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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널 원해-59화 (60/84)

59.

무턱대고 학교 뒷길로 이동하는 그에게 손짓하며, 은재는 산행길로 향하는 길목으로 발길을 틀었다. 섬을 거처에 둔 만큼 지리는 훤했다.

“이쪽으로 와.”

“내가 좋은 가이드를 뒀군.”

강윤은 아첨 같은 눈짓을 했다.

다소 간사스러웠지만, 매력적인 미소라 은재는 넓은 마음으로 넘어갔다.

‘저 미소엔 못 당하겠다니까.’

그리고 강윤과 함께 자연 상태로 훼손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좁은 흙길로 형성된 오솔길로 나아갔다. 오솔길 따라 계절의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길이 익숙하네? 자주 왔었어?”

“아주 자주.”

마치 아름다운 화원을 거니는 기분을 만끽하며, 두 사람은 편안한 여유를 즐겼다.

“이런저런 생각 할 것이 많을 땐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거든.”

“어떤 생각?”

강윤이 슬쩍 기대에 찬 눈빛을 던졌다.

“그중엔 도강윤이라는 남자도 있나?”

당연히 있다.

오히려 숱했다.

‘도강윤과 이곳에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어느 날은 상념에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상념에 전부이기도 했다.

“있었나? 도통 기억나지 않네?”

“예, 그러시겠지요.”

은재의 모호한 미소에 강윤은 설핏 섭섭한 기색으로 퉁퉁거렸다.

“쿡쿡.”

능청스러움이 가미된 그의 행동은 어느덧 은재에게 잦은 웃음을 선사했다.

시간이 갈수록, 함께할수록 두 사람은 서로가 무척 잘 통하는 상대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등대섬을 왜 홍보 촬영지로 결정했어?”

“왜? 별로인가?”

“그렇다기보단….”

은재와 강윤은 머지않아 등대섬으로 이어지는 언덕길로 올랐다.

푸르른 하늘을 점령한 뽀얀 구름이 그들의 길을 유유히 쫓아왔다.

“등대섬이 이 섬의 명소긴 해도, 다른 데 비해 소박하거든. 삼현의 홍보 영상 촬영지로는 평범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특별한 거야.”

이윽고 키 작은 나무와 풀들만이 형성된 넓은 초지의 중심인 언덕이 나타났다.

푸른 초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언덕 끝자리엔 새하얀 등대가 솟아난 듯 자리 잡고 있었다.

“프로젝트 첫 번째 지역을 선정하며 촬영감독을 설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기도 하고.”

“어떤?”

“뱃사람들에겐 밤바다에서의 뱃일이 일상일 테고, 등대는 그 평범함을 밝히는 빛이잖아. 평범한 일상의 빛인 거지.”

“아, 상생 프로젝트는 등대의 빛과 같다는 의미가 부여되겠구나.”

은재가 단박에 깊은 뜻을 헤아리자 강윤이 흐뭇하게 웃었다.

“의미가 되게 좋다.”

“그렇지?”

“응.”

은재는 자신의 망막에 가득 들어차는 남자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욕심이 나는 남자다.

이국적이면서 아름다운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도강윤의 얼굴이 유난히 빛났다.

저 하얀 등대의 빛처럼.

***

윙―

노을이 저미는 하늘로 드론이 떠올랐다.

붉은 하늘과 망망대해를 배경으로 둔 하얀 등대의 자태는 조화로운 그림 같았다.

하얀 등대에서 뿜어내는 빛이 멍울처럼 둥그렇게 비쳐들며 하늘엔 마치 두 개의 태양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날이 좋아서 그림이 기가 막힙니다.”

“하늘도 우릴 칭찬하나 봐요. 어쩜 저렇게 구름도 예뻐요.”

“예술입니다, 예술.”

드론이 고도의 위치에서 유유히 선회했고, 촬영감독의 카메라와 은재의 카메라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홍보 영상 중에 은재의 작품 사진이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처럼 삽입될 예정이었다.

“드론 좌측으로 한 바퀴 더. 등대에 초점을 두고.”

“알겠습니다, 상무님.”

“조명 낮추고, 최대한 자연광으로.”

이 모두가 영민한 상무님의 두뇌에서 나온 그림이었다.

추진력과 분별력이 뛰어난 남자는 임원답지 않게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그의 냉철하고 명확한 열정 덕분에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상무님, 딱 한 번만 저희 삼현 대표 모델로서 저 등대 앞에 서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아, 아쉬워요. 상무님께서 모델 해주시면, 광고 대박 날 것 같은데.”

“그래서 안 됩니다.”

뜬금없는 배 책임의 제안에 현장 스텝들이 열렬히 호응했지만, 강윤은 능란하게 일축했다. 은재로서도 아쉬운 결정이었다.

‘비싸게 굴긴. 좀 찍어주지.’

도시의 도강윤은 세련되고 차가운 매력을 소유했다면, 자연 속의 도강윤은 마치 태양의 빛을 흡수한 듯 광채가 났다.

‘내가 찍어야지.’

찰칵. 찰칵.

은재는 풍광을 찍는 척하며 현장의 인력을 사로잡는 남자를 슬그머니 카메라에 담았다.

