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나?”
“나는 안 되겠으니, 서은재가 내게 실망해서 떠나길 바란 거지.”
“그 백치미가 얍삽한 데론 머리가 잘 돌아가네.”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고방식에 혀를 내두르며, 은재는 입맛이 떨어져 맥주를 내려놓았다. 그러고서 소파로 가서 앉았다.
문득, 떠올랐다.
설마…
그날에도….
“도강윤, 궁금한 게 있는데…….”
골몰하던 은재가 맥주를 밀어놓고서 입을 뗐다. 강윤은 한결 차분해진 그녀를 평온히 대하려 노력했다.
“말해.”
“임현서는 도강윤의 연인이 아니었어?”
“단 하루도 그런 적 없어.”
“난 여태 두 사람이 그런 관계인 줄 알았어.”
그의 강경한 대답에 은재의 눈꺼풀이 내리깔렸다. 씁쓸한 기운이 역력했다. 여전히 혼잡한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 듯했다.
“…….”
강윤은 말없이 기다렸다.
칼자루를 쥔 것은 은재이기에, 그녀가 어떤 처분을 내리듯 감내할 계획이었다.
물론, 떠난다는 결정은 제외하고.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말이야.”
이윽고 은재가 정적을 깼다.
“도강윤 귀국 파티를 하던 삼현 프라이빗 하우스에서 2층 객실 침대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을 봤었는데… 그날도 그럼…….”
“뭐?”
뜻밖의 이야기에 강윤은 당혹스러웠다.
스무 살 성인이 된 후로 친구들과의 몇 번의 술자리로 강윤은 술이 약하다는 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파티나 술 냄새가 워낙 질색이라 자주 피했는데, 어쩌다 술을 마시면 매번 잠들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다.
그러다 귀국 파티가 있던 그날, 친구들 성화에 못 이겨 맥주 한 잔을 마셨는데 기절할 듯 잠이 쏟아졌다.
정신력으로 이기며 가까스로 2층 객실로 올라갔고,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제 옆에 현서가 있었다.
그날, 강윤은 알았다.
술이 자신의 완벽한 약점이라는 사실을.
“그곳에 왔었어?”
“응. 우리 결혼 소식을 들었던 날이라 도강윤과 담판 짓고 싶었거든. 거기서 우연히 본 거야.”
“그 모습을 목격했다면, 오해했겠군.”
강윤은 묵직한 날숨을 내쉬었다.
“내 잘못이야.”
“잘잘못을 떠나 난 둘의 관계를 확신했어. 결혼식 전에 만난 임현서가 그 확신을 보탰고.”
“현서와 만났어?”
“언론에 우리 결혼 소식이 떠들썩하니까 날 찾아와서 두 사람 침대 사진을 보여주며, 미국 유학할 때 같이 살았었다고 했었어.”
“같이 살다니… 날 아주 문란한 놈으로 인식했겠어.”
“응. 외관상 그럴 만하고.”
강윤이 자조적으로 조소했다. 은재는 얄궂은 기색으로 그의 치명적인 비주얼과 완벽한 몸매를 훑어 내렸다.
아무리 그가 올곧았더라도, 여자들이 가만히 내버려 뒀겠느냐 말이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어떻게 강행했지?”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어차피 정략결혼은 해야 하잖아. 결과가 빤한데 뭐 하러….”
은재의 음색이 공허했다.
“난 그저 감정 없는 나무토막이 되겠다고 결심했어. 삼현가의 정원수처럼 버티자고.”
애초에 질문도 허용되지 않았던 거다.
어른들이 정한 정략결혼을 깨트릴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채 강윤에 대한 불신은 뿌리를 깊게 내리고 무럭무럭 자라난 것이다.
“하.”
강윤은 미안함과 안쓰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날 많이 미워했겠어.”
이제야 깨달았다.
서은재가 왜 결혼식 전에 자신의 연락을 계속 피했던 건지.
서은재가 왜 결혼식 날, 그리고 첫날밤에 자신을 벌레 보듯 했는지.
왜 우리의 결혼이 시작부터 파탄 난 건지.
***
“도강윤.”
은재는 일어났다.
조용히 그의 곁으로 가서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조아린 강윤을 한쪽 팔로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미안해.”
그리고 사과했다.
“내가 사과할 일이야.”
은재는 지금에서야 자신의 내면에 끈끈하게 묶어뒀던 오해의 매듭을 풀었다.
“나의 침묵이 불필요한 오해를 키웠어.”
“은재야.”
강윤이 책망하지 않았다. 따뜻한 봄날처럼 다정한 눈빛을 주며 말했다.
“이거 하나는 알아둬.”
그는 은재로부터 받는 사과보다 그녀의 마음이 한결 평온해진 것에 안도하는 듯했다.
“내가 키스하고, 자고 싶은 여자는 서은재뿐이라는 거.”
강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직 은재의 눈동자만 들여다보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서은재가 필요해. 너무나 간절히.”
그 말은 은재를 전율하게 했다.
“알겠어?”
