로처럼 잡혀 있을 은재를 내심 걱정하며 넓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큰일이네.”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쓸쓸했고, 휑하니 텅 비어 보였다.
“벌써 보고 싶네.”
애써 참으며 남은 업무에 몰두했다.
‘잠자긴 틀려먹었군.’
한참을 집중하고 자정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누웠을 때는 참을 수 없는 허전함이 엄습했다.
몇 번이나 뒤척이던 강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로 갔다.
수면을 도와줄 도구가 필요했다. 방대한 활자 수를 자랑하고, 굉장히 지루하다고 평가된 문학을 선택하여 책장에서 꺼내는 찰나.
툭.
책과 책 사이에 껴 있던 사진 한 장이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강윤은 허리를 숙여 사진을 집었다.
무심히 사진을 앞면으로 돌리자마자 강윤의 잇새에서 탄식이 흘렀다.
“하아.”
심장이 불끈하고 불안정하게 뛰었고, 갈비뼈 안쪽에서도 시큰한 통증이 일었다.
“여기에 뒀었네.”
강윤은 오른손에 쥔 책을 아무렇게나 책상에 놓고, 사진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검은 동굴 같은 곳에 안착한 몽글몽글한 물체를 손끝으로 조심히 매만졌다.
“나 임신했어.”
그의 손끝에 닿은 건, 은재가 건넸던 초음파 사진에 담긴 태아였다.
스물다섯 살의 그도 기다렸던 아기.
우리의 아기.
“나 임신했어.”
스물세 살의 은재가 초음파 사진을 건넨 것은 결혼 6개월 차일 때였다.
“뭐?”
강윤은 스물다섯 살이었다.
정기 행사처럼 매달 치렀던 행위의 결과가 실제로 이뤄지자, 약간 당황했으며 많이 어안이 벙벙했다.
“6주래.”
반면, 은재는 담담했다.
적어도 아이 아빠에 대한 예의라는 듯 소식과 사진만 전달하고 곧장 돌아섰다. 그제야 정신 차리고 강윤은 어정쩡하게 물었다.
“병원은?”
“다녀왔으니까 그 사진이 있지.”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은재는 말했고, 강윤은 은재의 등을 애탄 마음으로 응시했다.
“병원에 혼자 간 거야?”
“응.”
“앞으로, 정기적으로 다녀야 하잖아?”
“응.”
“그럼, 다음엔 언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머니께 알렸고, 안 비서님이 챙겨주시기로 했어.”
은재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강윤의 서재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강윤은 ‘하’ 하고 탁한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렸다.
책상에 놓인 초음파 사진을 들었다.
“아기라….”
몽글몽글한 덩어리뿐이라 실감 나진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검은색 동굴 안에 있는 녀석이 유난히 또렷하게 시야를 채웠다.
안착한 자세도 제법 안정적으로 보였다.
“안녕.”
강윤은 사진인데도 불구하고, 깨질까 두려운 크리스털처럼 가만가만 아기집 안의 녀석을 어루만졌다.
“내가 네 아빠야.”
저도 모르게 눈매가 늘어났다.
그 후.
강윤의 마음은 온통 은재에게 향했고, 은재의 컨디션, 은재 배 속의 아기, 은재의 기분 등이 모든 관심사였으나 표 낼 수도, 함부로 접근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 민경애 여사는 임신한 은재의 거처를 아예 별채로 옮겨 철저하게 관리·보호했는데, 지정자 외엔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강윤도 예외 없었다.
더불어, 은재는 임신한 후로 더 차가워졌기에 강윤으로선 군소리 없이 수용해야 했다.
그즈음 사건이 터졌다.
강윤과 은재의 컴컴한 앞날을 예견하듯.
―㈜정진 서정탁 대표 탈세 및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
은재가 임신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녀의 아버지가 구속되었고, 그가 저지른 불법과 만행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도강윤!”
은재의 임신이 6개월 차가 되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날, 은재는 테라스에서 추락하는 엄마를 목격했다.
“아, 아기…. 아기가…….”
은재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내 아기… 내 아기 지켜줘. 지켜줘, 도강윤.”
