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52화 (53/84)

52.

제 짐을 풀고서 발대식 준비가 한창인 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는 은재에게 제일 먼저 다가온 사람은 섬마을 청년회장이었다.

“작가님 덕분에 섬이 온통 활기차네. 고마워요.”

“제가 뭘요.”

“작가님 아니었으면 삼현 같은 대기업에서 우리 섬마을처럼 쪼그마한 델 어찌 선정하오? 안중에도 안 뒀겠지.”

청년회장의 입술이 연신 방실거렸다.

“작가님.”

“네.”

“이따 목포 시장님도 오신다는데, 겸사겸사 먼젓번에 말한 거, 홍보 그거, 응? 작가님께 간청하실 것 같은데…. 괜찮겠소?”

“상생 프로젝트도 흔쾌히 응하셨는데, 해드려야겠죠.”

“잘 생각했소! 내가 한시름 놨네.”

툭!

청년회장이 은재의 등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신난 나머지 저도 모르게 힘이 세게 나가서 얼떨결에 맞은 은재가 휘청했다.

“아이고, 미안타.”

놀란 그가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비벼댔다. 아프고 황당해서 은재는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작가님!”

“네, 책임님.”

살랑거리며 배 책임과 팀원들이 다가왔다. 그들과 일일이 인사한 후에 둘만 남자, 배 책임이 발대식 진행 순서를 꼼꼼히 설명했다.

“…발대식 기념사진은 어차피 보도자료로 나갈 거라 기자들이 찍을 거예요. 작가님께서는 예쁘게 사진만 찍어주시면 돼요.”

“저도 찍어요?”

“당연하죠. 작가님이 저희 중심인데.”

“상무님도 안 오셨잖아요. 원칙적으론 상무님이 중심을 잡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상무님께서는 애초에 작가님을 이 프로젝트 주체로 세우셨어요.”

“그래요?”

“네.”

몰랐던 사실이었다.

강윤은 상생 프로젝트에 은재를 주체로 내세운 까닭은 또렷했다. 상생 프로젝트에 은재를 포함한 것이 아니라, 은재 때문에 상생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이다.

그녀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그래야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므로.

“참, 작가님 숙소는 이 마을에 있다고 하셨잖아요?”

“네.”

배 책임의 물음에 은재는 간단히 고갯짓했다.

상생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구성원으로는 삼현 직원들 외에 의성대에서 지원한 의료봉사팀이 있고, 폐교는 물론 노후화된 집 등을 개축할 건축팀, 도로 공사팀 등이 있었다.

그들은 삼현 측에서 제공하는 숙소나 학교 운동장에 마련한 글램핑 텐트에서 머물게 되었다.

“상무님과 같이 머물지 않으시나 봐요.”

“네?”

“저는 두 분이 연인이시라 당연히 같이 계실 줄 알고 상무님 숙소를 미처 마련하지 못했거든요.”

강윤의 숙소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라, 은재로서는 난감했다. 같이 머무는 건 쑥스럽긴 한데….

“근데 따로 준비하라는 전달이 와서 좀 당황했어요. 저 혼자 설레발이었나 봐요.”

“아, 그러셨구나. 마련은 하셨어요?”

“네, 상무님은 상관없다고 하시는데, 저희처럼 글램핑 텐트에서 주무시도록 할 순 없잖아요. 청년회장님 도움으로 좋은 숙소 마련했어요.”

“책임님께서 고생하셨네요.”

은재는 태연하게 호응하면서도 내심 섭섭한 마음이 깃들었다.

그렇다고 따로 잘 것까지는….

***

삼현 상생 프로젝트가 시작된 섬은 화창했다.

강윤은 프로젝트가 발현되기 전부터 이미 완벽하게 설계를 마쳐 놓았고, 수많은 전문가와 협약을 맺었다.

그 덕분에 마을 상생센터로 리모델링 중인 폐교는 점차 근사해졌고, 울퉁불퉁하게 가팔랐던 길은 평평히 정비되었고, 무너질 법한 지붕이나 벽 등 허름한 집들도 보수에 들어갔다.

그로 인해 사방이 뚱땅거리는 소음으로 시끄러웠지만,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운동장에 한데 모인 마을 주민들은 새로이 탄생할 섬에 대한 기대감에 들뜬 채로 뭍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동네잔치를 벌이거나 진료받기 위해 긴 줄을 섰다.

그 줄의 끝에 의성대 의료봉사팀 대표인 하준이 있었다.

“…상처 아물 동안 물 만지지 마. 붕대 젖으면 더 아야 해. 약도 잘 먹어야 하고.”

“네!”

“내일 소독하러 오세요.”

하준은 상처 염증이 발생한 손가락에 치료를 끝내며 친절히 웃었다.

다섯 살 꼬마 환자는 씩씩하게 붕대 감은 엄지를 높이 들며 엄마의 품에 안겼다.

“선배, 나랑 교대하고 좀 쉬어요.”

“그래, 고마워.”

첫 배로 섬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지 못한 채 진료에 나섰던 하준이었다. 후배와 교대하고 마스크를 벗으며 간신히 한숨 돌렸다.

“후.”

생수로 목을 축이며 진료 텐트에서 나오는데, 운동장 한편에서 사진 찍느라 여념 없는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은재야.”

저 여자 때문이었다.

이 의료봉사에 지원한 것은.

“오빠가 왔구나.”