“응.”
그녀가 깊게 이해하고 대답하자, 강윤의 팔이 불쑥 올라와 은재의 머리카락 사이로 양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서 입술을 앗아가듯이 겹치고 깊게 키스했다.
그의 열정과 간절함이 여실히 전해지는 키스였다.
“…그렇다 해서…….”
천천히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은재는 짐짓 뽀로통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도강윤을 용서한 건 아니야.”
“응.”
은재의 목소리처럼 대답하는 강윤의 음성이 잔뜩 쉬어 있었다.
“용서해 줘.”
강윤이 입술을 비비듯 붙이고서 다정히 읊조렸다.
“응?”
마치 보채듯 뜨거운 숨결을 입 안에 불어넣으며, 혀끝으로 입술의 표면을 애무하듯이 핥았다.
야들야들한 입술의 감촉과 유혹적인 향이 유인하듯 은재의 입술 주변으로 맴돌았다.
“용서해 줄 거지?”
교태 같은 보채기는 극히 자극적이었고, 더없이 달콤해서 용서는 백 번, 천 번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부러 새침하게 굴었다.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선 안 되는데….”
“얼렁뚱땅 아니고, 정성을 다할게.”
“어느 정도로?”
“최선으로.”
영민한 남자는 이미 은재의 마음이 모조리 풀렸음을 알아챘다. 녹아내릴 정도로 부드럽게 입술을 누르며 짓궂게 아랫입술을 씹어댔다.
“으흠.”
아픈 통증 때문이 아니라, 짜릿한 전율로 은재는 모호한 숨결을 토했다.
신음성 같은 소리에 그가 옅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혀로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동시에 늘씬한 은재의 허리를 단단히 쥐며 깊고 맹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입술을 빨아 당겼다가 다시 혀를 밀어 넣는 기교에 은재는 온전히 정복되었다.
본능적으로 그의 목덜미를 양팔로 감으며 턱을 위로 당기고, 입술을 한껏 벌리며 자신을 옭아매고 빨아내느라 정신없는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용서와 이해가 공존하는 키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렬했다.
서로의 깊은 감정을 내포한 숨결은 뜨거웠고, 애절했다.
“하.”
키스가 점차 격렬해지는 순간, 강윤의 손이 자연스레 은재의 블라우스 단추를 툭툭, 풀었다.
이내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던 은방울꽃처럼 희고 아름다운 그녀가 은은한 조명 빛을 받으며 곱게 빛났다.
“아! 흠….”
강윤은 여느 남자와 달리 담대했다.
제 감정을 감춤 없이 표출하느라, 모든 동작에 주저가 없었다.
때론 재규어처럼 날렵했으며, 때론 수사자처럼 대범했다. 그리고 자주 꽃술을 따는 벌처럼 성실했다.
은재는 재규어 같은 도강윤도, 수사자 같은 도강윤도 좋았지만, 벌 같은 도강윤이 제일 좋았다.
자신이 달콤한 꿀을 가진 꽃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는 그로 인해 꽃잎처럼 붉고 붉은 색채로 물드는 것 같았다.
울긋불긋한 꽃잎이 되어버린 은재는 몽롱한 기분에 젖어 그를 그윽하게 올려다봤다.
“…도강윤.”
은재는 발가락까지 움찔거릴 정도로 전율을 느끼면서, 그의 어깨를 꼬집듯 움켜쥐었다.
“…이러면 안 돼.”
제 마음과 달리 거부의 고갯짓을 하자, 강윤이 미치도록 퇴폐적인 눈동자를 들며, 허스키한 숨소리를 흩뿌리듯 나직하게 물었다.
“왜?”
“조용히 얘기만 하기로 했잖아.”
“얘기만, 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
명철한 남자가 정확히 짚더니, 더러 불안한 눈빛으로 눈치를 봤다.
“그만할까?”
말도 안 돼.
눈치 보는 도강윤이라니.
이 남자한테 귀엽다고 말하면 극렬히 화내겠지?
“그만할 수 있어?”
“아니.”
1초도 걸리지 않은 대답.
표정조차 매서울 정도로 단호해서 은재는 샐쭉하게 째려봤다.
“그만두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묻는데?”
“서은재가 우선이니까.”
“우선이 맞긴 해?”
“음, 최우선.”
그리고 은재의 뒷머리를 한 손으로 그러쥐고서 제게로 내리고서, 도로 시작인 듯 열성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그와 함께 다른 손이 투두둑, 남겨진 블라우스 단추를 잡아 뜯듯이 풀었고, 곧 그의 능숙한 손길 한 번으로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제 역할을 끝냈다.
“아.”
의지할 곳 없는 은재의 양손이 버둥거리다가 그의 머리통을 잡으며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헤집었다.
그러고 보니.
왜 머리가 젖었을까.
“읍, 머리는? 대체 머리는 왜 젖었어?”
불시의 궁금증에 은재는 접착되어 있는 입술을 억지로 뗐다.
“하, 이 여자 정말 애태우네.”
강윤이 불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