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마음껏 하지 마!”
은재는 자신이 완벽한 약자가 되어버려서 분했다.
“좋아하는군.”
씩씩거리며 노려봤으나 강윤의 잔인해서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는 농염하게 일렁였다.
“아니거든, 아!”
그리고 서슴없이 나아갔다.
집중한 남자의 미간이 좁게 찡그려졌다.
그 찡그림마저도 가슴골에 뜨거운 전율을 동반할 정도로 요염했다.
잇따라 그는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은재를 바스라지게 안았다.
은재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고서 버텨냈다.
‘이 남자는 분명 날 죽일 작정이야.’
마음속으론 거듭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은재는 그를 완벽히 용인했다.
그녀의 수락이 기분 좋은 듯 강윤은 참을 수 없었던 열정을 폭발했다.
‘대체 내가 왜 이 남자를 자극했을까.’
은재는 한탄하면서도 하염없이 뜨거운 그로 인해 전신이 화염에 갇혔다.
그뿐이랴.
하염없이 불끈불끈한 열감이 치솟았다.
마치 용암 속에서 허우적거리듯.
“음. 아!”
은재는 자신을 죽일 것 같으면서도, 자신을 유일하게 살릴 지푸라기라도 되는 양 탄탄한 강윤의 몸을 부둥켜안으며 튕겨 나가지 않도록 버텼다.
소용돌이 같은 전율 너머엔 오롯이.
도강윤.
도강윤.
도강윤뿐이었다.
“…하. 도강윤!”
은재는 자신을 짓누르고, 자신에게 집요한 남자의 몸놀림에 완전히 사로잡힌 채 오직 도강윤의 이름만을 울부짖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서로를 갈망하며 완벽한 결속을 다지는 이 순간이 남녀로서 나눌 수 있는 유일무이한 교환이었고, 허전한 빈틈이 채워주는 충만이었다.
“아……. 도강윤.”
“하, 은재야.”
강윤의 속도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남자의 맹렬한 질주에 은재의 목구멍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
절정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는 아예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무성의 비명을 쏟았다.
마치 울 것처럼 일그러진 은재를 들여다보던 강윤의 얼굴 역시 굳었다.
“서은재.”
은재의 몸이 흐물흐물하게 녹아가는 중임에도 그는 개의하지 않고 세차게 움직였다.
“은재야.”
살벌한 속도였고, 무자비한 기교였다.
제 가슴 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땀방울과 자신을 두들기는 격렬한 노크에, 이미 무저갱 같은 나락에 떨어진 듯했던 은재의 심신은 또다시 쾌감의 정상에 도달했다.
그리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단단히 혼났다.
창문으로 투과하는 아침 빛을 받으며 깨어났을 땐 은재만이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다행이다, 혼자라서.’
은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강윤이 없음에 극도의 안도가 되다니.
“아….”
삐거덕거리는 몸을 뒤척이면서, 몸살이라도 난 양 저절로 낑낑거리다가도 재차 안심했다.
‘군대 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
“하!”
은재는 격한 심호흡을 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아서 도로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백수처럼 아무런 일 없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현시점이 천국 같았다.
징―
이런 평화를 방해하는 자는 분명 심보가 고약할 것이다.
탁자 위에서 끊임없이 부들거리는 핸드폰을 잡기 위해 은재의 팔만 게으르게 꾸물거렸다.
어렵사리 낚아챈 핸드폰도 들기 귀찮아서 귀에다 댔다.
아니나 다를까, 발신자는 민서였다.
[작가님, 좋은 아침입니다.]
“닭살 돋아. 그냥 평소대로 하지?”
[아, 내가 너랑 말할 때마다 닭살이 돋는 게 이래서였구나.]
정색하자 한껏 느글느글하게 굴던 민서가 천연덕스러운 소릴 했다.
“용무나 말해.”
[상생 프로젝트 언제부터 진행해? 그전에 신작 출간이 가능하면 작업하고 싶어서. 나도 일정을 잡아야 하거든.]
“아.”
그러고 보니 도강윤과 행사장에서부터 불붙은 바람에 업무적인 대화는 일절 나누지 못했다.
못 말리는 사태였던 거지.
“자세한 일정은 아직 모르고 대략 다다음 주 경? 우선, 다음 주에 삼현 상생 프로젝트 담당자와 미팅은 잡혀 있어.”
[다다음 주? 와! 추진력 대단한 도강윤의 프로젝트라 진행 속도가 엄청 빠르구나.]
추진력뿐인 줄 아니.
다른 건 까무러칠 정도로 대단하단다.
은재는 기합이라도 받은 양 벌벌 떠는 다리를 쭉 뻗으며 경직된 근육을 풀었다.
[일정이 빠듯해서 신작 작업 힘들겠네?]
“내 하드에 유럽부터 찍은 작품이 꽤 돼. 그거 넘길까?”
[당연히 주셔야죠, 작가님! 사랑해요!]
