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내 분노를 자극하지 마. 널 갈기갈기 찢고 싶은 걸 어렵게 참고 있으니까.”
강윤은 울대에 힘줬다.
성난 그르렁거림에 현서가 시뻘게진 눈으로 굵직한 눈물을 쏟아냈다.
“쉬, 조용히 이어서 봐야겠지?”
검지를 음산하게 제 입술에 대고, 강윤이 소름 끼치도록 나직하게 읊조렸다.
질끈.
현서는 그의 명령대로 우는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입술의 표면이 허예지도록 입술을 바락 깨물고서 이어지는 영상을 보았다.
[아닙니다. 원하시는 대로 무조건 해드리겠습니다.]
[서은재가 의성대 병원에 매일 출근하듯이 들러요. 이때를 노리세요. 자동차나 오토바이로 밀어버리는 방법이 좋겠어요. 이왕이면 하체 쪽으로.]
이왕이면.
강윤의 어금니가 바드득 갈렸다.
흥분하지 않으려 심호흡한 후, 그는 현서의 사악한 입이 은재의 이름과 요구 사항을 명료히 뱉은 다음에서야 영상을 정지했다. 그러곤 신랄하게 눈썹을 들썩였다.
“조목조목, 치밀해. 응?”
“도강윤. 강윤아…….”
“이래서 그날 병원에 왔었던 거군. 서은재가 어떻게 다쳤는지 보고 싶어서.”
“아니야, 아니야. 내가 해명할게.”
현서가 울먹이면서 제 손바닥을 비비며 사정했다. 금세 눈물범벅이 된 현서를 마주하는 강윤의 입술 자락이 비릿하게 휘었다.
“해명할 게 있나? 명백한 범죄 행위잖아?”
“강윤아….”
“일을 벌였으면 그에 따른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야. 그런 각오도 없이 일을 저질렀나?”
“…생각 없이, 정말 충동적으로 그런 거야. 서은재만 없어지면, 너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널 너무 사랑해서…….”
“이 순간, 내가 널 어떻게 하고 싶을까? 내 심장은 널 내 손으로 처단하라고 종용하는데, 그따위 말을 변명이랍시고 하는 거야?”
“용서해 줘. 제발.”
“하.”
제 안에서 꿈틀대는 살의를 누르느라 강윤은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은재를 위해서라도 이성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네게 선택권을 주지.”
강윤은 탁한 호흡으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고발이 낫겠어? 공개가 낫겠어? 어느 쪽이든 사회적 매장은 예정된 절차니, 별반 다르지 않을 테지만.”
“강윤아! 정말 잘못했어. 제발 용서해 줘!”
“그 사죄에 진정성이 있기나 해?”
현서가 책상에서 빠져나와 카펫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마주 앉아 그녀를 텅 빈 눈초리로 들여다봤다.
“용서를 구할 대상자도 틀렸고.”
“서은재한테 사죄할게. 내가 서은재한테 무릎 꿇을게!”
“그러고 나서 뒤에서 딴짓하려고? 이렇게?”
동영상이 든 핸드폰을 그녀의 면전에다 살랑거리자, 창백하다 못해 새하얗게 질린 현서가 오열하듯 흐느꼈다.
“다시는 안 그럴 거야. 진짜야. 제발… 잘못했어…… 끅끅.”
강윤의 냉소에 현서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목멘 울음소리만 냈다. 강윤은 꼼짝하지 않은 채 서늘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징―
냉혹한 침묵을 강윤의 핸드폰 진동이 깨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강윤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일하고 있어?]
“응. 어디야?”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갑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한없이 다정한 음색에 현서의 고개가 파르르 몸서리쳤다.
[병원 버스정류장 가는 길.]
“택시 타라니까.”
[별걸. 내가 알아서 합니다.]
“픽. 그래.”
[근데 도강윤. 여태껏 몰랐는데, 내가 공주병인가 봐.]
“왜?”
[누가 자꾸 날 쳐다보는 기분이 느껴져. 언뜻 쫓아오는 기분도 들고. 막상 확인하면 아무도 없는데 말이지.]
공주병 아니고, 경호원입니다.
“위험한 기운이면 즉각 전화해.”
[그런 건 없어.]
“우리 집으로 갈 거지?”
[…으흠. 가고는 있어.]
부러 ‘우리 집’이라고 강조하자, 은재는 부담스러운지 모호하게 웅얼거렸다.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알았어, 이따 봐.”
강윤은 어렵사리 웃음을 삼키며 통화를 종료했다.
얼굴이 토마토처럼 벌게진 현서는 입술을 질끈 맞물고서 흐느끼고 있었다.
“서은재에게 성심성의껏 용서를 빌 거야? 네가 한 잘못 전부.”
“끅….”
현서의 고개가 힘겹게 주억거렸다.
“일어나.”
강윤은 차갑게 명령했다.
경련하듯 부들거리며 현서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겁에 질린 채 눈물도 차마 닦지 못했다.
“임현서, 명심해 둬.”
