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그렇게 네 곁에 머물고 싶어.”
잔잔한 바다가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품는 바다처럼 은재도 자신을 품어주길 하준은 바랐다.
“무슨 소리야.”
반면, 은재의 눈빛엔 부담감이 가득했다.
“어색하게.”
“내가 너 좋아했던 거 모르지?”
그녀를 좋아했지만, 고백할 기회마저 녹록지 않았던 하준의 마음이 급해졌다.
“넌 나에게 있어 첫사랑이었고 짝사랑이었어. 나는 고등학교 때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거든.”
이렇게 된 거, 속마음을 남김없이 털어놓기로 했다.
“고3이라서 고백할 여유는 없었고, 한때의 감정이라고 치부하고 말았었어.”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오직 의사가 장래 희망이었던 하준이었다. 그렇기에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당시엔 의대 진학이 우선이었다.
“기억나? 대학교 내가 네 학교로 찾아갔었던 거.”
“아, 그랬었나?”
“기억 못 하는구나. 네가 휴학하기 직전이었는데.”
“휴학하기 전?”
“내가 운이 나빴지.”
비록 짧았지만, 은재가 자신과의 만남조차 기억 못 하자 하준은 씁쓸했다.
“네가 도강윤과 결혼하는지도 모르고, 네가 고백하려고 찾아갔으니까.”
“아…….”
명확한 시기를 밝히자, 은재가 난색을 보였다.
“그때 나는 단념했었어. 나 혼자 좋아하고, 나 혼자 실연했지.”
후회했던 하준이었다.
자신의 미래가 우선이라, 예과 2년을 마칠 동안 한눈팔지 않았고, 본과로 넘어가서야 사랑이 아쉬웠다.
그맘때 떠오른 사람이 은재였는데, 조금만 빨랐더라도 하는 후회가 되었다.
“그런데 너와 재회하고 보니, 그 감정이 되살아났어.”
두 번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
“난 여전히 널 좋아해, 은재야.”
“오빠.”
은재의 목구멍에서 답답한 한숨이 새었다.
좋은 선배로 알던 하준이었고, 감정의 교감 한 번 나눈 적 없던 사이였다.
“갑자기 왜 이래? 너무 급작스러워서 당혹스러워.”
“네 입장 이해해.”
“이해한다는 사람이 대체….”
무엇보다 께름칙했다.
고백하는 하준의 태도가 마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돌진하는 사람 같았다.
“알아. 네가 요즘 도강윤과 연인으로서 만나는 거.”
“뭐?”
“하지만 예전처럼 도강윤이 비겁하게 널 버리겠지.”
“하, 오빠.”
수박 겉핥기처럼 떠도는 이야기만으로 단정하는 그의 말에 은재는 피로도를 느꼈다.
“이제 그만해.”
“어차피 너흰 안 되는 사이잖아.”
돌연 하준의 눈이 매섭게 번들거렸다.
움찔.
의식 저편에선 자각했던 부분이라 은재는 정곡을 찔린 듯했다.
“도강윤과 너의 미래는 뻔해. 너만 상처받으며 끝날 거야.”
절실히 안다.
회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 비참한 결론을 타인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다.
“불편한 얘기는 그만하자.”
은재의 발이 움직였다.
“갈게.”
푹신한 모래에 움푹 발자국이 남는데, 하준이 성큼 은재의 앞을 가로막았다.
“은재야, 나는 아니야. 나는 널 책임질 수도 있고, 너에게 안락한 미래를 제공할 수 있어.”
“오빠.”
“우리 엄마도 널 좋아하고 탐탁히 여겨. 삼현가와 다르다고.”
하준이 눈동자를 부라렸다.
“내가 도강윤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 공부는 내가 그 녀석을 앞질렀다고.”
무심코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그녀의 팔뚝을 단단히 붙들고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
“당장 도강윤과 헤어지라는 거 아니야. 나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고. 나 같은 놈이 어디 있어?”
“놔.”
“기다릴 수 있다니까?”
뿌리치려 하자, 그의 표정에 교만이 서렸다.
감히 네 주제에 나를 받아주질 않아? 같은.
“너도 내게 호감이 있었잖아. 너의 미소는 내게 늘 다정했어.”
“오빠, 그건 친절이었어.”
단순히 고마워서 다정한 친절을 베푼 것뿐인데, 감정의 여지를 준 것이 되어버렸다.
“내 친절이 오빠한테 착각을 불러일으켰다면 그건 미안한데…… 친절과 감정은 별개야. 난 오빠한테 추호도 감정 없어.”
“싫은 건 아니잖아.”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좋아질 수도 있잖아. 우리 확인해 보자.”
갑자기, 하준이 팔뚝을 쥐어뜯듯이 붙잡고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억지로 키스하려고 덤벼서 은재는 저항하며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왜 이러는 거야!”
하지만 남자의 힘은 상당했다. 하준이 아예 은재의 뒤통수를 거머쥐며 입술을 붙이려는 찰나.
“원하준!”
불쑥 그들의 곁으로 드리워진 거뭇한 그림자가 격하게 하준을 떼어내고 주먹을 휘날렸다.
기습적으로 얼굴을 가격당한 하준이 휘청하며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강윤아….”
***
강윤은 부연 안개가 가득한 터널에 갇힌 기분이었다.
