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아?”
은재는 몹시 놀랐다.
임현서와 키스를 나누던 남자가 제 뒤를 쫓아오리라곤 짐작하지 못했기에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했다.
“어딜 가는 거야, 혼자.”
강윤의 숨결이 가빴다. 길고 긴 진입로 내리막길을 줄곧 뛰어온 듯했다.
“도강윤…….”
은재는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시야를 희롱했다. 땀으로 인해서 저토록 젖을 리는 만무했다.
질끈.
은재는 심기가 불편했다.
“샤워라도 했어?”
신랄한 비난을 날리며 거칠게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정통으로 비난을 맞은 강윤이 주춤하며 떨어지다가, 사뭇 당혹스러운 기미로 자신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
그 표정에 은재는 더욱 비위가 상했다.
치밀한 도강윤도 급했나 보지?
“두 여자 사이를 오가느라 밤낮으로 빠듯하겠어. 누가 도강윤 아니랄까 봐, 여자도 참 스펙터클하게 만나.”
“아니야.”
“그러시겠지.”
해명이든 발뺌이든 듣고 싶지도 않았다. 은재는 조소하며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강윤이 가도록 두지 않았다.
“아니라고.”
“놔!”
은재는 이 와중에도 도강윤이 자신을 쫓아왔다는 사실에 반가웠던 자신이 한심했고, 뻔뻔한 도강윤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놓으라고! 나쁜 놈아!”
결국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발하듯 악다구니를 쓰며 그의 딴딴한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렸다.
퍽.
퍽.
“은재야.”
무기력한 사람처럼 자신의 몸을 내려치는 주먹을 고스란히 받던 강윤이 은재의 팔을 휙 잡아서 당겼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휘청한 그녀를 자신의 품에다 강경히 담았다.
“내 말 좀 들어.”
“싫어!”
은재는 격렬히 저항했다. 다부진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남자의 팔뚝은 완강했다.
“내가 다 말할게.”
강윤이 은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한 번만 들어줘.”
뜨겁고 간절한 숨결이 은재의 살결에 파고들었다.
그러고선 간절하게 사정했다.
“제발… 은재야.”
격렬하던 은재의 저항이 멈췄다.
도강윤이 사정하고 있다.
무릎만 안 꿇었을 뿐이지, 그의 허스키한 저음은 뺨에 닿는 바람보다 더더욱 절실해서 심장을 내리찍는 창살 같았다.
“하.”
아릿하고 불끈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은재는 아랫입술을 질끈 악물었다.
은재의 행동이 잠잠해지자, 강윤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인 채 설득했다.
“네가 무엇을 봤든, 내가 어떤 행동을 했든 무조건 내 잘못이야.”
“…….”
“내 실수야, 미안해.”
실수라니?
실수에 대한 사과인가?
“매사 조심한다고 했는데, 임현서를 너무 얕잡아봤어. 현서가 내 약점을 이용해서 이런 일을 벌일 줄 예상치 못했어.”
도강윤의 약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머릿속으로 해석하다가 나온 답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약점을 잡혀서, 임현서와 어쩔 수 없이 키스했다고?”
“키스하지 않았어.”
오답인지, 강윤의 잇새에서 갑갑한 한숨이 토해졌다. 하지만 은재는 발끈했다.
“속이지 마!”
임현서와 키스하는 도강윤을 상기하자마자 격한 분노가 치솟았다.
“내가 봤어! 이 나쁜 놈아!”
그의 품에 갇힌 어깨를 흔들었지만, 강윤의 팔뚝이 프레스처럼 강하게 조였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니야.”
강윤의 손바닥이 흥분해서 뜨끈뜨끈한 은재의 뒤통수를 진정하라는 듯 꾹 눌렀다. 은재의 호흡이 조금이나마 규칙적이 되자 부언했다.
“내가 당한 거야.”
“말이 돼?”
“제대로 본 거 맞아? 확실해?”
강윤이 단호히 반격했다.
“봤는데….”
“뭘 봤어?”
쑥, 그의 상반신이 떨어지더니 은재의 눈을 들여다봤다.
성난 얼굴빛이나 흑막처럼 까만 동공엔 터럭만큼의 흔들림이 없었다.
거짓도 없었고, 답답함 이상의 노기도 어렸다.
“내가 키스하는 거, 확실히 봤어?”
“…….”
물음에 확답할 수 없는 혼란으로 은재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때, 호텔 방향에서 달려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였다.
강윤이 기민하게 은재를 갓길로 데려갔고, 그들의 곁을 지나치는 자동차를 멀거니 응시하던 은재는 이성을 차리자고 스스로 채질했다.
“난 모르겠어. 뭘 믿어야 할지.”
“조용한 곳에서 얘기할까?”
“응.”
은재는 말라붙은 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매무시를 다듬었다. 그녀를 응시하던 강윤이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도강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채종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너 인마! 대체 무슨 일이야? 임현서가 해코지라도 했어?]
“임현서는 어딨어?”
[몰라. 도망갔어.]
“그럼, 스위트룸 하나 내어줄 수 있나?”
스위트룸을 왜….
기막혀서 그를 노려보다가, 은재는 현 장소에선 가장 적절한 선택임을 인지했다. 일반 객실을 이용할 도강윤도 아니고 말이다.
