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50화 (51/84)

50.

“어떻게.”

“이럴 수가!”

현서가 강윤 모르게 약병에 담긴 액체를 붓는 장면에서 두 분 모두 경악했다.

“도 상무, 괜찮습니까!”

“네, 어머니. 염려 마세요.”

맥없이 쓰러지는 강윤의 모습에 민경애는 파들파들 떨었고, 도형호는 잔뜩 미간을 구긴 채 핸드폰을 집어 반복 재생했다.

“약을 탄 거냐? 마약이야?”

“술입니다. 위스키 정도로 추정합니다.”

“네가 알코올에 취약하다는 점을 악용했구나.”

“네. 조심한다고 했는데…. 친구들 모임이라 방심했습니다.”

“이것뿐이냐?”

도형호가 물었다.

“법적 제지를 해야 할 만한 사안도 있는 게지?”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아버지는 이 이상의 심각한 사안이 있음을 적시했다. 강윤은 설핏 고개를 주억거리고서 입을 뗐다.

“제겐 아니고….”

“그럼?”

“은재에게.”

“뭐?”

“서은재에게 무슨 해코지를 한 거야? 본인이 직접 할 리는 없고, 청부?”

“네. 첫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아버지의 정확한 추론에 강윤은 인정했다.

“이후, 예의 주시하며 실행 준비 중이었고요.”

“현서가 이토록 무서운 아이였다니….”

기함하는 어머니를 강윤은 빤히 직시했다.

“서은재로 통하지 않았다면, 다음 차례는 도 상무였겠구나.”

은재를 미워하는 만큼 기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불안했는데, 그의 예상이 빗나갔다. 복잡미묘한 감정이 얽힌 어머니의 얼굴엔 공포가 섞여 있었다.

“저는 이 건을 이슈화할 생각은 없습니다. 삼현과 건우의 우회적인 협력이 깨질 경우, 그에 따른 리스크가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현재, 임현서 또한 반성하고 있고요.”

“반성만 해선 될 일이 아니다.”

“그건 아버지께서 판단하십시오.”

“회장님, 건우건설 임 회장님을 만나세요! 간과할 사안이 아닙니다. 감히 어떻게 우리 도 상무한테!”

오롯이 아들에게 맹목적인 어머니 민경애는 진저리쳤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손짓하며, 도형호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내게 맡겨라.”

그러고서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했다. 몇 번의 신호 후 상대방과 전화가 연결되었다.

“네, 임 회장님. 삼현의 도형호입니다.”

***

“박재민.”

재민은 카페 야외 테이블에 있었다. 바람결 따라 흔들리는 가로수의 나뭇잎을 멀거니 응시하는 그에게 강윤은 직진했다.

“왔어? 커피 마실래?”

“됐어. 현서는?”

강윤은 의자에 앉으며 목을 죈 넥타이를 느슨히 풀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물처럼 꿀떡 삼킨 재민이 대답했다.

“어제 출국했어.”

“일사천리군. 우리 아버지나 임현서 아버지나.”

도형호 회장은 냉철한 사업가답게 건우건설 임 회장과의 담판을 지었고, 이 건으로 단순히 혼담을 무효로 했을 뿐만 아니라, 건우건설의 계열사 중 건우산업개발을 인수하여 본격적인 건설사업에 뛰어들면서 사업적 우위를 쟁취했다.

임 회장 또한 도긴개긴이었다.

외동딸의 일탈이 풍문으로 돌기 전에 뉴욕으로 내쫓았고, 임현서는 저항하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인사했어?”

“응, 어제 공항에 데려다줬지.”

“잘 갔어?”

“사고 치고 쫓겨나는 마당이니 뭐…. 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서은재한테도.”

“그래.”

강윤은 간단히 끄덕이며 친구를 응시했다. 한쪽 신장을 잃은 양 한없이 허전하고 쓸쓸한 표정의 녀석이 딱했다.

“너는 이제 어떡할 거냐?”

“나?”

픽. 재민의 흩뿌리는 미소가 의미심장했다.

“오늘 오전에 사직서 제출했어.”

“뭐?”

“뉴욕에 간다.”

그러고 보니 퇴근하고 왔을 재민의 목엔 넥타이가 없었다.

“이제 현서 곁엔 아무도 없잖아. 나라도 옆에 있어주려고.”

“언제 가는데?”

“내일.”

“사직서 수리된 거야?”

“수리될 리가 없지. 부모님은 극구 반대하셨고 앞으로도 반대하시겠지만, 종국엔 허락하실 수밖에 없으실 거야.”

“배짱이군.”

“현서 혼자 있잖아. 그 철딱서니가 더한 사고를 칠 것 같아서 불안해. 망가지게 둘 순 없어.”

“언제 오냐?”

“아무런 계획 없어.”

“한편으론 부럽군.”

강윤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후계자로서 커오다가 절차대로 임원직에 오른 녀석의 표정은 한결 홀가분했다.

“난 내일 상생 프로젝트 첫날이라 목포로 떠나는데… 배웅도 못 하겠다.”

“놀랍네? 내가 도강윤의 배웅을 받을 수 있었다고?”

