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아무래도 체온기를 가져와야겠어. 정말 열 있는 것 같아.”
“괜찮아.”
일어나려는 은재의 어깨를 강윤이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턱을 대며 은재는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몸살기일 수도 있어. 프로젝트며 일이며, 그동안 쉴 틈 없을 정도로 무리했잖아. 내일도 일정이 빠듯할 테고…….”
“서은재가 이젠 내 걱정도 하네?”
“설레?”
“무척.”
강윤이 은재의 허리를 바짝 당겨 자신의 품 안에 깊숙이 품었다.
“평생 이랬으면 좋겠다.”
“뭐가?”
“밤이면 서은재와 함께 있고, 깨어난 아침이면 서은재가 내 곁에 잠들어 있고, 내가 무리하면 잔소리도 해주고.”
프러포즈처럼 달콤했다.
귓가에 스치는 숨결도 달콤했다.
“서은재 씨.”
“응.”
“내 아내가 되어, 매일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진짜 청혼 같기도 했고.
“글쎄요.”
은재는 격을 뒀다.
설레발로 들뜨기엔 앞길에 지뢰가 너무 많이 깔려 있었다. 섣불리 몇 발짝 내딛다가는 형체도 없이 쾅! 폭발할 듯.
“현재로선 애인 정도가 적당해요.”
“더한 진도는 없다?”
“아직은?”
“왜?”
“내가 하도 쓴맛을 많이 봐서?”
못된 비유에 강윤은 탐탁지 않은 듯했지만, 은재는 태평하게 굴었다.
“그럼 현재는 어떤 맛인데?”
“음… 짜나?”
“달진 않고?”
말해 뭐 합니까.
무진장 달죠.
“으흠?”
내면의 팬심은 열성적으로 폴짝거렸지만, 은재는 짐짓 심드렁하게 턱을 까닥였다.
“도도한 여자야.”
강윤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이래도?”
승부욕이 작용한 남자가 유혹하듯이 은재의 입술을 진득하게 누르며 달콤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면서 엉큼한 한 손이 가운의 앞섶을 들췄다.
“음!”
반항하듯 은재가 파닥거리자,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쥔 그가 자신의 체중을 실었다.
은재는 묵직한 체중을 느끼며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러자 강윤이 키스를 멈추고 곧장 입술을 내렸다.
“꺅!”
은재는 비명을 질렀다.
찌릿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발끝으로 퍼졌다.
“뭐야.”
싫지 않음에도 은재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그의 어깨를 때렸다. 너무 대놓고 적나라한 행동에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음.”
하지만 이내 느물느물한 몸체가 되었다. 화끈한 열기가 도로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달아?”
얼굴을 파묻은 채 강윤이 관능적인 질문을 했다.
아.
어떻게 안 넘어갈 수 있느냐 말이냐.
“…음, 달아.”
은재는 항복하고 말았다.
정복자 기질을 타고난 강윤이 기분 좋게 웃었다.
“서은재는 다 좋은데, 솔직하질 못해서 탈이야.”
“알았어!”
찌릿찌릿한 전율로 온몸이 움찔거려 은재는 신경질을 냈다.
“인정했으니, 됐어.”
뜨거운 웃음을 흩뿌린 남자가 쪽, 하며 입맞춤하고서 상체를 일으켰다.
활짝 벌어진 가운의 앞섶을 단정히 여며주더니, 침대에서 멀어졌다.
‘하다 말고 어딜 가지?’
도도하게 굴었던 주제에 은재의 달뜬 눈길로 그를 좇았다. 강윤은 여유로운 몸짓으로 셔츠를 휙 둘러서 입었다.
‘어?’
은재는 벌떡 상체를 들었다.
“왜 옷을 입어?”
“아쉬워?”
강윤이 등 돌린 채 웃음기 실린 음색으로 물었다. 하지만 단추를 채우고, 차례대로 매무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밤에 어디 가려고.”
저도 모르게 볼멘 목소리를 내자, 강윤의 얄궂은 눈길이 되돌아왔다. 사랑이 충만한 눈동자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숙소로 가야지.”
“아, 숙소.”
은재는 그제야 배 책임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강윤이 숙소를 따로 요구했고, 은연중 깃들었던 서운함도.
“시간도 늦었는데…….”
슈트 재킷마저 걸치는 그의 냉정함에 왠지 모를 배신감이 치밀었다.
‘날 이렇게 들뜨게 해놓고!’
같이 가자고 말할까 말까 고심하는 은재의 낌새를 읽은 강윤이 곁으로 돌아왔다.
“너와 자고 싶지만.”
그리고 허리를 숙여 은재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었다. 짙은 키스는 애틋한 열망이 가득했다.
“어쩔 수 없이 간다.”
입술을 뗀 그가 은재의 뺨을 어루만지며 한없이 그윽한 눈동자로 들여다봤다. 은재의 섭섭함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왜?”
“눈들이 워낙 많잖아.”
“아.”
삼현의 상무님인데, 세간의 시선은 의식해야지.