[아마 남아 있는 객실은 없을 텐데…. 기다려. 내가 어떻게서든 마련해 줄게.]
“그래, 고마워.”
채종훈과 통화하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스카이라운지에서 목격했던 장면과 그의 해명을 곱씹던 은재는 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우쳤다.
‘아.’
임현서가 키스하는 동안 도강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
신화호텔의 권력자인 데다 도강윤의 추종자답게 채종훈은 강윤의 요청을 전투적으로 응낙했다.
그사이 룸메이드가 다녀간 듯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스위트룸에서 은은하고 향긋한 향기가 감돌았고, 황당하게도 와인 세트와 함께 새하얀 시트엔 붉은 장미꽃잎이 깔려 있었다.
채종훈이 어떤 상상을 했을지 빤했다.
‘하.’
은재는 이맛살을 구기며 침실 방향은 철저히 외면하며, 짐짓 사무적인 투를 가장했다.
“조용하네.”
실제론 몹시 신경 쓰였다.
그와 호텔 객실에 들어선 것은 처음인 데다, 어젯밤에도 그와 격렬히 뒹굴었지 않은가.
하물며 스위트룸의 완벽한 세팅이라니.
‘정신 차리자.’
은재는 부러 눈동자를 또랑또랑 부릅뜨며 소파로 곧장 이동했다. 그러면서 제 맞은편에 앉은 강윤의 핸드폰을 턱짓했다.
“나한테 오라는 메시지는 왜 보냈어?”
“봐.”
강윤이 스스럼없이 핸드폰을 건넸다.
지문인식으로 오픈한 핸드폰엔 메시지가 없었다. 은재는 제 핸드폰의 메시지를 내보이며 그가 발송한 메시지를 손톱으로 톡톡 쳤다.
“그사이 삭제했어?”
“내가 했을까?”
“하아.”
강윤의 또렷한 반문에 헛숨이 나왔다.
“정말 기막혀서 맨정신엔 못 있겠다. 술이 필요하겠어.”
은재는 와인은 무시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다. 벌컥벌컥, 순식간에 뚝딱 반을 비우고, 그를 노려보며 따졌다.
“도강윤의 약점이 대체 뭐야?”
“내가…….”
도강윤이 망설였다.
얼마나 긴요하고 심각한 사안이기에 매사 자신만만한 남자가 건조한 아랫입술도 혀끝으로 살짝 훑으며 주저할까.
그마저도 농염하게 보이니.
‘이 와중에 저 남자가 섹시하니?’
은재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맥주를 마저 비우고,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또 꺼냈다.
그때, 강윤이 참담한 목소리로 실토했다.
“술.”
“뭐?”
“내가 술을 못 마셔.”
딱! 마침 캔맥주의 뚜껑을 딴 은재는 정지했다. 자신의 술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거?”
“응, 그게 나의 약점이야.”
은재는 어안이 벙벙하여 제 캔맥주와 눈 마주쳤다.
도강윤은 나름 진지하게 고백했지만, 약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허술하고…
뭐랄까?
굉장히 시시한…….
“사람이 술을 못 마실 수도 있지, 약점이기까지 해?”
“내 경우는 그렇더라고.”
“어떤 경우인데?”
“나는 적당히 못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체질상 술이 몸에서 받질 않아. 맥주 한두 모금까진 가능하지만, 한 잔 정도 마시면 기절하듯이 잠들어.”
그 정도로?
“아, 그래서….”
은재는 그제야 자신과 맥주를 마신 강윤이 잠들었던 연유를 알았다.
맥주를 사약 보듯 한 도강윤도.
“맞아. 너와 마신 술도 내겐 극약 같은 거였지.”
“근데 왜 마셨어?”
“서은재니까.”
픽, 강윤이 옅게 웃었다.
그의 매력적인 미소와 언사는 서운함과 부아를 일시에 사그라들게 했는데, 은재는 한심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맥주로 속내를 감췄다.
“나는 그동안 최대한 조심해 왔어.”
강윤이 차근차근 밝혔다.
“행여라도 내게 접근하여 이 약점을 악용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무기력하게 당할 테니까, 술을 못 마시는 것 또한 철저히 숨겼지.”
삼현그룹의 3대 독자 3세인 데다, 삼현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이니 위험은 항상 도사렸을 것이다.
어렸을 때도 유괴당할 뻔했던 적이 있다고 들었다. 하물며 술 한 잔에 인사불성이 되면, 그의 말마따나 강력한 약점일 수 있었다.
“곤란했겠네….”
대한민국에서 사회 생활하는 덴 술은 필수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재벌 3세에다 임원이니, 참석할 파티며 술자리며 숱했을 것이 빤하다.
“채종훈과 박재민만 알아. 녀석들이 많이 도와줬어.”
“도강윤의 흑기사들이구나?”
“응.”
은재의 농담 같은 대답에 강윤의 입술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은재는 그의 표정에서 무거움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듯해서 안도했다.
“근데, 임현서도 알았던 거네?”
“그런 것 같아.”
강윤은 확신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다가 눈치챘던 모양이야. 오늘 그 자리에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음료에 술을 탔어. 그리고 잠든 내게 수작 부린 거지.”
“나를 왜 불렀을까?”
“목표는 서은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