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40화 (41/84)

40.

오후 7시, 삼현화학 국제 심포지엄 행사가 종료되고, 강윤은 각계 인사들과 짧은 대담을 나눈 후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도강윤!”

신화호텔 대표인 채종훈이 득달같이 쫓아왔다.

행사 중 테이블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었음에도 보디랭귀지로 신호를 보내던 녀석이었다.

“그냥 가버리면 어떡하냐?”

“왜?”

“애들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갔어. 행사에 참여 안 한 친구들은 미리 와 있었고.”

“그래?”

“야! 새끼야!”

무심히 고갯짓한 강윤은 1층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종훈이 걸쭉한 욕설을 뱉으며 그의 버튼을 취소하고 스카이라운지를 눌렀다.

“잠시 들렀다가 가라.”

“싫다.”

강윤은 냉정히 일축하고, 스카이라운지 버튼을 취소하고 도로 1층을 눌렀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은재가 기다리는 펜트하우스로 날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라.

“너 친구 모임 계속 불참했잖아. 더구나 오늘은 성찬이 녀석 청첩장도 돌린대!”

“성찬이 결혼해?”

선봤어? 라고 물으려는 찰나.

“상찬이 자그마치 3년을 연애했어. 연애하는 줄은 알았냐? 저번 네 행사 때도 여친 데려와서 인사시켰는데?”

몰랐다.

오롯이 서은재만 생각하고, 서은재만 보느라.

“하여튼 세상 무심한 놈.”

채종훈의 타박에 강윤은 스스로 1층 버튼을 취소하고 스카이라운지 버튼을 눌렀다. 그 동작으로도 종훈이 좋아서 히죽거렸다.

딩동―

스카이라운지에서 열린 엘리베이터 앞에 원하준이 있었다. 삼현고등학교 동창으로 전교 회장이었으며, 강윤과는 친구라기엔 거리가 있었다.

“어? 도강윤.”

하준은 강윤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그의 반응이 의외라 강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눈치채지 못한 채종훈이 먼저 나서서 하준의 어깨에 들러붙었다.

“오! 원하준. 바쁜 의사 선생님께서 웬일로 모임에 나왔냐?”

“성찬이 청첩장 받으러 왔어. 안 오면 내가 환자가 될 판이더라고.”

“그 자식이 심하게 유난이지?”

“난 오늘이 약혼식인 줄.”

“내 말이. 그런데 넌 어디 가려고?”

“청첩장 받았으니 병원에 들어가야지. 다음에 여유 있을 때 보자.”

하준이 하얀색 청첩장을 팔랑거리며 종훈의 팔을 치우고서 강윤의 방향으로 발끝을 옮겼다.

“도강윤, 잠깐 시간 돼? 할 얘기 있는데.”

“해.”

강윤은 덤덤히 수락했다.

“얘기 나눠. 도강윤, 튀기만 해.”

채종훈이 눈치껏 자리를 비켰다. 둘만 남게 되자, 하준이 자못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할아버지 있잖아.”

“응.”

“퇴원이 지연되는 이유 알아? 우리 아버지가 유독 별말씀을 안 하셔서.”

도성만 회장은 강윤과의 사기극을 위해 주치의인 원 교수를 포섭했다. 특별한 증후도 없이 입원 날짜가 길어지니 하준으로선 의문이 드는 게 당연했다.

“왜? 문제 있어?”

강윤은 모르쇠를 일관했다.

“문제라기보단 아버지는 늘 내게 환자들 병세를 공유해 주셨는데, 네 할아버지의 경우는 달라서.”

“특별히 공유할 병세가 없는 거겠지.”

“그래? 뭔가 찝찝한데.”

하준이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더는 파고들지 않았다. 그저 강윤의 눈치를 넌지시 살피며 물었다.

“넌 요즘 어때?”

“뭐가?”

“잘 지내냐고. 안부 인사지.”

“뭐, 잘.”

강윤은 무미건조하게 으쓱했다.

하준은 할아버지 화제도, 안부 인사도 구실에 불과한 인상이 강한데, 본론을 꺼낼 의향도 없는 듯하다.

진짜로 캐고 싶은 게 뭐지?

***

“다른 용건은?”

“어?”

강윤의 예리한 눈초리는 심히 공격적이었다. 하준은 저도 모르게 움찔 긴장했다.

“그게…….”

서은재와 공식 연인을 선포한 기사를 봤던 하준이었다. 그에 관해 묻고 싶은 충동으로 얼떨결에 붙잡았지만, 도저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특히 조금 전 만난 임현서가 강윤과 결혼할 거라고 떠벌렸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속 시원히 말하지?”

“별건 아니고, 언제 한번 술 한잔하자고. 우리 둘이 술 마신 적 없잖아.”

하준은 마음속의 질문은 닫았다.

이용하다시피 서은재와 정략결혼하고, 결국 1년여 만에 버린 도강윤이었다. 그것도 임신 6개월 차에 유산한 아내를.

그런 녀석에게 질문해 봤자 정직하게 사실대로 밝힐 리 만무하니, 굳이 강윤의 의중을 파악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술? 그래.”

“연락할게.”

강윤이 명쾌하게 응수하여, 하준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한껏 지었다. 영혼 없는 미소라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이번엔 네게 안 뺏겨, 도강윤.’

내가 서은재를 구제할 거다.

저 냉혈한 녀석으로부터.

***

거룩한 결혼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성찬은 스카이라운지를 통째로 빌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성대한 파티를 진행 중이었다.