목포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도, 페리호에 올라탄 후에도 흐리멍덩한 기운을 쉬이 떨치지 못한 채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상무님.”
호석의 부름도.
“상무님, 전화 왔습니다.”
제 핸드폰의 진동도 느끼지 못할 만큼.
징―
강윤은 그제야 눈을 뜨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녀의 집착이 발동될 터였다.
“네, 어머니.”
[도 상무, 어딥니까?]
“목포요.”
[아니, 내가 몇 번이나 오늘 맞선 약속을 잡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만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어미를 왜 이리 버겁게 하십니까?]
“죄송합니다.”
되돌려주고 싶은 말은 어머니의 입에서 나왔다. 강윤은 무의식중에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민경애 여사가 화들짝 놀랐다.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럽니까?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
“아닙니다.”
[안 그래도 연일 그 프로젝트 때문에 쉬지 않고 무리했다 들었습니다. 오늘도 일정이 빡빡했을 텐데, 왜 굳이 목포에 내려갑니까?]
“어머니, 제 일입니다.”
[알지만, 행여 몸이라도 상하면….]
“염려 마세요. 끊겠습니다.”
민경애 여사의 잔소리가 길어지는 듯해서 강윤은 강경하게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곁에 얌전히 앉아 있던 호석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오늘 맞선 약속이 있으셨습니까?”
“들었어?”
“예, 큰 사모님 목소리가 워낙 크셔서.”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호석이 말을 이었다.
“큰 사모님은 지치지도 않으세요. 시종 상무님 걱정뿐이신 것 같아요.”
“과하시지.”
“그래도 엄마는 대단한 것 같아요. 지금도 상무님 목소리만 듣고 컨디션 저조한 걸 단번에 알아차리시잖아요.”
“아, 그랬나?”
강윤으로선 때론 성가실 정도로 익숙한 일이었는데, 부모와의 접점이 없던, 특히 모정을 느껴본 적 없는 호석은 부러워하는 기미가 다분했다.
강윤은 새삼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배부른 투정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다시금 민경애 여사와 확연히 다른 온도 차를 가진 친모 백지연을 떠올렸다.
백지연은 여전했다.
열여덟 살에 첫 대면하여 자신의 친모냐고 물었을 때도 벌벌 떨었는데….
“무슨 소리니? 넌 삼현그룹 민경애 여사님 아들이잖니?”
“상무님은 엄연히 민경애 여사님의 아들입니다.”
안절부절못하던 그녀의 표정을 지워 버리려고 강윤은 망연한 시선을 차창 너머 바다에 뒀다.
‘잊어버리자.’
거듭 되뇌었지만, 숨이 갑갑하게 막혔다. 갈비뼈 안쪽을 차지한 흉통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강윤은 선착장에 도착한 페리호에서 내렸다.
“상무님, 컨디션 괜찮으세요?”
“응.”
“배 책임님이 운동장에서 바비큐 파티한다고 한창 준비 중이시랍니다. 상무님 자리를 마련해 뒀으니, 어서 오시라고 하네요.”
은재도 거기 있겠군.
“시장하시죠?”
“별로.”
호석이 캐리어를 끌며 졸졸 따라붙었다. 강윤은 묵직한 흉부에 숨을 밀어 넣으며 부둣가를 거닐었다.
“어? 상무님, 작은 사모님 같은데요?”
무심한 눈길을 전방에 두는데, 호석이 해수욕장 방향을 손가락질했다.
그의 손끝을 좇은 강윤의 시야에도 바닷가에서 마주 서 있는 이들이 포착되었다.
“은재?”
“맞죠?”
한 사람은 강윤의 초점에 또렷하게 잡히는 서은재였고, 다른 이는 원하준이었다.
‘왜?’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정 비서 먼저 가.”
“예.”
상황 파악이 빠른 호석은 고분고분 그의 명령에 따랐고, 강윤은 곧장 바닷가로 향했다.
은재에게 시선을 붙박은 채 시멘트 도로를 지나쳐 모래사장과 인접한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
난데없이 하준이 은재의 팔뚝을 잡았다. 어렴풋이 불편한 듯한 은재의 동작이 감지되었다.
저벅저벅.
강윤의 길쭉한 다리가 뛰다시피 나아갔다.
“왜 이러는 거야!”
은재의 비명 같은 소리를 듣는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하준은 그사이 키스를 시도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원하준!”
삽시간에 거리를 좁힌 강윤은 은재에게서 하준을 떼어내며 주저하지 않고서 주먹을 날렸다.
나약하게 휘청이다가 모래밭에 엉덩방아 찧은 하준을 강윤은 위협적으로 직시했다.
“강윤아…….”
“내 여자한테 뭐 하는 짓이야.”
“내 여자?”
하준이 비척비척 일어나더니, 찢긴 입술에 맺힌 피를 엄지로 쓸며 비열하게 조롱했다.
“지나간 여자 아닌가?”
“뭐?”
“얼마 못 가 버릴 여자고.”
“어디서 함부로 지껄여!”
하준의 도발에 강윤은 사정없이 녀석의 목을 움켜쥐었다.
“도강윤, 그만해.”
은재는 강윤의 손을 붙들며 만류했다. 하준에게도 나무라는 눈초리를 두며.
“오빠도 하지 마.”
강윤은 멈칫했다.
“오빠?”
천적 없는 수사자처럼 느긋하던 강윤의 내면에 폭발한 것은 질투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