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은재 얘기만 거론하면 나사 빠진 놈처럼 헤죽거리는 호석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순수한 충성심인 줄 알기에 강윤은 용인했다.
“세간의 관심이 엄청 높습니다. 기사도 주말 내내 줄기차게 기재되었고요.”
“그래?”
호석이 건넨 태블릿 화면을 들여다보니 기사의 수가 엄청났다. 어제 확인했던 수의 곱절은 되었다.
“두 분 비주얼이 워낙 월등하시니까, 웬만한 연예인 커플은 명함도 못 내밀지 않습니까?”
“각 언론사에 미도 작가는 초상권에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얼굴이 노출된 기사는 정정하라고 전달해.”
호석의 호들갑에 호응하지 않은 채 강윤은 냉담히 명령했다.
“왜요?”
“텍스트만으로도 충분해.”
강윤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기 때부터 뛰어난 외모로 인해 ‘재벌 3세 귀공자’로 언론 노출이 극심했었다.
파파라치 카메라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을 정도로 세간은 열광했고, 열혈 팬들마저 형성됐었다.
그로 인한 피로도는 익히 알기에 강윤은 은재만큼은 보호하고 싶었다.
결혼생활 중에도 남모르게 경계하며 그녀의 기사를 막았던 강윤이었다.
“하지만 아쉬워요. 이렇게 아름다운 사모님을 자랑하진 못할망정.”
떠벌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
“회장님께서 원치 않으실 거야.”
강윤은 단호히 꼬집었다.
“로맨스 위주의 기사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심기 불편하실 테니, 보태진 말자고.”
어제의 불화로도 아버지의 의지는 충분히 인지했다. 공연한 고집으로 화에 기름 붓는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조치하겠습니다.”
수긍한 호석이 온갖 부서에서 올라온 결제 바인더를 내려놓으며 넌지시 물었다.
“상무님, 어제 박 실장님하고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없었어.”
강윤은 검토 끝낸 서류에 사인하며 응수했다.
무심한 태도에 호석의 미간엔 깊은 골짜기가 형성되었다.
“대체 사모님은 어떤 경로로 찾으셨다고 합니까?”
“우연히.”
픽, 웃은 강윤은 고개를 들었다.
“네?”
“목포 관광 갔다가 우연히 봤대. 됐지?”
“와, 박 실장님 운 대박 좋으시네요.”
오직 ‘우연히’라고 하니 호석이 크게 안도했다. 자신의 능력 부족을 한심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어렵게 전달하셨답니까?”
“괴짜잖아. 성가신 게 싫어서.”
“아하. 상무님께서 귀찮게 할 줄 알고 미리 자르신 거군요.”
매가리 없던 눈동자에 도로 생기가 돌아 강윤은 내심 웃었다.
“그런데요, 상무님.”
“응.”
“성가신 분께서 왜 굳이 대포폰까지 구하셨을까요?”
명확한 지적에 강윤은 무심코 흠칫했다.
자신의 영향인가?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이 녀석도 날이 갈수록 만만치 않아진다.
“글쎄… 이거 병원 CCTV인데…….”
빈약한 구실을 댈 바엔 회피가 낫다.
강윤은 메모리 카드를 건네며 화제를 전환했다. 호석이 냉큼 메모리를 받았다.
“이 영상에서 은재와 충돌할 뻔한 오토바이 운전자 정보를 조사해 봐. 왼팔에 문신 있으니까, 추적에 도움이 될 거야.”
“알겠습니다.”
“상무님, 사고도 아니고 사모님이 다치신 것도 아닌데, 병원 CCTV는 왜 확보하셨습니까? 뭔가 의심스러운 정황을 포착하셨습니까?”
“만일을 대비해서.”
“예, 상세히 조사해서 보고하겠습니다.”
강윤의 의중을 파악한 호석이 시시콜콜 캐묻지 않고서 속히 돌아섰다.
“아.”
조용히 닫히는 문을 응시하던 강윤은 아차, 했다.
얼른 핸드폰으로 기사를 검색했다.
강윤과 함께 찍힌 은재의 모습이 담긴 기사를 찾아, 은재의 사진에다 엄지를 꾹 눌렀다.
―이미지 저장
그러고서 제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확인했다. 아름다운 은재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강윤의 입술 자락이 흐뭇하게 휘었다.
***
“어이구! 내 손자 왔네.”
도성만 회장과 산책로에서 오붓한 대화를 나누던 은재는 할아버지의 탄성에 고개를 돌렸다. 산책로 입구로 들어서는 강윤을 포착했다.
단순히 서 있는 자세일 뿐인데도 기품이 넘쳤고, 그를 감싼 배경마저 산화되어 오직 그만이 또렷이 보였다.
은재와 눈이 마주친 강윤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매력적인 입술을 보자마자 저 멀끔한 입술이 저지른 만행이 떠올랐다.
‘저런 남자와 내가…….’
화끈.
은재는 속절없이 불타듯 달아오른 뺨을 감추려 후딱 고개를 숙였다.
‘미쳤어. 대체 훤한 낮부터 야하게….’
어폐가 있었다.
깜깜한 밤이면 마음껏 야해도 된다는 말이냐.