하혈하며 자신에게 사정하듯 매달리는 그녀를 붙잡으며, 강윤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지켜줄게. 맹세코.”
은재를 번쩍 안아 들면서 그도 간절히 맹세했고, 절실히 염원했다.
자신이 기필코 아기를 지키겠다고, 잃게 두지 않겠다고.
“우리 아기 살려주세요, 제발!”
응급 침대에서 실려서 수술실로 향하면서도 은재와 같은 마음으로, 강윤도 의사의 손을 붙잡고서 절절하게 빌었다.
“교수님, 우리 아기예요. 제발 살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산모께서 유산하셨습니다.”
끝끝내 아기를 잃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강윤은 풀리는 무릎을 휘청이다가, 아무도 없는 복도의 벽에 무기력하게 기댔다.
임신 소식을 들은 후, 남모르게 별채 앞에서 서성이던 나날이 생각났다.
자신이 유일하게 가진 초음파 사진보다 커졌을 아기 사진도 보고 싶었고, 아기 심장 소리도 듣고 싶었고, 태동이 있다던데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기를 잃었다.
강윤은 건강에 이상 없이 회복실에서 잠든 은재를 보고 나서야 캄캄한 산책로로 나갔다.
끄트머리 벤치에 숨듯이 앉아 초점 없이 땅바닥을 응시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결국.
“흑.”
강윤은 울었다.
“흑흑.”
어릴 때도 소리 내어 울어본 적 없던 강윤이었다.
그런 강윤이 손바닥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서 오열했다. 심장이 조이고, 갈비뼈 안쪽에서 이는 흉통을 견딜 수 없었다.
“아흐흐흑.”
태명도 지어주지 못했는데…
널 지켜주지도 못하고……
아기야.
은재야.
“미안해.”
울음은 더없이 서러웠다.
“미안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못한 채 새벽녘이 되도록 그 설움을 홀로 토해냈던 스물다섯 살 강윤이었다.
“흠.”
강윤은 묵직한 가슴팍을 크게 들썩였다.
아기도 잃고 은재도 잃었던, 제 인생에서 가장 힘겨웠던 그때의 상념을 닫고서 서재에서 나왔다.
소중한 사진은 침대 서랍에다 넣어놓았다.
그러며, 다짐했다.
다시는 잃지 않으리라.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널 지키리라.
***
한편, 도성만 회장은 삼현가에 은재와 동반한 일로 도형호와 민경애의 강력한 항의를 받는 중이었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 서은재를 삼현가에 들이시다니요?”
“아까는 제가 당황해서 말을 못 했지만, 최소한 통보라도 해주셨어야죠.”
“내외가 장단이 척척 맞는구나. 백년해로하겠어.”
“아버지!”
“아버님!”
도성만의 느물느물한 반격에 아들의 이마엔 주름 굴곡이 지고, 며느리의 낯은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하지만 도성만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버님, 서은재와 우리 도 상무를 엮지 마세요. 예전에 서정탁이 사돈이라는 빌미로 저흴 끔찍하게 괴롭혔던 거 잊으셨어요?”
민경애가 신랄하게 비난했다.
“서정탁 때문에 이 사람도 불법 탈세에 개입했다는 오해를 받으며 고초를 겪었다고요.”
“지난 일을 뭐 하러 언급해.”
“지독히 당했으니 그러죠. 그 집안사람은 떠올리기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데, 서은재랑 재결합이라뇨? 가당치도 않아요.”
“은재가 무슨 죄야. 그 아비는 법적으로 죗값도 치렀고.”
도성만이 꿋꿋하게 말했다.
“은재야말로 피해자지. 그 일로 어미마저 잃지 않았느냐. 우리라도 그 아이를 불쌍히 여겨 보듬어야지.”
“저희는 무슨 죄로요.”
민경애는 답답한 듯 거의 울상이 되었다. 잠자코 듣던 도형호가 나섰다.
“서정탁은 악한 인물입니다. 그런 자와 또다시 관계를 이을 수 없습니다.”
“은재만 보아라.”
“불가능합니다.”
도성만의 말에도 도형호는 단칼에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