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이해가 안 돼. 대포폰을 써가며 전달했으면서 일부러 너임이 들통나도록 호텔에서 전화하고. 의도가 뭐야?”
“너 모르게 시작했으면서, 그 이면엔 네가 알아주길 바라는 모순이 있었어.”
“이유는?”
“없어. 서은재를 추적하는 널 돕고 싶었을 뿐이야.”
강윤의 예상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일차적 진실일 뿐 의뭉스러운 행동에 대한 설명으론 부족했다.
“순서대로 묻자.”
“마음껏 심문해도 괜찮아.”
“서은재는 어떻게 찾았어?”
“서은재가 여권 만료 문제로 출입국사무소와 통화한 기록을 찾았어.”
재민이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술술 자백했다.
“2년 전 입국한 기록도 남아 있었고.”
“2년이나 되었다니…….”
은재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 장담했기에 한국은 제외했던 강윤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조금은 허탈했다.
“사람 찾는 덴 통신기록이 가장 빨라. 하지만 서은재로는 조회되지 않더라고. 그래서 부득이하게 경찰 쪽의 줄을 좀 이용했어.”
술로 입안을 축인 그가 부연했다.
“그러다 서은재의 은행 거래 정황을 잡았고, 대전의 은행을 필두로 쫓다 보니 목포로 좁혀졌어. 그래서 목포를 돌았지.”
“네가 직접?”
“관광 삼아서. 주말이면 한가했으니까.”
강윤의 미간이 모였다. 그의 반응에 재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으쓱했다.
“어떻게 섬인 줄 알았어?”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김민서라는 가명으로 목포 시장과 식사하는 서은재를 포착했어. 정말 운명 같은 순간이었지.”
재민도 놀라웠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지?”
“오기 같은 집착이었어. 내가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성격이잖아.”
“솔직하게 밝혀.”
빈약한 변명에 강윤은 냉담히 종용했다.
***
“…현서 때문이야.”
재민은 어렵사리 실토했다.
침잠한 눈빛을 내리깔며, 차가운 수포가 맺힌 술잔을 손끝으로 쓸었다.
“내가 현서를 사랑해.”
단연코 강윤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부터.”
재민은 늘 현서를 그림자처럼 지키며, 어릴 적 친구 이미지를 심어줬을 뿐 절친한 친구들에게조차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 적 없었다.
그의 감정을 아는 건 현서뿐이었다.
함께 미국으로 유학 간 후, 외로움에 못 견딘 현서와 동거하면서.
“3개월 전 현서가 영화 제작이 끝나고 귀국하면 열 일 제쳐두고 강윤이 너부터 잡을 거라고… 어떻게 해서든 결혼할 거라고 통보하더라.”
단지 자신은 강윤의 대역에 불과했다.
뼈저리게 알면서도 재민은 제 감정을 묻을 수도, 정리할 수도 없었다.
“내게 떨어져 나가라는 뜻이었지.”
“…….”
“그래서 나도 서은재가 필요했어. 서은재가 네게 돌아가면, 현서는 단념할 테니까.”
“…미련한 놈.”
묵묵히 듣던 강윤이 한숨처럼 읊조렸다.
친구의 미련한 외사랑이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론 동병상련 같은 기분도 들었으리라.
강윤 또한 한 여자밖에 모르니…….
***
쪽.
잠결에 제 이마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을 느꼈다. 그러나 맞물린 눈꺼풀을 뗄 수 없었다. 전날 밤의 수면 부족으로 뇌가 활성화되지 않았다.
쪽.
이번엔 귓불이었다.
짓궂은 치아가 살며시 깨물었다.
움찔.
“…음.”
잠이 깨지 않는 와중에도 오소소 소름이 번져서 은재는 앙탈 부리듯 오만상을 쓰며 고개를 틀었다.
“픽.”
환청처럼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잠의 사슬에서 묶인 뇌는 여전히 활성화되지 않았다.
쪽.
따스한 온기 도는 입술이 은재의 입술을 가벼이 눌렀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내리누르는 힘을 가했다.
그리고 잠든 그녀의 입술을 슬쩍 벌리더니 혀를 집어넣어 은재의 혀를 부드럽게 감으며 키스했다.
은재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감미로운 키스를 받으며 깨어났다.
“뭐야.”
입술을 붙인 채 우물우물한 그녀처럼 강윤도 슈트 재킷을 벗으며 우물우물 대답했다.
“벌 받아야지.”
“…음? 벌?”
“날 약 올린 벌.”
은재는 몽롱한 상태라 말뜻을 해석하지 못했다.
그저 툭, 툭, 셔츠 단추를 시원하게 푸는 기척만 인식할 뿐.
‘무슨 벌?’
잠시 후.
은재는 온몸이 불타듯 달아올랐다.
그의 거침없는 손길로 어느 틈에 태초의 인간처럼 되어버린 상태로 제 몸을 점령한 남자의 기교에 숨이 꼴딱 넘어갈 지경이었다.