‘후.’
은재는 불끈불끈한 심장을 제어하려 심호흡을 하며, 품위 넘치는 걸음걸이로 다가온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동요를 읽은 양 은재에게 머문 그의 눈동자에도 이글거리는 열기가 있었다.
이곳이 병원 산책로가 아니라면 냉큼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었다.
“할아버지.”
하지만 도성만 회장에게 돌린 눈빛은 더없이 정중하게 변했다.
‘연기의 신이야.’
은재는 기막혔지만, 그녀도 무던한 표정을 지었다.
“강윤이 왔구나.”
“혈색이 맑으시네요?”
“은재 덕분이지.”
“점심은요?”
“은재가 살뜰히 챙겨줘서 먹었어. 한 그릇 뚝딱 비웠지.”
“잘하셨네요.”
“기특한 할아버지지?”
“네.”
넉살 떠는 도성만 회장이 뿌듯하다는 듯 은재를 봤다. 빙그레 웃어주는 은재에게 강윤의 다정한 눈짓이 왔다.
“고생했네?”
“별로.”
세상 천연덕스러운 남자에게 끝없이 달뜨는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아 은재는 짐짓 시치미 뗐다.
“나는 들어가련다.”
강윤과 미묘한 눈초리를 교환한 도성만 회장이 상반신을 들썩였다.
먼발치에서 대기하던 간병인이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달려와 휠체어의 손잡이를 낚아챘다.
“모실게요.”
“아, 아니요. 제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은재는 당황했다.
“들어가겠습니다.”
“간다.”
도성만 회장은 한껏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채 시선을 돌렸고, 남자 간병인은 꿋꿋이 묵례하고 휠체어를 끌고 갔다.
“밥 먹자.”
“밥?”
은재는 그제야 신선한 걸 발견했다.
우아한 남자의 손에 웬일로 쇼핑백이 들려 있었는데, 유명 도시락 브랜드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도시락을 가져왔어? 할아버지께서 연락하신 거야?”
“나나 할아버지나 서은재가 배곯을까, 잠은 잘 자나, 자나 깨나 걱정이 태산이니.”
“거짓말.”
“참말.”
언행은 뽀로통하게 해도 은재는 감격스러웠다.
도강윤이 날 위해 도시락을 싸―사―오다니….
새삼 대우받는 기분이랄까?
산책로 한편엔 환자와 방문객들을 위한 통나무 테이블이 있었다.
강윤은 그곳에 고품격 도시락을 놓았고, 그의 자연스러운 태도에 은재는 황당해서 자꾸 웃음이 났다.
나무젓가락도 친절히 갈라서 쥐여주는 눈짓도 흡사 여우 같았다.
“삼현그룹 상무님께서 왜 이리 한가해?”
“상무는 바빠.”
“그런데 도시락까지 들고서 왜 왔어? 회장님 아시면 내 뒤꽁무니 쫓아다닌다고 격노하실 텐데.”
“상무도 밥은 먹어야지. 엄연히 사람인데.”
“사람이었구나. 몰랐네.”
“나는 사람 같지 않아?”
“내 기억 속의 도강윤은 하도 감정 없이 굴어서 난 또 삼현에서 극비리에 개발한 인공 지능 로봇인 줄 알았지.”
연일 지치지 않은 체력을 체감하고는 더더욱.
“이젠 아니야.”
은근한 비난을 읽은 강윤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러고선 비스듬히 입술을 기울여 은재의 귓불에 댄 채 은밀하게 속닥였다.
“쾌락을 알아버린 인간이 되었거든.”
오소소한 소름으로 은재는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반응을 즐기듯 강윤의 입술이 짓궂게 말아 올라갔다.
“그러니까 책임져.”
“뭘, 뭘 책임지라는…….”
은재는 당황했다.
화끈하다 못해 활활 타오르는 얼굴을 떼어내며 강윤을 격렬히 노려보았다.
“네가 날 탐닉의 세계로 이끌었잖아.”
“내가 언제? 정작…!”
하마터면 ‘나를 그 세계로 데려간 건 당신…’이라는 말로 항변할 뻔했다. 은재는 퍼뜩 이성을 잡아채어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그딴 소리 집어치우고, 먹기나 해.”
얄궂은 남자는 느긋하게 도시락을 은재 앞으로 밀며 눈썹을 들썩했다.
“맞아. 먹어야 서은재 체력도 보충되지.”
체력 보충시켜서 뭐 하게.
은재는 다시금 오소소 떨었다.
‘아, 내 무덤을 내가 팠나 봐.’
후회 비슷한 감정이 치솟았지만, 우스운 건 그와의 돌이킬 수 없는 밤이 아닌, 도강윤의 불굴한 활력을 일깨웠다는 점이었다.
그걸 증빙하듯.
“오후 3시까진 일정이 비는데, 우리 딱 두 시간만 저기 가서 쉴까?”
식사를 끝내자마자 의성대 병원 맞은편의 신화호텔을 가리키는 도강윤이었다.
“일 안 해?”
“상무도 휴식이 필요해.”
휴식은 개뿔.
“들어가세요, 상무님.”
은재는 단칼에 내쫓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