하준은 은재의 환한 미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도강윤과 서은재가 공식 연인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접한 지 며칠 안 되었다.

더불어 그들의 재결합을 운운하는 이들도 숱해, 하준은 의료봉사 지원을 취소할까 고심했다.

그런데 어제.

“삼현의 도강윤 상무가 중매 시장에 나왔더라.”

“네?”

“건우건설과 혼담이 오간다더니, 임 회장 딸이 뉴욕으로 떠나면서 도루묵이 되었는지.”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의 말씀에 아연한 하준은 젓가락질을 멈췄다.

“강윤이 재혼한대요?”

“민 여사야 아들 재혼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혼잣말처럼 전하던 어머니께서 돌연 하준을 새침한 눈초리로 흘겼다.

“나도 그 심정은 이해해, 아들아. 누군 두 번이나 결혼하는 동안 넌 대체 뭐 하니? 우리 아들이 뭐가 못나서?”

“전처와 재결합 얘기가 있던데요.”

하준은 화제를 고수했다.

“도 상무가 전처하고 연애해서? 그래 봤자 잠깐 아니겠니? 민 여사가 그 관계를 허락할 리도 없고. 그 며느리를 그토록 미워하는데.”

“왜요?”

“그 며느리 아버지가 워낙 악독한 사람이었거든.”

쯧, 혀를 차며 어머니가 주워섬겼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그 아버지가 삼현과의 사돈을 맺는다고 언론사에 대대적으로 발표하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결혼이 성사되고, 결혼 후엔 그 아버지가 본성을 드러냈지.”

“어느 정도기에.”

“만일 심 봉사였다면, 심청일 그 손으로 인당수에 밀어 넣을 사람이었거든.”

“하.”

그 정도였나?

하준은 연민의 감정이 일었다.

은재의 처지를 되새김질할수록 심장은 고통스럽게 죄어들었다.

“딸이 삼현가의 며느리라는 점을 빌미로 요구가 끝도 없었어. 삼현에선 엄청난 골칫덩이를 떠안았던 거야.”

“그분 감옥 가셨잖아요? 탈세, 횡령, 이런 경제 비리로.”

“역량도 안 되면서 야욕으로 가족의 인생을 망쳤지. 종국엔 본인은 감옥행에 부인은 죽고, 딸은 소박맞듯 내쫓겼으니… 쯧쯧.”

“불행한 결과네요.”

“딸이 안됐지.”

“어머니는 그 딸이 안쓰러우세요?”

“딸이 무슨 죄니. 연회에서 몇 번 본 적 있는데 예쁘고 총명하고 예의 바르더라. 그런 집안은 싫은데, 그 딸은 욕심났어.”

“그 딸이 미도 작가인 건 아세요? 어머니께서 요즘 한창 빠져 있는 사진이요.”

“어, 그렇다더라. 나도 그 얘기에 괜히 반가웠어.”

어머니의 온화한 표정에 하준은 안도했다. 어머니가 은재를 어여삐 여기는 것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하준은 섬에 왔다.

자신이 은재의 현재를 구제하고, 그녀의 미래가 되어주겠다고 확고히 결심하며.

“오빠는 언제 왔어? 발대식에서는 안 보이더니?”

“그런 건 거북해서 잠시 피해 있었어. 그때 온 거야?”

“응. 내가 사진 담당이잖아.”

은재가 빙긋 웃으며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한껏 편안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하준의 눈매가 반달로 휘었다.

“작품 사진도 찍어?”

“응. 홍보 사진용으로. 전시회도 예정되어 있고.”

“근사한 사진이 나오겠네. 우리 어머니가 네 팬이야.”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줘.”

“예전에 우리 어머니와 인사한 적 있다며? 우리 어머니가 그때 널 되게 좋게 봤다더라. 언제 한 번 같이 식사할 수 있을까? 사인도 부탁하고.”

“아, 그래? 사인은 꼭 해드릴게.”

식사는 거북한지 은재는 둘러대듯 응수하더니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곤 진료 텐트며, 이동식 의료버스 앞에 늘어선 줄로 시선을 돌렸다.

“오빠는 의료봉사하느라 고생이 많겠는데? 대기 환자가 어마어마해.”

“낙후지역 오면 보통 이래. 여건상 병원 방문이 쉽지 않거든.”

하준은 확실히 식사 약속을 잡고 싶은 열망을 일단 가라앉히고, 편한 대화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래도 매번 마을 어르신들이 반겨주셔서 그것만으로도 뿌듯해.”

“좋은 일 하네.”

“너도.”

하준은 자신의 양손으로 은재의 얼굴에 비쳐드는 볕을 가렸다.

“오늘따라 땡볕인데, 너야말로 계속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느라 고생이겠다. 자외선 차단제는 꼼꼼히 발랐지?”

“당연하지.”

은재는 다정한 그의 행동에 싱그럽게 웃었다. 하준은 예쁜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은근히 입을 뗐다.

“은재야, 이따가 일과 마치고 나서….”

“작가님! 목포 시장님 오셨어요!”

“네! 가요!”

하필 그때 목포 시장 일행이 등장했다. 삼현의 배 책임이 다급히 손짓했고, 주민들이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갔다.

“가볼게. 오빠, 수고해.”

“그래, 너도.”

서둘러 달려가는 은재의 뒷모습을 좇든 하준의 표정에 아쉬움이 배어 나왔다. 눈동자엔 남모르게 번뜩한 빛도 돌았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