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멀어지는 세단을 우두커니 바라는 은재의 머릿속에 민경애 여사가 떠올랐다.
도성만 회장의 강경한 의지를 간파한 그녀는 제 거처에 들어가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안 비서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그래도 선은 지키는 어른이니.’
나라의 경제를 아우르는 삼현의 안주인답게 위법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다. 임현서처럼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적도 없고.
“너는 도강윤의 안사람이 될 테고, 도강윤의 안사람이면 삼현가의 주인이지.”
나도 그렇게 되려나?
연달아 도성만 회장의 말을 떠올리며, 은재는 닭살 돋는 팔뚝을 쓸며 쿡쿡 웃었다.
“할아버지는 참 주책이셔. 손주라니.”
혼잣말하며 펜트하우스로 향할 때였다.
거뭇한 인영이 불쑥 튀어나와 은재의 팔뚝을 거머쥐었다.
“꺅!”
소스라치게 놀란 은재는 비명을 내질렀다.
노숙자인 듯한 남자에게서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얼룩덜룩하게 더럽혀진 옷차림은 누더기 같았으며, 찢기듯 너덜너덜한 벙거지를 눌러쓴 남자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무섭게 번뜩였다.
“왜 이러세요!”
“은재야!”
남자의 입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귀 익은 음성이었다.
“아빠?”
그에게 저항하려던 은재는 정지했다. 믿기지 않아, 제 앞의 사람을 망연히 쳐다봤다.
“그래, 네 아빠야. 아빠.”
땟자국이 번진 입술을 음흉하게 벌리는 자는 은재의 아버지, 서정탁이었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 은재야.”
“아빠….”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의뭉스럽게 사위를 둘러본 그가 막무가내로 펜트하우스로 진입하려고 했다.
“도 서방하고 같이 사는 거지?”
“안 돼요!”
반사적으로 그를 막아선 은재의 동공이 두려움으로 팽창했다.
‘단순히 찾은 게 아니야.’
강윤과 이곳에서 같이 사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진즉 찾아놓고도 철저하게 탐색한 것이다.
“왜 안 돼? 내 딸 사는 곳에 아빠가 못 가?”
“저쪽으로 가요.”
생떼 부리듯 버티는 그를 붙잡고 은재는 인근의 공원으로 이끌었다.
서정탁이 코뿔소처럼 킁킁거리며 벤치에 털썩 앉았다.
“아빠가 거지꼴이 되었다고 괄시하는 거냐?”
“언제 출소했어요?”
“면회 한 번 오지 않더니, 왜? 영영 안 나오길 바랐어!”
“…….”
“모범수로 나온 지 6, 7개월 되었다.”
욱해서 언성 높였던 서정탁이 은재의 침묵에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아빠가 나와서 고생 많이 했어. 주머니가 비니, 내게 굽신거렸던 인간들이 죄 업신여기더라. 이 몰골 보면 뻔하지 않니?”
“주머니가 비어서가 아니죠.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잊으셨어요?”
“그 죗값은 다 치렀다.”
“다 치러요? 아빠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허.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신랄한 은재의 고함에 서정탁이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취해서 실족사라니, 쯧.”
“아빠.”
“여편네가 술을 마시려면 곱게 마시지. 그 무슨 멍청한 짓거리냐.”
“언론에 보도된 기사가 진짜라 믿으셨어요? 아빠 실형 선고 날이었는데?”
“은재야….”
테라스에서 떨어진 엄마가 경련하며 입을 우물거렸을 때, 기울였던 귀에 들린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미안해.”
그 순간, 은재는 알았다.
당신의 선택임을.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으세요? 출소하고 엄마 봉안당에는 가보셨어요?”
“죽은 사람 얘길 뭐 하려고 해.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
“그래서 말인데, 은재야.”
원망 가득한 눈초리를 외면한 서정탁이 악어 같은 눈동자를 치떴다.
“사람이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이렇게 우리 부녀가 상봉한 김에 네가 날 좀 살려줘야겠다.”
“그게 무슨 말이세요?”
“내가 널 어떻게 찾았게? 내가 어떻게 여길 왔을까?”
야비함이 도사리는 눈동자를 은재는 쏘아보았다.
“알고 싶지 않아요!”
“네가 들어야지, 아주 중요한 사안인데.”
사안?
“출소하고 오갈 데가 없어서 내가 서울역에 몇 달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날 찾아다닌다더라.”
“누가요?”
“그렇지? 너도 이상하지? 내 감옥 가 있는 동안 죄 등한시했는데, 뜬금없이 날 왜?”
“…….”
“아무래도 낌새가 심상치 않아서 몰래 지켜봤거든. 근데 그 사람이 안 비서지 뭐냐?”
안 비서?
“기분이 묘하대?”
안 비서는 분명히 민경애 여사의 지시로 움직였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버지를 찾아 은재를 쫓아낼 구실을 만들려고 했을 터.
“안 비서가 날 찾은 연유가 뭘까? 내 한참을 고심했지.”
하이에나 같은 아버지였다.
사자가 사냥을 끝낼 때까지 풀숲에서 숨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하이에나처럼 음흉하게 상황 파악을 한 후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짰을 것이다.