도강윤은 강력한 자신의 의지를 증명하려는 듯 열성적이었다.
병원에서의 일이 못내 아쉬웠다는 듯 집요함마저 있었다.
‘못 말리는 남자.’
덕분에 은재는 심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쿡.”
전신의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부르르 떨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너무나 삽시간에 빠져드는 감정이라, 저 자신에게 제동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조차 소멸했다.
은재는 이미 그에게 깊이 얽매여 있었다.
마음속 저편은 도강윤이 자신을 더 음습하고 깊숙한 곳으로 인도해 주길 바라는 욕망이 솟구쳤다.
곧 이런저런 상념은 먼지처럼 흩뿌려졌지만.
“……!”
그가 움직였다.
아주 은밀하고, 자극적으로.
마치 공기를 타고 그녀의 바람이 그의 귓속에다 귓속말한 듯.
“왜!”
그의 선정적인 키스로 놀람과 부끄러움이 교차해서 저절로 의문이 터졌다.
“픽.”
얄궂은 남자는 웃기만 했다.
‘씨.’
은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난생처음 겪는 느낌에 뼈마디가 오그라들었고, 발가락이 저릿저릿했다.
그럴수록 강윤은 그녀를 단단히 붙잡고서 더욱더 집요하게 키스했다.
“도강윤!”
은재는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만하라는 강력한 항의였다.
“하지… 마.”
“그럴 수 없지.”
그러나 도강윤은 그런 자잘한 반항에 굴복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외려 집착하듯 더하면 더했지.
안 돼.
안 돼.
은재의 심박수는 최고치에 다다랐고, 불의 화신이 된 양 체온이 급상승했다.
어느 틈에.
‘안 돼’가 ‘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더.’
더 해달라고 외칠 것 같아서 시트를 잘근잘근 씹어야 할 만큼 간절히 원했다.
‘……대체 어느 틈에!’
영민한 남자는 하룻밤 만에 은재의 반사신경을 완벽히 터득하고 있었다.
얄궂은 남자.
“그, 그만.”
은재는 미칠 듯한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본능적으로 교성을 내질렀다.
전율하는 육체는 말과 반대로 호응하고 있었다.
그 갈구에 그는 맹렬히 호응했다. 그에게서 타는 듯한 강렬한 열기와 격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거기다가, 미지의 세계를 발견한 탐험가처럼 세밀하기까지 했다. 작은 지점 하나 언뜻 지나칠 수 있는 특이점조차 허투루 넘기는 법 없이 치밀하게 탐색하고 탐했다.
“제발, 그만해.”
“…그만이라니. 아직 멀었어.”
“이, 이게 벌이야?”
“무슨.”
빈틈으로 피식, 하는 노골적인 숨결이 들어왔다. 소름이 돋아서 움찔하면서도 은재는 갸웃했다.
‘왜 웃지?’
어둡고 불길한 기류가 뒷덜미로 엄습했다.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에 머리끝까지 전율이 뻗어왔다.
그리고 온몸이 경직되었다가 허우적거리기를 반복하던 은재의 머리끝에 불꽃처럼 무언가가 펑 터졌다.
“……!”
이윽고 은재는 축축하게 늘어졌다.
롤러코스터라도 탄 양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멀미하듯 가슴속이 울렁울렁했다. 더불어 손가락, 발가락까지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빠졌다.
도로 물밀듯이 잠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이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건가?”
강윤의 잔뜩 쉰 저음이 올라왔다.
그 음색조차 야성적으로 울렸는데, 흡사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그의 입술이 잔인하게 늘어났다.
“아직은 부족하지?”
“응?”
뭔 부족?
아니요, 충분합니다만.
가물가물한 정신인 탓에 그의 의도를 읽는 게 한 박자 늦었다.
“우리 은재.”
왜 또 그렇게 느끼하게 부르지? 그렇게 부를 때마다 너무너무 불안해!
번뜩, 눈동자를 부릅뜬 찰나.
도강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그윽한 미소를 그리며, 하염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은재의 허벅다리를 어루만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벌 받아야지.”
본격적?
해석하려는 찰나.
“앗?”
도강윤이 세상 짓궂은 남자로 변신해 있었다.
자지러지는 은재의 반응을 예측이라도 한 듯 아찔함을 즐겼다.
꽉.
은재의 손가락 사이로 시트가 더욱 세게 말려들었다.
자극으로 인한 건지, 반항 심리로 인한 건지 도무지 알 길은 없었지만, 은재는 비로소 진정한 벌칙을 체감했다.
“아, 악! 미쳤어! 나쁜 놈!”
이 진짜 나쁜….
이 범접할 수 없는 놈…….
저도 모르게 은재는 욕설을 내뱉었다.
“나쁜 놈?”
황당하다는 듯 강윤이 실소했다.
“욕먹은 김에.”
나쁜 남자의 본성이 나왔다.
“마음껏 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