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채종훈! 와서 노래해!”
“야, 피로연이냐? 노래를 내가 왜 해!”
“새끼야, 축가 연습하는 셈치고 하나 해! 비싸게 굴지 말고!”
왁자지껄한 홀에서 친구들이 아우성을 쳤다. 짐짓 투덜거리면서도 채종훈은 거들먹거리며 홀의 무대에 올랐다.
“도강윤도 와라!”
“됐다.”
무대에 오른 채종훈이 아니나 다를까 강윤부터 찾았다. 강윤은 넌더리 치며 외면했지만, 악착같은 친구 둘이 그를 잡아서 억지로 끌고 갔다.
‘지금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현서의 눈에 조악한 기운이 서렸다.
현서는 남모르게 백에서 꺼낸 작은 병에 담긴 액체를 강윤의 무알코올 칵테일과 섞었다.
액체의 정체는 독주나 다름없이 독한 위스키였다.
맥주 한 잔으로도 기절할 듯 잠드는 도강윤이기에 이 술 한 모금이면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즉각 효과가 올 것이다.
얼음 막대로 휘휘 젖을 때, 도강윤이 친구들 틈에서 빠져나와 되돌아왔다.
“건배해.”
현서는 그에게 제 술잔을 들어 건배를 유도했다. 강윤이 차가운 눈빛으로 힐끔 일별하고서 무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숫제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다.
‘쳇.’
현서는 입술을 잘근거리면서도 강윤의 칵테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음주·가무에 능통한 채종훈은 한 번 무대에 오르자 내려올 줄 몰랐다.
‘낭패네.’
속절없이 시간은 흘렀고, 현서는 결국 단념했다. 괜스레 입맛을 다시며 맥주를 마시는데, 강윤의 팔이 움직였다.
‘어?’
그리고 여유롭게 칵테일 잔을 들었다.
‘마셔.’
느긋하게 칵테일에 입을 댄 그가 꿀떡, 목으로 넘겼다. 일순 독한 알코올을 느낀 강윤이 미간을 좁히며 현서를 쳐다봤다.
“너…….”
“왜?”
위협적인 눈빛이 두려웠지만, 현서는 애써 천연덕스레 미소를 걸며 모르쇠했다.
일순 강윤이 무기력하게 소파 등받이에 기대듯 쓰러졌다.
‘성공.’
자신의 작전대로 진행되자, 현서는 서둘러 그의 핸드폰을 들어 강윤의 지문을 대어 잠금을 해제했다.
―신화호텔 스카이라운지로 와.
―지금?
―귀빈석으로.
―알았어.
서은재의 답장을 받자마자 메시지를 삭제하는 현서의 입술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
강윤이 현서의 농락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나른함 이상의 독한 기운이 내장을 휘저으며 그를 제압했고, 심신은 나락의 갈퀴에 휘감겼다.
점차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허벅지 밑으로 몸을 웅크리는 현서의 수상한 움직임이었다.
‘무슨 의도이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에 강윤은 사방의 시끄러운 소리와 채종훈의 열창이 아스라이 멀어졌고, 암흑에 잠식되었다.
그리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강윤은 제 입술에 닿는 낯선 촉감을 감지했다.
‘깨어나야 해.’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고,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은재의 입술이 아님을 인식했다.
‘깨어나! 도강윤!’
희뿌연 안개 너머 그의 자아가 냉철하게 호령했다.
번쩍.
강윤은 오롯이 정신력으로 눈꺼풀을 열며 경직된 팔을 움직여 제 몸을 덮은 여자의 팔뚝을 덥석 움켜쥐었다.
“…물러나.”
짐승의 울음처럼 가르랑거리며.
“허, 도강윤. 깼어?”
“당장.”
임현서는 그가 단연코 깨지 못하리라 장담한 모양이었다. 당황한 상태로 머뭇대다가, 여차하면 물어뜯길 기세에 몸을 뗐다.
“도강윤….”
그러고서도 깨어난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
강윤은 헐떡이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큰 손을 휘적거려 테이블의 생수병을 잡아챘다.
“허.”
뻣뻣한 상반신을 어렵사리 일으키고서, 주저하지 않고서 차디찬 생수를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앗, 차가워!”
기겁한 현서가 튀는 물방울을 피하려 점프하듯 저만치 물러났다.
500㎖의 생수병은 온전히 물을 쏟아내고, 검은 머리카락을 흥건히 적신 후에야 텅 비었다.
“후.”
강윤은 빈 병을 던지듯 놓고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털어냈다.
늘 반듯하고 깔끔을 고수하던 그의 머리카락이 정글의 야수처럼 헝클어졌다.
젖어서 뽀얗게 빛나는 피부와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한기가 들 정도로 서느런 눈동자가 올라왔다.
“임현서.”
제게 해를 입힌 자를 향한 살기였다.
“명심해.”
바닥으로 깔리는 저음도 더없이 음산했다.
“또다시 내 몸에 손댔다간, 죽여 버릴 거야.”
차디찬 경고는 장난기가 일절 없었다. 현서의 낯빛이 시퍼렇게 죽었다.