“…….”
“내가 네게 일말의 아량을 베푸는 건, 오롯이 내 친구 박재민 때문이야.”
단호하게 덧붙인 강윤은 발길을 틀었다.
대표실을 나서자, 비서실에 대기하던 비서가 놀란 나머지 눈알을 굴렸다.
“대표님…….”
“…오늘 남은 일정 모두 취소해요.”
현서는 단두대로 향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간신히 비서에게 말한 후, 무기력하게 강윤의 뒤를 따랐다.
***
30분 후.
도강윤이 펜트하우스로 대동한 임현서의 등장에 은재는 어리둥절했다.
“대체…….”
심지어 마스카라며 틴트며 화장이 얼룩덜룩하게 번진 현서의 꾀죄죄한 얼굴은 극히 난감했다. 곱게 자란 공주님한텐 있을 수 없는 비루함이었으니.
“이 상황은 뭐지요?”
“서은재….”
우물쭈물 안으로 들어선 현서가 맞잡은 양손을 꼬물거렸다. 그러더니 별안간 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 줘. 내가 잘못했어.”
밑도 끝도 없이 뭘?
“내가 널 시기했어. 강윤일 뺏고 싶어서, 강윤이와 결혼하고 싶어서 네게 거짓말했어.”
오만방자한 임현서가 인제 와서 그깟 일로 무릎을 꿇어?
어림짐작조차 안 되는 상황이라 은재는 뒤편의 강윤을 쳐다봤다.
도강윤은 마치 사신 같았다.
자칫 현서가 말실수라도 했다간, 눈엔 보이지 않는 장검으로 목을 단칼에 베어버릴 듯한 아우라가 풍겼다.
‘왜 이리 살벌해?’
은재야말로 그 기세에 눌려 긴장했다.
“같이 살았던 적도 없었고, 네게 보여줬던 사진도 내가 조작한 거야. 네가 떠나서, 너하고 도강윤과의 결혼이 깨지길 바랐어.”
제 등 뒤의 살의를 감지했는지 현서는 끊임없이 바들거렸다. 오히려 애처로울 정도로 심하게.
“네가 다시 돌아오고, 도강윤의 연인이라고 공식 석상에서 떠벌리니까 미칠 것 같았어. 그래서 널 다치게 하고 싶었어.”
다치게?
‘뭔 짓을 저지를 작정이었구나?’
은재의 직감력이 발휘했다.
사달이 나기 전에 도강윤이 알아챈 것이고.
‘괜찮아, 내가 네 곁에 있어.’
그녀의 동요를 인지한 강윤이 눈빛으로 안심시켰다.
덕분에 은재는 일렁이는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사뭇 차분하게 현서를 내려다봤다.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서 무마하려고 내게 사과하는 거예요?”
“아니야,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어.”
분노가 치솟거나 반대로 무섭거나 하지 않았다. 도리어 간교한 기운을 잃은 임현서가 측은했다.
“내가 돌았었어.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정말 미안해. 잘못했어.”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흑흑.”
“일어나세요.”
은재는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고 일으켰다. 현서가 울음이 터진 입을 손등으로 막고서 비척비척 따라와 소파에 앉았다.
“기다려요. 물 좀 가져올게요.”
“내가 하지.”
주방으로 가려는 은재를 저지한 강윤이 나서서 움직였다.
그렇게 건너온 물을 마신 현서는 한숨 돌리며 울음을 삼켰다.
은재는 티슈를 뽑아 얼룩덜룩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았다. 그러자 현서가 티슈를 가져가 아예 벅벅 지웠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그러고서 눈도 들지 못한 채 너덜너덜한 티슈를 꼬무락거리며 웅얼거렸다.
“네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도 할 말 없어.”
“왜 그랬어요?”
“강윤이 내게는 마음을 주지 않았으면서 너한테는 그렇게 애정 어린 눈길을 주니까… 질투가 나고 오기가 났어.”
울먹이던 그녀가 또다시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니, 그 이상으로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그녀는 참회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짓을 했는지… 내가 사이코패스인가 봐.”
무서운 짓이라.
굉장히 찜찜한 기운이 뒷골에 엄습했지만, 은재는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
“사이코패스는 반성하지 않는대요.”
“용서해 주는 거야?”
짐짓 평온한 대답에 현서가 벌건 눈동자를 들었다.
“이러고서 나중에 뒤통수치는 거 아닌가?”
전(前)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하였던가.
은재나 강윤이나 생각하는 바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현서는 거듭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그럴 일 없어.”
“믿을게요.”
“흑.”
은재의 눈빛에 서린 포용을 읽은 현서는 다시금 훌쩍였다. 끝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격한 설움을 토했다.
‘저 소시오패스 같은 인간이 대체 어느 정도로 윽박지른 거야. 쯧쯧.’
슬쩍 강윤을 일별한 은재는 내심 혀를 차며, 현서의 들썩이는 등에다 손을 올렸다.
토닥토닥.
다소 영혼 없이 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