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삼현패션에서 주최하는 F/W 시니어 패션쇼에 참석한 강윤 앞으로 피날레를 장식한 반백의 모델이 다가오더니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며 윙크했다.
스포트라이트가 한꺼번에 쏠렸지만, 강윤은 당황한 기색 없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꽃을 받았다.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이어 디자이너가 무대에 오르며 패션쇼는 화려한 막을 내렸다.
“도 상무님, 불쾌하진 않으시죠?”
패션쇼가 끝난 후,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에게 삼현패션 전무이사인 소이연이 말했다.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께서 노림수로 이벤트를 만드셨어요. 우리끼리 솔직하게 하는 말이지만, 상무님께서 메인모델보다도 훨씬 멋있으시니까.”
“과찬이십니다.”
“다음번엔 상무님께서 모델 해주시면 안 돼요?”
“안 됩니다.”
단칼에 일축하자, 소 이사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저희가 요즘 추세대로 이번 광고모델로도 시니어 배우로 기용했어요. 아, 마침 오시네요.”
소 이사의 눈길을 좇은 강윤의 미간이 실룩했다.
붉은색 원피스로 돋보이는 자태의 여인은 강윤의 친모인 백지연이었다. 그녀가 천연덕스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네.”
강윤은 정중하되 냉담하게 화답했다. 그러고서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며 발길을 붙잡았다.
“상무님,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백지연의 요청에 따라 강윤은 패션쇼가 개최된 빌딩의 1층 카페에서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녀는 제게 다가온 팬들에게 사인해 주는 여유를 부리다가, 강윤의 차디찬 눈빛을 인지하고 겸연쩍은 미소를 걸었다.
“바쁘신 분이 공연한 시간을 제게 할애하는 건 아닌지…….”
“아시면 본론을 말씀하시죠.”
“그게…… 먼젓번 제게 한 말씀 때문에 너무 신경이 쓰여서요.”
백지연은 카페 분위기를 살핀 후, 표정을 내밀하게 감추며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제 입장을 좀 헤아려 주시고, 무엇보다 상무님 또한 사회적 명성과 지위가 있으시니, 언변에 주의해 주십사 해서….”
쓱.
강윤은 팔뚝을 테이블에 대며 얼굴을 그녀 가까이 들이밀었다. 갑작스러운 접근으로 그녀가 흠칫 놀라며 긴장했다.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머니?”
“하, 상무님.”
비릿한 그의 호칭에 백지연의 낯이 파리해졌다.
“새삼 왜 이러세요, 상무님.”
서둘러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눈초리에 강윤은 픽, 비웃었다.
“그렇게 제 존재가 탄로 나는 게 두려우세요?”
“상무님은 엄연히 민경애 여사님의 아들입니다.”
“아, 비밀리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보다 상간녀인 게 더 두려우시겠구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 테니.”
“상무님.”
백지연이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아랫입술을 말아 올렸다.
“제게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러십니까? 오래전 정리된 일인데….”
“억하심정이라.”
강윤의 입술 끝자락에 픽, 비소가 맺혔다.
시퍼렇게 들뜬 안색보다 불안감으로 일렁이는 눈동자를 마주한 그의 심중이 착잡했다. 뻐근한 흉통도 일었다.
“백지연 씨.”
이윽고 강윤은 나직하게 읊조렸다.
“다신 보지 맙시다.”
한기가 서릴 정도로 차가운 눈빛을 거두며 강윤은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
백지연이 양손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괴로운 표정을 가장했으나 입꼬리는 안도의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후.”
씁쓸한 기운조차 스미지 않아 강윤은 공허한 헛숨을 내쉬며 카페의 입구로 향했다.
언뜻 그의 시야 반경에 낯익은 인영이 어른거렸다.
“응?”
휙, 그는 고개를 돌렸다.
벙거지를 쓰고 바람막이 재킷을 입은 남자가 카페의 후문으로 나갔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닫히며 그의 자취는 사라졌다.
“상무님, 왜 그러십니까?”
입구에서 대기하던 호석이 다가왔다. 의아한 듯 그의 어깨 너머를 넘겨봤다.
“아니야. 가자.”
“예.”
잘못 봤나?
강윤은 자신을 쳐다보는 백지연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카페에서 나왔다.
호석이 열어준 세단의 뒷좌석에 오르는 순간,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강윤은 눈꺼풀을 닫으며 등받이에 기댔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약이라도 사 올까요?”
“됐어. 목포로 가자.”
“어차피 지금 가도 저녁입니다. 차라리 오늘은 쉬셨다가 내일 일찍…….”
“출발해.”
운전석의 호석이 룸미러로 걱정스레 물었지만, 강윤은 눈을 감은 채 단호하게 대답했다.
***
일과가 분주하게 흘렀다.
배 책임을 비롯하여 목포 시장 일행과 함께 섬의 중요한 거점을 한 바퀴 돌다 보니 벌써 하루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벌써 6시가 넘었네.’