“말로만 때우지 말고.”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거하게 쏴야죠.]
민서가 아부의 신인 이방처럼 간사스럽게 웃더니, 본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말인데, 상생 프로젝트에 내가 살짝 발가락 엄지 정도만 담글 순 없을까?]
“정말 욕심이 덕지덕지하구나?”
[비즈니스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이야.]
“좋아. 그 발버둥에 성원해 줄게. 삼현에서 상생 작품 사진전을 제안했어. 기부 개념이라 기꺼이 참여한다고 했거든? 그 사진들의 출판권은 네게 줄게.”
[아! 작가님, 죽도록 사랑해요.]
“이럴 때만 작가님 소리 하지 말고.”
[거하게 쏜다니까! 프로젝트 하러 어디 섬에 간다고 했지? 내가 가서 회 한 접시 쏠게! 거기 어디야?]
“알려줄 수 없어.”
[왜? 극비야?]
“극빈 아닌데, 도강윤이 너 무서워하니까.”
[야!]
“끊어.”
격한 악담이 퍼부어지기 전에 은재는 재깍 차단했다.
끊긴 핸드폰을 매트리스에 던지듯 놓다가, 침대 맡 탁자에 놓인 메모를 발견했다.
―임원 회의가 있어서 출근해.
도강윤은 삼현그룹의 상무이사라는 직책으로 인해 임원 회의, 전략 회의, 실무 회의, 주간 회의 등등 회의만으로도 일상이 꽉 찬 남자였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텐데.
대체 그런 무시무시한 체력은 어디에 비축해 놓은 걸까.
혀를 내두르며 메모를 내려놓으려는데, 흰색 종이의 뒷장에 글씨가 어른거렸다.
“응?”
은재는 메모를 뒤집었다.
―봐준 거야.
“허.”
이 앙큼한 남자가 은근슬쩍 경고처럼 써놨다.
‘그렇게 사람을 반 죽여놓고 봐준 거라고? 안 봐주면 어쩔 건데?’
기도 안 차서 콧방귀를 뀌던 은재의 입에서 픽, 웃음이 새었다.
이내.
“쿡쿡.”
시베리아허스키 같던 남자의 생색이 귀여워, 소리 웃음이 나왔다. 은재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쿡쿡거렸다.
***
탁.
구내식당에서 조찬과 함께 이뤄진 이사진 회의를 마치고 상무실로 돌아오자, 호석과 김 비서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셨어요? 일정 보고할까요?”
“바로 일정 있나?”
호석의 질문에 강윤은 손목시계로 오전 9시 30분임을 확인했다. 말 많은 노인네들을 상대하느라 시간 지체가 상당했다.
“결재하실 서류가 상당한데, 급한 서류는 없고요. 오전 11시 전략팀 전략 보고가 있습니다.”
“그럼 한 시간만 있다가.”
“예, 알겠습니다.”
“커피나 차 드릴까요?”
김 비서가 물었다. 강윤은 거절의 뜻으로 손짓만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문을 굳게 닫고서 노트북에 usb 메모리를 연결했다.
잠시 후.
훤한 실외 주차장 풍경이 영상으로 실행됐다. 어제 병원에서 확보한 CCTV 영상이었다.
어젯밤 은재와의 뜨거운 대화 덕분에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한낮의 병원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숱했다. 빨리 감기로 영상을 살피던 때, 눈 익은 세단에 올라타는 민경애 여사가 포착됐다.
그리고 그 앞을 교차하듯 지나는 검은색 오토바이.
‘미리 주고받은 건가.’
직진한 오토바이는 은재를 발견하자마자 속도를 올린다. 고의성이 다분한 질주라는 건 CCTV 영상이 증빙하고 있다.
하지만 오토바이와 어머니 민경애 여사와의 접점은 없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민경애 여사의 세단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눈짓을 교환하는 듯한 낌새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머니를 태운 세단은 아랫길로 유유히 떠났을 뿐이다.
“흠.”
단지 우연일까?
강윤은 고심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추궁하고 싶지만, 유리한 방안을 고심했다.
공연히 어머니 심기를 불편하게 해봤자, 그 해(害)는 오롯이 은재에게 향할 터.
“정 비서. 들어와.”
강윤은 인터폰으로 호석을 호출했다. 즉각 안으로 들어선 호석이 반듯이 물었다.
“일정 보고할까요?”
“응.”
“오전 11시 전략기획팀의 전략 보고 브리핑이 있으며, 오후 3시에는 삼현화학에서 주최하는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브리핑은 보고서로 받지.”
“전달하겠습니다.”
호석이 메모하고 보고를 이었다.
“홍보팀 김서라 책임님께서 DM를 보내셨는데, CBTJ 뉴스룸에서 상무님과 미도 작가님의 동반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동반 출연?”
“네. 상생 프로젝트에 대한 인터뷰라는 명분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론 두 분의 로맨스에 군침을 흘리는 거겠죠.”
호석의 입매가 다소 음흉하게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