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49화 (50/84)

49.

열 번째의 집요한 전화가 끊길 줄 몰랐다. 번아웃 증후군으로 칩거 중이던 재민은 하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박재민, 너 왜 두문불출하냐?]

나무라는 어투였지만, 채종훈의 목소리엔 걱정 어린 기색이 역력했다.

[회사도 며칠 동안 출근 안 했다며?]

“그냥.”

정 많은 종훈을 타박할 일이 아니므로 재민은 무덤덤하게 응수했다.

소파 등받이에 목이 젖혀지도록 무기력하게 기대고서 초점 없는 눈초리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디 아프냐?]

“아프긴. 쉬고 싶어서.”

강윤과 클래식 바에서 만난 후 주체할 수 없이 심신이 지쳐 버린 재민이었다.

원인은 알았다.

자신의 미련함을 각성하며 현서에 대한 감정을 접기로 해서였다.

[재민아.]

“응.”

[네가 임현서를 좀 컨트롤해야겠던데?]

쓱.

자동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렸고,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우습게도, 현서의 이름에 몸이 즉각 반응한 것이다.

“무슨 말이야?”

[성찬이가 청첩장 돌린 날에 말이야. 강윤이 녀석이 갑자기 가버렸거든. 다른 녀석들이 서은재를 봤다기에 당시에는 둘이 있으려고 갔나 보다 했는데….]

“응.”

[아까 강윤이 스카이라운지 CCTV 설치 여부를 물어보더라고. 왠지 찜찜해서 내가 여태 그걸 확인했거든.]

“그런데?”

선득한 한기가 목덜미를 핥았다. 재민은 긴장한 채 목울대를 꿀떡거렸다.

[임현서 이 앙큼한 게, 강윤이 무알코올 칵테일에다 뭘 넣었더라고. 술인 거 같았어.]

“뭐?”

벌떡, 재민은 일어났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해서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너도 알잖아. 강윤이 술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더는 말하지 마.”

[그래. 뻔하지? 암튼 네가 임현서 절친이잖냐. 네가 걜 좀 통제해야겠어. 걔 집착 때문에 조만간 사고 나겠더라.]

“알았다.”

통화를 끝낸 재민은 우두커니 서서 애먼 마룻바닥을 노려봤다.

“하, 임현서.”

심장을 짓누르는 통증으로 숨소리도 묵직했다.

그때.

징― 진동과 함께 뜻밖의 인물이 발신자로 떴다. 스카이라운지 사건의 연장선인 듯해서 재민은 긴장 상태로 통화를 시작했다.

“어, 강윤아.”

[박재민. 어디냐?]

“집이야.”

[그럼, 내 집에 임현서 있어. 네가 데려가라.]

“뭐? 현서가 거긴 왜?”

[자초지종은 와서 듣고.]

강윤의 말 끝나기 무섭게 재민은 튀어 나갔다.

재민이 차를 몰아 쏜살같이 도강윤의 펜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현서는 서은재의 무릎을 베고서 깊게 잠들어 있었다.

“이게…….”

그것도 땟국물이 흐르는 듯한 얼굴인 채로.

“울다가 진이 빠져서 잠들었어요.”

“왜….”

재민은 난감한 미소로 답하는 은재에서 강윤으로 눈길을 돌렸다.

“강윤아, 설명해 줘.”

“나중에.”

“숨기지 말고 낱낱이.”

단호한 태도에 강윤이 서은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그를 서재로 이끌었다. 그리고 긴말은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짧고 명확하게 말했다.

“현서가 은재에게 해코지했고, 내가 증거를 잡았고, 한바탕 사죄했고, 용서하며 현재 이 상황.”

“하.”

재민은 그 안의 무서운 진실을 해득했다.

우려했던 일이 발생한 거다.

“은재 씨는 괜찮아?”

“직접적인 가해를 당하진 않았어. 그전에 막았거든.”

“고맙다.”

“나는 상관없고. 은재가 현서를 용서했어.”

“은재 씨한테도 고맙다고 말할게. 현서는 데려가고.”

“그래.”

거실로 나온 재민은 은재에게 인사하고, 기진맥진한 현서를 안아 들었다.

혼자선 버거울 친구를 위해 강윤은 군소리 없이 지하주차장까지 보조했다.

“강윤아.”

현서를 뒷좌석에 눕힌 후 재민은 씁쓸하게 입을 뗐다.

“종훈이한테 스카이라운지에서의 일 들었어. 내게 현서를 통제하라고 부탁하더라고.”

“채종훈이 CCTV를 봤군.”

“미안하다. 날 봐서 용서해 줘.”

“네가 사과할 일 아니야.”

강윤은 담담했지만, 재민의 시름은 깊었다. 헤아릴 수 없이 심란했다.

“현서가 발표회 때에 충격이 심했거든. 자신이 너와 순조롭게 결혼할 거라 장담했던 모양이야. 거의 병적인 집착이었어.”

“본인이 인정하더라.”

“그나마 다행이네.”

“너야말로 어떻게 할 거냐?”

“난 똑같아.”

재민은 깨달았다.

흐트러진 현서의 모습에 애잔하고, 가련한 자신은 그녀에 대한 애정을 접을 수 없음을.

다시금 절실히.

“내가 책임지고, 다시는 문제 일으키지 않도록 할게.”

“그래, 반드시 책임져라.”

“들어가.”

“응. 조심해서 가.”