은재는 학교 담장 너머 먼발치의 점잖은 바다를 바라봤다. 오후에나 온다더니, 저녁이 되어가도록 강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같이 일하면 종일 볼 줄 알았더니, 막상 코빼기도 안 비추네.’
바쁜 사람이라는 구실로 언제 오느냐고 묻지도 못하면서, 은재는 남모르게 바닷길을 오가는 페리호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면 온다, 가면 간다, 알아서 보고해 주면 얼마나 좋아.’
공연한 자존심이라고 자신을 타박하면서도, 마음 한편엔 강윤에 대한 불만도 쌓였다.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게 뭐 어렵다고.’
은연중 투덜거리다가 깨달았다.
그에게 몰인정하게 선 긋던 일이 엊그제인데, 어느새 자신이 그가 보고 싶어서 안달 났음을.
‘지조 없어, 서은재.’
한심하다고 자조하면서 돌아서는데, 정리 중인 텐트에서 하준이 두 개의 음료수를 들고 다가왔다. 그러고서 친절히 캔 뚜껑을 따서 건넸다.
“은재야, 이거 마셔.”
“고마워. 오빠는 진료 끝났어?”
“응. 다른 샘들이 마무리 중이야.”
“오빠, 고생했네.”
“너야말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힘들었지? 프로젝트의 간판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나름 재미있어.”
쉴 틈 없는 일과였지만, 이 섬마을이 제 고향처럼 편하고 좋은 은재로선 마냥 신난 하루였다. 낡고 작은 섬이 멋지게 변신 중이라 기대감도 컸다.
“네게 주민들이 엄청 고마워하더라. 네 덕분에 이렇게 섬이 좋게 바뀐다면서.”
“난 한 것도 없는걸.”
그러면서도 강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은재를 프로젝트 주체로 내세우며 모든 공을 돌렸다.
이 섬마을을 첫 번째로 선택한 까닭도 오롯이 은재 때문이었고.
‘아닌 척하지만, 엄청 세심한 남자야.’
강윤을 떠올리는 은재의 입가가 무의식중 흐뭇하게 길어졌다. 하준이 멋도 모르면서 따라서 빙글빙글 웃었다.
“저녁은 이따 8시에 바비큐 파티로 한다던데, 그전에 해안가 산책할래?”
“나중에…….”
하준의 제안을 거절하려던 참이었다.
“이모!”
“우리 희성이 왔네.”
정경과 손을 잡고 오던 희성이 종종 달려와 은재의 품에 안겼다. 그러더니 약간 수줍은 눈동자로 하준을 올려다봤다.
“선생님, 조개 주우러 가요.”
“그럴까?”
“아휴, 아까 선생님께서 진찰해 주시면서 조개 주우러 같이 간다고 약속했다고 하도 성화라서 데려왔어요. 언니도 같이 가자.”
하준이 다정히 희성의 손을 잡자, 정경이 멋쩍은 기색으로 변명하다가, 은재에게 사정하듯이 눈짓했다.
“그래.”
은재는 마지못해 그들의 길에 동행했다.
***
“이모, 선물!”
“와! 예쁘다! 고마워.”
모래밭을 뛰놀며 조개껍데기를 주워온 희성이 쪼르르 달려와서 건넸다.
높은 모래성처럼 조개무덤이 형성되었지만, 은재는 첫 선물처럼 손뼉 치며 기뻐했다.
“이모, 어떤 게 제일 예뻐?”
“희성이가 준 건 다 예뻐.”
“선생님 건?”
“희성이가 준 게 제일 예뻐.”
“내 것도 예쁘다고 해줘.”
집요한 희성의 장단을 맞춰주고 있으니, 한 아름의 조개껍데기를 들고 오던 하준이 볼멘소리를 냈다.
은재는 설핏 웃어만 주고서 귀여운 희성이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희성이 응가!”
돌연 희성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허벅다리를 사선으로 꼬면서 엄마를 애타게 불렀다.
배불뚝이 정경이 뒤뚱뒤뚱 걸어와 은재는 희성이 손을 잡았다.
“내가 데려갈게.”
“아니야. 쉬지도 못했으면서. 언니는 샘하고 쉬다가 들어와. 먼저 갈게! 샘, 감사해요!”
정경이 걸걸하게 웃어젖히더니 아들 손을 잡고서 오순도순 걸어갔다.
모자(母子)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은재의 눈초리를 좇던 하준이 말했다.
“희성이 너무 귀엽네.”
“응. 그렇지?”
“네가 이 섬에서 꽤 살았다며? 진작 귀국했었던 거야?”
“…음.”
“내가 거북한 질문을 했나?”
은재의 어영부영한 고갯짓에 하준이 빤히 쳐다보다가 조용히 불렀다.
“은재야.”
“응?”
“우리 말이야. 예전에 굉장히 편한 사이였잖아.”
나긋나긋한 어투였지만, 그보다 깊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때처럼 날 편히 대해주면 안 될까?”
세차게 일렁이는 눈동자 또한.
“나는 네가 의지할 수 있고, 기대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