‘알면 혼날 테지만.’

노출을 극도로 질색하는 남자였지만, 대의를 위해서 자신이 희생하기로 했다.

최고의 작품이 탄생할 테니.

“훗.”

무심코 희열의 미소가 새었다.

은재는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얼른 감추고 제 일에 몰두했다.

붉은 기운이 가져다주는 온화함을 한껏 느끼며 전망처럼 아름다운 섬 풍경을 작품으로 만들어 나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작가님, 고생하셨어요!”

어느덧 하늘과 수평선을 뜨겁게 달궜던 태양이 심해 깊숙이 잠기고, 등대가 흩뿌려지는 빛만을 남겨둔 채 언덕의 초지는 어둠에 휩싸였다.

“배고프다. 오늘도 바비큐입니까?”

“당연히 고기지. 시원하게 맥주 한잔해야겠지?”

“어제 고기랑 회를 하도 많이 먹어서 물려요. 치킨은 없어요?”

“나도 치킨이요!”

“치맥 찬성!”

스텝들이 왁자지껄한 가운데, 부랴부랴 장비를 정리하고 언덕을 떠났다.

그들의 뒤를 따르려는데, 촬영 내내 한걸음 물러나 있던 강윤이 살며시 다가와 은재의 팔을 붙잡았다.

“조금 있다 가자.”

“응.”

속닥거리듯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은재는 쿡쿡거리며 끄덕였다.

“상무님, 의자 놓고 갈까요?”

“그래.”

“커피도 있습니다.”

“정 비서님, 고마워요.”

분별력 넘치는 호석이 스텝용 캠핑 의자 두 개를 가져와 전망 좋은 위치에 나란히 놓고서 마지막으로 떠났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시끌벅적했던 등대 언덕이 삽시간에 적막해졌다.

은재는 시원하고 고요한 바닷바람을 느끼며 캠핑 의자에 앉아서 강윤이 건넨 커피를 마셨다.

“해지니 쌀쌀해졌어. 춥지 않아?”

“괜찮아.”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젓는데도 강윤이 자신의 슈트 재킷을 벗어서 은재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의 친절함에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요즘 아주 올바른 남자가 되었어.”

“아주 노력 중이야. 마음에 들어?”

“약간?”

“까다로운 서은재야.”

“쿡.”

미간을 모으는 남자의 능청에 은재는 짧은소리로 웃었다.

멋진 장소와 좋은 사람이 함께하는 밤은 더할 나위 없었지만, 좋으면 좋을수록 불안감이 상승했다.

잊으려 해도 심술궂은 하준의 언사가 귓가에서 틈틈이 맴돌았고.

“어차피 너흰 안 되는 사이잖아.”

“도강윤과 너의 미래는 뻔해. 너만 상처받으며 끝날 거야.”

그럴까?

우리의 길은 저 암흑의 바다처럼 캄캄할까?

“도강윤.”

가슴골을 지나는 날카로운 통증을 덮으며, 은재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등대 색의 비밀 알아?”

“그런 게 있어?”

밤바다를 관망하던 강윤의 초점이 옮겨왔다. 은재는 달처럼 은은한 빛이 도는 하얀 등대를 바라보며 부연했다.

“흰색 등대는 오른쪽으로 운항해라, 빨간 등대는 왼쪽으로 운항해라, 두 개가 같이 있으면 그 가운데로 가라. 그런 식으로 숨은 뜻이 있대.”

“심오한 뜻이 있었네.”

“응. 그렇게 등대는 빛으로도, 색으로도 배들의 길잡이를 해주는 거야.”

담백하게 설명하면서도, 머릿속엔 염원 같은 상념이 일었다.

캄캄한 우리의 길에도 등대가 있었으면 좋겠어.

오른쪽, 왼쪽, 그런 사소한 길이라도 알려주었으면 좋겠어.

‘함께 있는 이 순간만큼은 지킬 수 있게.’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남은 나날만큼은 환하고 밝게.

“내가 그렇게 할게.”

문득 도강윤의 부드러운 저음이 들렸다.

“등대처럼.”

마치 은재의 마음속 염원을 들은 양 그가 아련한 눈길을 넘기며 확고하게 덧붙였다.

“너는 오기만 해.”

아.

“늦어도 괜찮고, 헤매도 괜찮으니까.”

울컥.

“나는 늘 네 앞에, 네 곁에 있을 테니까.”

가슴이 벅찬 은재의 심장이 울렁거렸다.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목이 멨다.

수많은 날을 단념이라는 걸 했었다.

결단코 이뤄질 수 없는 관계라도 단정했기에 마음 깊숙이에서 꿈틀거리는 감정을 꾹꾹 누르기만 했었고, 외면했었다.

그래서 도강윤이 제게 고백 비슷한 말을 하는 이 순간마저도 비현실 같았다.

“내가 마냥 기다리게 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아?”

“응.”

“왜?”

짙고 풍부한 감정이 도사리는 그의 얼굴로 등대의 부서지는 빛이 덮은 찰나.

“사랑하니까.”

그가 말했다.

뜨거운 고백이 온몸에 울려 퍼졌다.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간절하고 아름다운 도강윤의 눈빛은 경이로웠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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