“공연히 내가 미도 작가님의 위신을 깨트릴 수 없지.”
“날 위해서?”
“응.”
쪽.
강윤이 다시금 짧은 키스로 마무리 지었다.
“만일 무서우면 전화해. 곧바로 달려올게.”
“지금도 무서워.”
“웬일로 말을 예쁘게 하네?”
“방금 솔직함의 미덕을 배웠어.”
“픽.”
몹시, 무진장 아쉬운 마음이 도도함 따위 집어던졌다. 강윤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다른 건 또 뭐가 예뻐?”
“서은재의 전부.”
자꾸자꾸 미련으로 말을 건네고, 나가는 발길도 느려지며 입술만 쉴 새 없이 쪽쪽 붙었다.
결국.
“새벽에 갈까?”
“응. 동트기 전에.”
못내 아쉬움이 깃들었는지, 강윤이 입술을 붙이며 슈트 재킷을 벗었다.
은재도 열렬히 호응했다.
그의 뺨을 붙잡고서 뺨이 홀쭉해지도록 숨과 혀를 빨아들이는 순간.
띠, 띠.
강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상무님, 사모님과 계시는 거죠?
눈치가 없는 건지, 방해할 목적인 건지 호석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낯선 섬이라서 무슨 사고라도 났을까 무진장 염려되니까, 제발 답장을 주세요!
절절한 메시지에 둘 다 할 말을 잃었다.
‘가, 가.’
의욕 상실한 은재는 휘휘 손을 내저었고, 강윤도 입맛을 다시다가 슈트 재킷을 들었다.
“잘 자.”
“응. 낼 봐.”
결국, 은재는 자신의 숙소로 향하는 그를 대문 앞에서 배웅했다. 침대에 돌아왔을 때는 평소와 다른 허전함이 곱절로 일었다.
‘그래도…….’
이 섬마을에서의 밤은 늘 외롭고 쓸쓸했다. 그런 마음이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남자로 인해 치유된 기분이었다.
“훗.”
은재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걸며 침대에 누웠다.
혼자 자는 밤임에도 이렇게 평온한 밤은 극히 오랜만이었다.
***
아침이 되어 프로젝트 진행이 한창인 학교로 돌아가니, 뜻밖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하준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첫 배로 섬을 떠났다는.
‘제 짓이 부끄럽긴 했구나.’
그의 퇴장에 반기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했다.
은재는 원하준의 감정이 애정이 아닌, 도강윤에 대한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억지일 거란 결론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임현서, 원하준, 심지어 위대한 민경애 여사님까지 그에게 향한 감정들이 죄다 극단적이었다.
도강윤은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페로몬을 흩뿌리는 걸까.
‘참, 인기가 남다른 남자야.’
은재는 해탈한 듯 허허거리며 도강윤을 넘겨다봤다. 그는 삼현 팀원들에 둘러싸여 오전 일정을 소화하느라 분주했다.
‘아침에 봐도 멋있네.’
한 뼘은 큰 장신의 남자가 압도적으로 시선을 휘어잡았다. 관망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서 은재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맺혔다.
‘빼도 박도 못하겠네.’
이제는 저 남자를 보는 게 마냥 행복하고 좋으니 말이다.
강윤과 은재는 한동안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제 일에 몰두했다.
서로를 보듬거나 마주할 시간은 부족해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렘의 바람이 살랑살랑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상무님!”
“아이고, 상무님! 덕분입니다.”
도강윤은 정말 바빴다.
섬마을 대표들과 지역 발전을 위한 협의안을 논의했으며, 참여한 이들의 기운을 북돋고, 보건 및 정비가 한창인 집들을 오가며 주민들과 인사하느라 정신없었다.
삼현의 대표로서 참관한 그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은재의 마음 한구석엔 속상함이 스멀거렸다.
반면.
“작가님, 쉬엄쉬엄하세요.”
“네, 이미 그러고 있어요.”
은재는 한량처럼 느긋하게 즐기며 일했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려면 예술가의 심신이 평온해야 한다며, 너도나도 과하게 챙겼다.
쉬는데도 쉬라는 통에 은재 자신도 일하는 건지, 노는 건지 문득문득 혼동스러웠다.
어느덧 오후의 해가 기울어질 무렵.
지역 화가들로 인해 바뀐 오색찬란한 벽화를 카메라에 담는 은재에게 강윤이 다가왔다. 그러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스스럼없이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어딜?”
“전달 못 받았어?”
“참, 홍보 촬영 있었지? 일하느라 깜빡 잊었어.”
은재가 자각하자, 강윤이 선뜻 은재의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멨다. 그에게 이끌려 가며 은재는 두리번거렸다.
“근데, 다른 스텝들은 같이 안 가? 영상 촬영도 한다던데?”
“슬슬 올 거야.”
분주하게 촬영 장비를 챙기는 영상팀이 시야에 들어왔다.
강윤은 스텝들보다 먼저 은재와 이동할 계획이었다.
“길은 알아?”
“대충 들었어.”
“대충으론 부족할 텐데. 의외로 함정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