때마침 자리로 돌아오던 채종훈이 흥건한 바닥이며, 흠뻑 젖은 친구의 머리를 포착하며 기절초풍했다.
“도강윤? 너 몰골이 왜 이래?”
“간다.”
강윤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벌떡 일어나 스카이라운지에서 나왔다.
성큼성큼, 복도를 이동하여 엘리베이터에 올라 1층 버튼을 누를 때였다.
“서은재 맞지?”
닫히는 틈새로 야외테라스에서 담배를 태우고 나오던 친구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서은재?
“응. 확실히 서은재던데?”
“강윤이 만나러 온 거 아닌가? 왜 오자마자 가지?”
탁.
거의 맞물리려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강윤의 강한 손이 움켜쥐었다.
“혁아.”
그리고 튀듯이 복도로 나가 친구의 어깨를 잡았다.
“어? 강윤아.”
“서은재를 봤어?”
“응. 조금 전에 왔다가 그냥 가버리더라고.”
“알았다.”
강윤은 서둘렀다.
기민하게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며 핸드폰 기록을 살폈다. 통화나 문자의 기록은 없었다.
은재는 강윤의 일정을 전혀 모를뿐더러, 강윤조차 친구들 모임은 예정에 없었다. 그러므로 서은재가 이곳에 왔다가 바로 갔음의 의미는…….
“아.”
임현서의 계략이다.
그의 칵테일에 독주를 타고 정신을 잃도록 만든 후, 서은재를 이곳에 불러서 두 사람의 키스 장면을 포착하도록 노린 것이다.
“하, 은재야.”
은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오해했을지 절실히 인지한 강윤의 갈비뼈가 저릿했다.
1층 로비로 나오자마자 강윤은 뛰었다.
술 한 모금이라도 음주운전이기에 자신의 차는 버려두고, 은재의 발자취를 유추하며 정문에서 벗어나서 질주하듯 달렸다.
전화도 걸었지만, 어김없이 안내 음성이 응답했다.
‘혹시?’
병원에서처럼 버스정류장으로 갔을까 싶어서 무작정 달렸다.
그때 호텔 셔틀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는 거뭇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서은재!”
“앗.”
불쑥 다가온 그의 존재에 낯선 여자가 화들짝 놀랐다. 죄송하다고 묵례하고, 강윤은 사위를 훑으며 무작정 진입로로 뛰어 내려갔다.
‘어딜 간 거야.’
숲처럼 어두컴컴한 내리막길을 어디에도 은재의 자취는 없었다.
“서은재.”
은재가 펜트하우스로 돌아가지 않았음은 자명했다.
명확히 진실을 밝히지 않는 한 영영 오지 않을 확률도 높다.
“은재야.”
술 한 잔이 약점이 되어버린 자신이 못났고, 그 약점으로 함정에 걸려든 자신이 잘못했다, 고 강윤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무조건 내가 잘못했어.’
간절히 소원할 때였다.
‘제발 돌아와.’
마치 소원을 들어주는 것처럼, 저만치에서 걸어가는 서은재의 모습이 강윤의 망막을 채웠다.
***
스카이라운지에서 도망치다시피 나온 은재는 호텔 셔틀버스도 이용하지 않은 채 정처 없이 떠돌 듯 그저 걸었다.
“하.”
요동치듯 들끓는 속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분노가 치솟는지.
왜 이토록 눈시울이 뜨거운지.
숲처럼 형성된 호텔 진입로는 밤이라 컴컴하고 음산했다. 밤의 초연한 소리조차 공포 영화의 배경음악처럼 으스스하게 은재를 에워쌌다.
“청승이야. 뭐 하러 이렇게…….”
울적한 자신에게 욕하다가 은재는 각성했다.
“아.”
분노보다 더하게 흥분한 까닭이 자신의 내면에 움튼 질투심 때문임을.
“결국, 내가 이렇게 되어버렸네.”
그렇게 꼿꼿하게 굴면 뭐 하나.
“한심해.”
돌이켜보니, 결혼 소식을 들었던 날에 강윤과 현서의 모습에 충격받았던 것, 그런 장면을 목격하고도 도강윤과 결혼을 강행한 것, 그에게 끔찍한 첫날밤을 선사한 것.
그뿐이랴.
얼마 전 병원에서 임현서를 보자마자 도망친 것도. 몇 번의 의문에도 임현서에 관해 묻지 못하는 것도.
도강윤 곁의 여자에 대한 시기.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갖는 도강윤에 대한 미움.
“하, 도강윤.”
그 모두가 질투심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스치는 듯한 인연이었고, 철부지의 한낱 첫사랑에 불과하다고 내내 되뇄었다.
그런데 아닌가 보다.
지금까지도.
한심하게도.
도강윤이라는 남자를 사랑하나 보다.
“정말, 미워.”
은재는 우매한 자신을 한탄하며, 속절없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자신을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트린 남자를 원망했다.
“진짜 나쁜 놈이야, 도강윤.”
그때였다.
불현듯 등 뒤에서 점차 간격을 좁혀오는 굵직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서은재.”
그리고 커다란 손아귀가 불쑥 은재의 가냘픈 팔목을 그러쥐더니, 우악스러울 정도로 세게 당겼다.
못 견디게 미운 도강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