“그러다 삼현가를 관찰했더니…… 어이구! 네가 보이더란 말이다. 그것도 도 서방과 같이.”
‘아…….’
은재는 눈앞이 암담했다.
“내 그동안 세간의 소식을 접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둘이 재결합한다며?”
“아니에요. 사정 있어서 잠시 신세 지는 것뿐이에요.”
은재는 얼른 부정했다.
“안다.”
하지만 서정탁은 소름 끼치게 웃어젖혔다. 먹잇감을 탐할 때 흘리는, 아버지 특유의 웃음소리.
“도성만 회장님께서 편찮으시다며? 조만간 돌아가신다던데…….”
“하.”
“순차적으로 일이 잘 풀릴 징조야.”
모르는 게 없다.
상당 기간 미행하며 정보를 수집했다는 뜻이다.
“서둘러 혼인신고부터 해야겠다. 회장님 유산 상속받으려면, 법적인 권리부터 찾아야지.”
“아빠!”
“은재야.”
싸늘하게 일축하려는데, 서정탁이 덥석 은재의 손을 거머쥐었다.
“그전에 도 서방한테 말해서 내가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다오.”
“뭐라고요?”
“내가 아주 좋은 투자처가 있는데, 도 서방한테 현금을 좀 융통해 달라고 해라. 시일이 급하니 일단 5억 정도?”
정말 구제 불능이다.
“제정신이세요!”
은재는 거침없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벌떡 일어나서 분노 어린 소리를 내질렀다.
“이러려고 오셨어요?”
아버지의 탐욕을 짊어져야 했던 은재였다.
딸을 결혼시킨 후, 사돈이라는 명분과 삼현그룹의 하청기업라는 점을 악용하여 무리한 청탁을 하거나 과한 혜택을 요구하는 아버지 때문에.
그럴 때마다 민경애 여사의 핍박은 극심해졌고, 은재는 자신이 볼모가 된 심정이었다.
“왜 인생을 이렇게 사세요?”
아버지의 과욕은 결국 탈이 났고, 구속된 후에도, 심지어 감옥에서도 삼현 측에 자신을 구제해 달라고 온갖 생떼를 부렸다.
그래서 조속히 이혼해 버렸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 버렸다.
도강윤과의 매듭을 끊어내야 했기에.
“죄책감도 없으세요!”
“다 널 생각해서 재기하려는 거 아니냐! 내가 살아야 너도 살지!”
“가세요.”
“도 서방한테 5억 정도는 푼돈일 텐데, 네가 무엇 때문에 서슬 퍼렇게 대들어! 재결합한다더니, 정이라도 든 모양이지!”
안 되겠다.
정말……
안 되는 거였다.
“저…….”
은재의 눈앞이 희뿌옇게 물들었다. 복받치는 설움을 어렵사리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도강윤하고 재결합 안 해요.”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제 귀에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설고 이상한 목소리.
‘내가 미련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를 밟고 있으면서, 찬란한 미래를 꿈꿨다니…….
‘내가 멍청했다.’
그와 진짜 마음을 나누고, 진짜 삶을 살아갈, 그의 아내가 되길 바랐다니…….
“무슨 일이 있어도, 도강윤하고 전 남이에요. 진작에 끝난 사이고요. 그러니….”
은재는 창백해진 얼굴을 부르르 떨며 손끝으로 어둠을 가리켰다.
“가세요.”
힘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주며, 속절없이 흐르는 굵은 눈물을 어쩌지 못한 채 은재는 파르르 경련하며 피력했다.
“가셔서…… 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아빠가 이 모양 이 꼴인데 너만 잘살겠다고! 이 아빠를 버리려는 거냐!”
“정작 우릴 버린 건 아빠죠. 그 이기심에 엄마가 돌아가셨고.”
은재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
“정말… 보지 말아요, 우리.”
지친다.
“그리고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도강윤 측에 접근하지 마세요. 도형호 회장도 벼르고 있으니, 이렇게 얼쩡거리셨다간 큰일 나실 거예요.”
서느렇게 덧붙이고 은재는 돌아섰다.
발바닥에 와 닿는 보도의 느낌이 늪 같았다.
“은재야!”
푹푹, 무지근한 발이 빠지는 기분으로 비척비척 공원에서 벗어났다.
“네가 날 살려야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난 네 아빠야!”
처절하기까지 한 서정탁의 고함이 아득했다.
“은재야!”
메아리처럼 아스라이 멀어졌고, 귓가엔 다른 음색이 맴돌았다.
“사랑해.”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허스키한 저음.
“사랑해, 서은재.”
“흑.”
공원의 입구에서 벗어난 순간.
은재는 더는 걸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듯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흑흑.”
의식이 방어할 틈도 없이 흐느낌이 터졌다.
징―
때마침,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은재의 흐느낌처럼 길게 울리던 진동이 멈추었고, 곧 메시지 알림음이 들렸다.
“끅끅.”
눈물범벅인 채로 은재는 목구멍의 울음을 삼키며 핸드폰을 꺼냈다.
―도강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