강윤이 도착하자마자 파티에 참석한 친구들이 열광했고, 우르르 몰려왔다.

강윤은 그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홀을 지나쳐 채종훈이 자리 잡은 귀빈석으로 이동했다.

“재민인?”

“안 왔어. 그 녀석 오늘 심포지엄 초청자 명단에도 있던데 참석하지 않았더라고.”

“그래?”

“전화도 안 받아.”

어젯밤 과음한 탓인가?

임현서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은 후유증이 깊어서일 가능성이 컸다.

“도강윤.”

재민에게 연락하려고 핸드폰을 꺼내는 강윤의 곁으로 채종훈이 달라붙었다.

“널 위해 준비했어.”

강윤은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제 앞에 놓인 푸른 색채의 칵테일을 내려다봤다.

“무알코올 칵테일이야. 아주 순해.”

“고맙다.”

목소리를 낮춘 녀석의 배려에 강윤은 픽, 웃었다.

철없이 굴어도 채종훈만큼 강윤을 위하는 이는 없었다.

이래서 ‘우정이 아닌 사랑’이라는 오해를 받지.

“서은재도 오라고 해.”

“여길?”

“공식 연인 선포를 했잖아. 여기 모인 대부분은 두 사람 재결합 환영해.”

“그래?”

“저번 발표회 때도 너도나도 그럴 줄 알았다면서 다들 좋아했어. 아, 그러고 보니 너 그날 갑자기 잠적했지? 네가 주최한 행사면서 대체 어딜 갔었냐?”

“성찬이 온다.”

곤란한 질문인데, 때마침 오늘의 주인공이 다가왔다. 강윤은 제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과 악수를 했다.

“도강윤! 드디어 이 몸이 장가간다. 내 결혼 소식 들었냐?”

“응.”

“내 피앙세는 먼젓번 봤으니까, 인사는 걸러도 되지?”

연신 헤벌쭉거리는 성찬이 저편의 여자를 가리켰다.

기억력이라면 남다른 강윤의 뇌엔 일호도 저장되지 않은 여자였지만, 강윤은 노련히 대처했다.

“그럼.”

“진짜 예쁘지 않냐?”

제 눈엔 하나도 예쁘지 않기에 아무리 대외적인 선수라도 강윤은 도저히 호응할 수 없었다.

단지 의례적인 미소를 장착하고 성찬의 팔뚝을 툭 쳤다.

“축하한다.”

“네 눈엔 안 차지?”

성찬이 정곡을 찔렀다.

“무슨 소리야?”

“솔직히 서은재 삼현고 여신이었잖아. 전학 오자마자 완전히 휩쓸었지. 걜 넘본 남자들이 어디 한둘이냐? 나도 좀 관심 있었는데….”

그랬나?

강윤의 흑막 같은 눈동자가 흡사 흡혈귀처럼 짙어졌다. 성찬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한 아우라였지만, 들뜬 성찬은 모르는 채로 주절거렸다.

“암튼 그런 여신이 네 거인데 오죽하겠어?”

“음.”

“서은재와 재결합 축하한다.”

아첨 같지만 듣기 나쁘지 않았다. 삽시간에 강윤의 공격성이 시들해졌고, 무의식중 어깻죽지도 의기양양 들렸다.

“고맙다.”

“강윤아!”

그때, 화기애애한 두 친구 사이를 불청객이 방해했다.

“언제 왔어?”

임현서가 강윤의 팔에 팔짱을 끼며 교태를 떨었다. 병원에서의 일은 까맣게 잊은 양 구는 그녀를 강윤은 철저히 무시했다.

냉정하게 손을 물리고 착석했다. 샐쭉하게 흘겨보았지만, 현서는 꿋꿋하게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채종훈이 오만상을 쓰며 입 모양으로,

‘다른 자리 가.’

라고 했지만, 현서는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버텼다.

***

띠, 띠.

―신화호텔 스카이라운지로 와.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는데, 은재의 핸드폰으로 강윤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

―귀빈석으로.

누가 도강윤 아니랄까 봐 가타부타 부연도 없다.

“픽.”

병원에서부터 신화호텔에 가고 싶어서 안달하더니, 결국 이 밤에 호텔 스카이라운지로 부르는 남자의 속셈이 빤했다.

새침데기처럼 삐죽거리면서도 은재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예쁜 색의 틴트도 바른 후에 신화호텔로 향했다.

둘이 호텔에서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레었다.

징―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발꿈치가 구름 위를 걷듯 붕붕 뜰 만큼.

‘파티인가?’

스카이라운지로 들어선 은재는 어리둥절했다. 강윤의 친구도 몇몇 보였고, 무대에서 노래를 불러제끼는 채종훈도 포착했다.

‘왜 이런 자릴…….’

은재는 시끄러운 채종훈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 멀리 빙 돌아서 귀빈석으로 다가갔다.

‘도강윤이다.’

소파에 기대듯 앉아 있는 강윤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뒤통수만으로도 강윤인 걸 알 수 있었다.

무의식중 빙그레 웃으며 접근할 때였다.

쓱―

테이블 아래, 그의 허벅지쯤에서 올라온 여자가 강윤의 입술에다가 제 입술을 포갰다.

임현서였다.

‘하.’

은재의 숨이 턱 막혔다.

예전에 목격했던 장면과 겹치며 내장이 뒤틀리고, 메스꺼움이 솟구쳐서 토할 것 같았다.

“흡.”

은재는 욕지기가 올라오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휙 돌아섰다.

뒤도 보지 않고 그대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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