가벼이 머리를 주억거린 강윤이 차에서 물러났고, 재민은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그러고서 백미러로 뒤돌아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강윤을 주시했다.

서은재가 돌아오고, 그녀와 함께하는 도강윤은 확연히 다르다.

‘도강윤도 사랑하면 어쩔 수 없구나.’

평소대로라면, 현서는 냉혈한 도강윤을 건든 몫을 참혹하게 받았을 것이다.

서은재 덕분에 면책을 받았겠지.

강윤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재민은 뒷좌석의 현서를 룸미러로 쳐다봤다.

“후, 현서야.”

미어지는 가슴을 어쩌지 못한 채 탄식을 뱉으며, 핸들에 이마를 기댔다.

“널 어쩌면 좋을까.”

***

“서은재가 마더 테레사였어.”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강윤은 대놓고 농담처럼 칭찬했다. 자신의 기준보다 은재는 훨씬 너그러운 성품이었다. 그래서 딸자식 대견해하는 아빠처럼 뿌듯했다.

“얼마나 살벌하게 을러댄 거야?”

하지만 은재의 심기는 불편했다.

그사이 현서에 대한 측은지심이 발동했는지, 도리어 강윤의 심문 과정에 의혹을 품었다.

“임현서가 나한테 무릎까지 꿇는 걸 보면, 엄청나게 혼쭐난 모양이던데, 설마 죽이겠다, 이런 식으로 잔인무도하게 공갈했어?”

“지성인인데, 설마.”

그보다 더했지만, 강윤은 뻔뻔하게 부정했다.

“혼내긴 했어?”

“쪼끔?”

“내게 어떤 나쁜 짓을 저지르려고 했는데?”

“저녁은 먹었어?”

강윤은 그녀의 허리를 감아서 제 복부로 당기며 다정히 화제를 돌렸다.

“왜 대답을 회피해?”

“배고파서.”

까다로운 여자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숙이며, 강윤은 교태 떨 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눈짓에 움찔했으면서도 제 반응이 싫은지 은재가 새침하게 턱을 올렸다.

귀여워.

“저녁 안 먹었어?”

“서은재는 먹었어?”

“아니, 도강윤과 먹으려고 안 먹었지.”

“바른 자세군.”

흡족해하는 강윤을 또렷이 올려다본 은재가 돌연 양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요염한 유혹처럼 목소리를 내리깔며 읊조렸다.

“근데, 밥보다 더 허기진 게 있어.”

“나?”

강윤은 설레발쳤다.

능글맞은 실룩임에도 은재는 꼿꼿했다. 그저 불만 어린 눈초리를 던졌다.

“장난치지 말고. 임현서가 내게 하려던 짓이나 불어.”

“하여간.”

궁금증을 못 참는 여자다.

“나도 명확히 알아야 항시 조심하지. 전후방 좌우 주시 등등?”

“그건 길을 가나 차를 타나 매사 조심해야 할 부분이고. 임현서에 관해선 이미 대비했으니, 그것까진 신경 쓰지 마. 피곤해.”

“왜 얼렁뚱땅 무마해? 친구로서의 의리야? 아님 임현서에 대한 동정이야?”

“서은재에 대한 배려야.”

“어떤 부분에서?”

“범죄였으니까.”

네가 두려울 테니까.

공포에 떠는 널 두고 볼 수 없을 테니까.

“그 정도였어? 대략, 범죄 스릴러 영화 한 편 찍을 정도?”

“으흠.”

납치, 살인 등의 가학적 범죄를 연상하는 기미가 역력해서 강윤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선 엄지와 검지로 묘사했다.

“19세 관람 불가 아니고, 12세 관람 정도.”

“아하, 살리긴 했구나.”

똑똑한 여자.

“우리야말로 19금을 찍어볼까?”

강윤은 픽, 입술을 늘리며 고개를 숙였다.

사랑스러운 여자의 이마에다 입맞춤하자, 은재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말아 올리며, 그의 가슴팍을 가차 없이 밀었다.

“도강윤 맞아? 시도 때도 없이.”

강윤은 미련 없이 제게 벗어나는 은재의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르며 짐짓 볼멘소리를 냈다.

“남잔 다 이래.”

“짐승이야.”

“지극히 정상인 짐승이기도 하고.”

도도한 여자는 성의 없이 으쓱만 했다.

콧방귀도 뀌지 않는 그녀의 뒷등에 레이더를 꽂은 채 그사이 또 으르렁거리는 짐승 놈이었다.

***

“제가 두 분을 모신 까닭은…….”

도형호와 민경애는 아들 강윤의 초대로 한정식집의 귀빈실에 나란히 앉았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냉정한 아들이라 뜻밖의 일이었지만, 두 사람은 흔쾌히 수락했다. 겸사겸사 결혼 얘기를 이어갈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제 부모님이시니 필히 아셔야 할 실상이 있어서입니다.”

하지만 강윤의 목적은 달랐다.

건우건설과의 혼담 이야기는 지속 중이라는 아버지 도형호의 압박에도 묵묵하게 듣기만 하다가, 그는 식사를 끝내고 종업원이 다과를 내온 후에야 본론을 꺼냈다.

“제가 임현서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기도 합니다.”

테이블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오전에 채종훈으로부터 전송받은 동영상을 실행했다.

신화호텔 스카이라운지의 귀빈석에서의 일이 찍힌 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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