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51화 (52/84)

51.

‘도강윤이…….’

은재의 심장이 울렁거렸다.

무릎에 올려놓은 제 손가락을 초점 없이 보며, 강윤의 말들을 되새김질했다.

“서은재는 어려워.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서은재한테 노력하는 중이야.”

“널 또 잃어버린 줄 알았어.”

“널 잃은 후니까.”

“잃어선 안 되었음을 뒤늦게 지각했지. 멍청하게도.”

그 모든 말들이 후회 어린 고백이었다.

도강윤의 절절한 후회들.

“내가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어. 안 그러냐? 그리 담대하던 도강윤이라는 놈이 후회라는 걸 하는데.”

“…그래서 절 속이라 하셨어요?”

“만일 널 찾으면 내가 위중하다고, 널 보고 싶어 한다고 말하며 붙잡으라고 했다. 너는 삼현가가 지긋지긋할 테지만, 내게만은 매정히 못 할 테니.”

도성만 회장은 은재의 속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운명이라 생각한다. 내가 입원했을 때 시의적절하게 널 찾았으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셨어요. 전 정말로 돌아가시는 줄 알고…….”

“미안하다, 은재야.”

할아버지의 손이 속상해하는 은재의 손을 그러쥐었다.

“내 욕심일지 몰라도, 난 네가 강윤이 곁에 있어주길 바랐어.”

손등을 토닥토닥 어르며 덧붙였다.

“너희 둘을 볼 때마다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그 선을 이어주지 못해 한없이 안쓰러웠거든.”

“둘이 같이 살라고 하신 건요? 그건 엄청난 관여인데?”

“붙어 있어야 붙지.”

짐짓 볼멘소리를 내자, 그도 퉁명스레 읊조렸다.

현명한 답이었다. 그의 혜안 덕분에 요즘 도강윤과 철썩 붙어버린 은재였으니.

“마음이 풀린 게야?”

“어쩔 수 있나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는다는 사실로 용서해야지?”

은재는 콧잔등을 실룩했지만, 이내 빙그레 웃었다. 허허, 하고 도성만 회장도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

탁.

펜트하우스로 들어서는 은재와 시원스레 재킷을 걸치며 나오던 강윤이 맞닥뜨렸다.

“왔어?”

“어. 어디 가?”

“전화를 안 받기에 데리러 가려던 참이었어.”

은재는 다정한 눈빛의 남자를 빤히 올려다봤다. 펜트하우스 조명의 은은한 빛을 받은 남자의 얼굴은 그 여느 때보다도 온화했다.

이런 눈빛을 가진 도강윤인데…….

열아홉의 도강윤은 간혹 이런 눈으로 날 보긴 했었다.

그저 눈동자가 유난히 까매서 깊어 보인다고 단순히 생각했는데, 이제 와 돌이켜 보니 무수한 감정이 담긴 깊이였다.

“도강윤.”

“응?”

은재는 그를 부드럽게 불렀다.

“그사이 내가 보고 싶었어?”

“아마도?”

강윤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지만, 눈동자만큼은 검푸른 심연처럼 깊었다.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은재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까치발을 들었다.

“얼마큼?”

그리고 제게로 그의 입술을 이끌어 소곤거리듯 입술을 건드렸다.

“적어도….”

살짝 입맞춤하고 떼어지는 입술을 으레 그렇듯 그의 입술이 자석처럼 쫓아왔다.

“매일, 매 순간. 그리고…….”

뜨거운 숨결을 내포한 입술의 고백은 한없이 달콤했다.

“내 남은 나날만큼.”

“훗.”

오글오글한 전율로 옅게 웃는 은재의 입술을 머금으며, 입술의 선을 따라 쓰다듬은 듯한 감촉은 더없이 감미로웠다.

힘주어 그녀의 입술을 벌리는 그의 입술을 따라 은재의 입술도 저항 없이 열렸다.

쓱.

강윤의 큰 손이 은재의 턱을 부드럽게 감쌌고, 비스듬히 턱을 기울이며 본격적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치아부터 잇몸, 혀 아랫부분까지 파고드는, 농밀한 키스를 받아들이며, 그의 목덜미를 감은 은재의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 상태로 갈증을 채우듯 깊고 짙은 키스를 나눴다. 서로의 타액이 얽혀들고, 서로의 숨결이 하나로 합체될 때.

키스는 짙고 애틋했다.

서로를 취하는 이 순간마저도 서로의 감정들이 전이되었다.

내내 감췄지만, 보고 싶었던 날들이 숱했다.

유럽을 거닐면서 제 정수리 위의 하늘에 눈 마주치면서 도강윤의 얼굴을 오버랩하기도 했으며, 홀로 지치도록 걷다가 문득 닮은 이목구비와 스치기라도 하면 심장을 철렁이기도 했다.

그런 나날이 채워지는 듯했다.

서로를 갈라놓았던 긴 시간 속에서도 서로를 떨쳐내지 못했던 그리움.

어쩔 수 없음, 이란 포장으로 내리누르고 억제해야 했던 그 무수한 감정들.

표현하지 못하였던 마음이 켜켜이 쌓여, 단단하게 빗장을 걸어뒀던 문이 열리며, 오롯이 서로에게 솔직해지는 순간을 맞이했다.

접착된 가슴팍의 거친 반동과 가파르게 상승하는 서로의 심장박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서로의 입안을 헤집으며, 서로를 탐닉하는 키스처럼 서로를 매만지는 갈구도 짙어졌다.