강윤의 빈말에 재민이 기겁할 정도로 감격했다. 강윤은 태연히 턱짓했다.

“있을 리가.”

“그럼 그렇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민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너 목포 가는지는 알았어.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한 거야.”

“왜? 영원히 안 돌아오려고?”

“꽤 걸릴 것 같으니까. 암튼, 돌아오면 보자.”

“그때 술 한잔하자.”

강윤이 선뜻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쿡, 술도 못 마시면서. 도강윤이 친절한 빈말도 하네? 은재 씨 덕분인가?”

“아마도?”

“은재 씨하고 좋은 소식 있으면 연락해라.”

“알았다.”

재민은 결국 사랑을 택했다.

자신의 감정을 이용했던 여자에게서 등 돌리지 못하고, 자신의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친구에게 강윤은 무의미한 조언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친구는 덤덤하게 헤어졌다.

***

[어디야?]

“병원.”

VIP 병동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동시에 강윤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은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젠 익숙한 간호사들에게 고갯짓했다.

[오전에 다녀왔잖아?]

“아무래도 할아버지 며칠 동안 못 뵙는 게 신경 쓰여서. 오늘만큼은 저녁 식사 같이 하려고……. 암튼, 이따 봐.”

통화를 끊는데, 간호사실의 간호사가 빠끔히 허리를 들며 말했다.

“회장님, 치료 가셨어요.”

“아, 네.”

또 그 치료다.

병세가 심각한 모양이다.

그러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치의 교수님께 치료를 받는 거지.

‘속상해.’

은재는 걱정이 치솟았다.

상생 프로젝트로 인해 적어도 3일은 병원에 들르지 못할 텐데, 그사이 불상사라도 발생하면….

“흠.”

은재는 도성만 회장이 치료받는 동안이라도 자신이 곁에 있기 위해 교수실로 갔다.

조심스레 노크하고 교수실 문을 여는 찰나.

“교수님….”

은재는 정지했다.

원 교수와 함께 중앙 소파 자리에 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쪽쪽 빨며 바둑 두는 데 집중하던 도성만 회장이 무념하게 고개를 돌렸다.

“손님이 오신 게야?”

툭.

순간, 그가 들고 있던 흰 돌이 무기력하게 낙하하며, 바둑판의 집이 쩍쩍 갈라졌다.

“은재야.”

할아버지와 손주의 계략은 이렇게 허접스럽게 들켰다.

***

“하.”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은재의 입에서 공허한 날숨이 새었다. 지은 죄가 많은 어르신은 그런 은재의 눈치 보기 바빴다.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네. 신뢰는 개나 줘버릴 세상이야.”

은재는 허탈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은재야…….”

“어떻게 할아버지가 절 속이세요? 제가 할아버지를 얼마나 믿었는데요?”

어쩐지 낌새가 석연치 않았다.

중환자라기엔 초반 빼곤 혈색이 너무 좋으셨고, 병실 자체도 안락을 위한 분위기가 강렬했기에.

“도강윤하고 작정하고 속이신 거예요?”

은재는 이제야 지각했다.

“위중하신 거야?”

“응. 널 찾으셔.”

섬에서 도강윤과 만났을 당시 그의 모호한 언사를 제멋대로 해석했음을.

“아니면, 도강윤 작전이었던 거죠? 절 데려오려는 수작으로.”

“내 작전이고, 내가 제안했어.”

“감싸주지 마세요.”

“정말이야.”

도성만 회장이 이실직고했다. 그리고 은재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강윤이 녀석이 제 입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네가 떠나고 나서 많이 힘들어했다. 세간에선 내가 뇌수술한 후 위중하니까 그렇다고들 했지만, 녀석은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했던 게지. 은재 네가 반 이상을 차지했을 거다.”

“가.”

그랬나?

한국을 떠날 때 기껏 공항에 와서 냉랭한 인사만 했던 남자면서.

“그래도 제 속내를 꿋꿋이 감췄었어. 녀석이 어떠한 감정인지 나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세월을 축냈지.”

“…….”

“이번에 알았다. 내가 다시 쓰러졌을 때, 강윤이 녀석이 많이 놀란 모양이더라. 엄격한 제 아버지도 늘 묵묵하게 버티던 놈이었는데, 그동안 견디기 버거웠는지 한순간에 무너지더라.”

“네?”

할아버지의 말에 은재는 기함했다.

도강윤이 무너지다니…….

견고한 벽체처럼 꼿꼿하던 남자의 진실에 벙해진 채 아랫입술을 말아 넣었다.

“내가 죽는 줄 알고 내 손을 부여잡고 힘겹게 말하더라. 실은 그때 난 깨긴 했었어. 근데 잠든 척하며 들을 수밖에 없었지.”

할아버지가 손자의 삶이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이 그렇게 주절주절 속내를 털어놓는 일은 처음이었거든.”

그러곤 나긋한 안광을 돌렸다.

“은재도 없는데 할아버지마저 제 곁을 떠나면 어떡하냐고……. 은재는 잡고 싶어도 잡히지 않는다며, 그대로 떠나보낸 걸, 솔직해지지 못한 자신을 절절히 후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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