입안을 뜨겁게 탐하던 혀가 물러나며 입술에 섬세한 여운을 남겼다. 그마저도 아쉬운지 아랫입술로, 윗입술로 달콤한 자취를 흩뿌렸다.

이윽고, 강윤의 입술이 완전히 떠났다.

“저녁은 먹었어?”

빙그레, 고혹적인 미소를 그린 그가 허스키하게 읊조렸다.

“음… 안 먹었지만, 안 먹을래.”

한껏 키스에 취한 은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고서 주저하지 않고 그의 입술에 도로 제 입술을 붙었다.

그의 입속으로 뜨거운 숨결을 쏟아부으며 강윤의 혀를 옭아맸다.

격렬한 키스를 되돌려받자 도강윤이 은재가 원하는 바를 읽었다. 그대로 뜨겁게 키스하며 은재를 안아 올렸다.

***

“작가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선착장에 정박한 페리호에서 내리는 은재를 삼현그룹의 상생 프로젝트 담당인 배수혜 책임이 맞이했다.

곁에서 대기하던 윤석경 선임이 은재의 캐리어 가방을 빼앗듯 가져갔다.

“주세요, 작가님.”

“아니에요.”

“제게 맡기세요. 카메라 가방만으로도 무거우실 텐데.”

“괜찮아요, 선임님. 제가 그렇게 연약하지 않아요.”

“네.”

살뜰한 윤 선임에게 은재는 정중히 거절하며 제 캐리어를 도로 가져왔다.

잠자코 지켜보던 배 책임이 입을 열었다.

“상무님께서는 외부 행사가 있어서, 일정 마무리하고 출발한다고 연락이 오셨어요. 아마도 마지막 배로나 도착하실 것 같네요.”

“네, 전화로 들었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오셨나요?”

“저희 팀은 어제 도착해서 프로젝트 발대식 준비 중이고요. 의성대 의료봉사팀도 조금 전 도착해서 숙소에서 짐 풀고 계세요.”

“제가 늦었나 봐요.”

은재는 머쓱하게 웃었다.

“발대식이 오전 11시라 아직 여유 많아요. 작가님은 짐 풀고, 천천히 학교로 오세요.”

“네, 그럴게요.”

오전 7시 목포에서 첫 배를 탈 예정이었는데, 아침나절까지 질척거린 도강윤 때문에 한 시간여를 늦고 말았다.

지칠 줄 모르는, 강력 체력 남자는 나가떨어질 정도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어놓고는 태연자약하게 출근했다.

그의 배려로 정 비서가 목포까진 편히 픽업해 줬다만.

“언니!”

온 식구를 대동하고 부둣가로 나오던 정경이 은재를 발견하고 뛰다시피 다가왔다.

배불뚝이 임산부의 과격한 몸놀림에 곁에서 호위하던 지혁이 조마조마해하며 따랐다.

“이모!”

희성도 지혁의 손을 대번 뿌리치고서 달려왔다. 제 허리춤에 폭 안기는 희성을 바락 안으며 은재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희성이 잘 있었어? 이모 보고 싶었어?”

“응! 이모, 엄청나게 보고 싶었쪄!”

“나도!”

은재는 희성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고서 오뚝이처럼 요리조리 몸을 흔들었다. 희성이 간지러운 듯 까르르 웃어젖혔다.

“언니! 첫 배로 온다며! 왜 이제 와!”

“일이 많았어. 근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왜 굳이 나와? 집에 올라가면 볼 텐데.”

“어이구, 말도 마세요. 희성 엄마가 어젯밤부터 언니 만난다고 설레서 잠도 못 자고, 아침나절부터 몇 번이나 부둣가에 나오고 그랬네요.”

“여보.”

지혁의 앓는 소리에 정경이 매섭게 눈알을 부라렸다.

“언니한텐 내가 생색낼 거니까 나서지 마.”

“어. 희성아, 우린 먼저 들어가자.”

“여보, 언니 가방.”

“예, 예.”

뾰족한 정경의 명령에 말 잘 듣는 지혁이 은재의 캐리어 가방을 번쩍 들어 어깨에 짊어지고, 희성의 손을 꾹 잡고서 돌아섰다.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그를 좇으며, 은재는 싱그레 웃었다.

“지혁 씨 너무 잡는 거 아냐? 안 본 사이에 기가 더 죽었잖아.”

“원수 같은 인간, 저놈의 기 팍팍 죽어야 해.”

“왜?”

“언니, 남편들은 왜 그리 철딱서니가 없어? 아기가 내일 나올지 모레 나올지 모르는 판국에, 저러고 싶을까 몰라.”

전경이 투덜거리며 은재의 팔에 팔짱을 꼈다. 연신 제 남편을 노려보는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무슨 사고를 쳤는데?”

“글쎄…….”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정경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구시렁거렸다.

“밤마다 그냥, 쉴 새 없이 그냥, 막막 덤비잖아.”

“음….”

이 말이야말로 은재가 바다 건너에 있는 남자한테 하고픈 말이다.

“자기가 좀비야? 왜 죽었다가 살아나고, 죽었다가 살아나는데?”

새삼 깨달은 사실 하나 더.

그래.

도강윤도 좀비라서 그리 계속 살아났구나.

“밤마다 못 살겠어, 진짜.”

동감이다.

은재는 벌게진 얼굴로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정경을 바라보다, 조용히 물었다.

“좀비는 어떻게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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