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36화 (37/84)

36.

―먼저 갈게.

평소 사회환원사업에 지대한 관심이 있던 원 교수한테 한참이나 잡혀 있다가 풀려난 후에야 강윤은 은재의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흠.’

자신이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원활히 진행되고 있음에도 강윤은 마뜩잖았다. 완벽히 다른 목적으로서의 불만이지만.

징―

더불어 은재의 품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은 그의 욕망을 자유롭게 놔두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상무님!]

다름 아닌 정호석이었다.

[제가 수상한 걸 찾았습니다.]

“그래?”

[대기하면서 열심히 호텔 CCTV를 뒤지다가 기막힌 찰나를 포착했지요.]

이 또한 강윤의 지시대로 열성적으로 일하는 중이니 타박할 수도 없었다.

“어디야?”

[지하주차장인데, 지금 바로 출입구 쪽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바로 내려가지.”

[네!]

의욕 넘치는 호석과 통화를 끝내고, 강윤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 출입구로 나섰다.

딱 맞춰 지하주차장에서 올라온 세단으로 다가가려던 찰나였다.

“도강윤.”

갑자기 나타난 현서가 그의 팔에 제 팔을 끼웠다. 허락 없는 접촉에 강윤의 미간이 이지러졌다.

“날 물 먹이니까 좋아?”

“놔.”

뿌리치려는데, 현서가 제 상반신을 그의 팔뚝에다 아예 붙였다. 그러고서 독기 품은 표정으로 이기죽거렸다.

“밀쳐내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럼 내가 어떤 꼴로 넘어지는지 봐야 할 거야.”

협박이었다.

부러 이목이 쏠리는 행동을 불사하려는 거였다. 현서의 뜻대로 병원 출입구를 오가는 사람들은 상당수였다.

“원하는 게 뭐야?”

“빤히 우리 상견례 소식 들었으면서, 어떻게 그런 짓거릴 해?”

“나와 상관없는 상견례야.”

픽, 비소를 띤 강윤은 한껏 비웃었다.

“결혼은 너 혼자 해.”

“신랑 없이 무슨 결혼을 해?”

“네 능력껏.”

“빈정거리지 마. 아무리 도강윤이라도 날 이런 식으로 대우할 순 없어.”

“네가 자초한 거야.”

타인의 눈엔 그저 다정하게 서 있는 남녀 같았지만, 두 사람의 첨예한 기류는 이어졌다.

“그럼 서은재는? 공식적으로 연인 선포하면 뭐 해? 아무도 걜 인정 안 할 텐데.”

현서가 조소했다.

“차라리 서은재와 바람을 피우지. 내가 그 정도는 용인해 줄 수 있는데 말이야.”

“내가 왜 내 아내와 바람을 피워야 하지?”

“허, 내 아내라니. 이미 법적으로 두 사람 갈라섰잖아? 세상 사람들이 다 반기는 이혼이었어. 그에 비해 난 다들 축복하는, 도강윤의 예비 약혼녀야.”

뼈를 때리는 정곡이라 강윤의 인내심이 끊겼다.

“임현서.”

더는 장단을 맞춰줄 수 없어 강윤은 음산할 정도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병원에서 검사 좀 받지? 착각도 병이야.”

“뭐?”

“팔이나 놔. 안 그러면 네 바람대로 해줄 테니.”

힐끗 잡힌 팔뚝을 일별하는 눈초리는 무섭도록 냉랭했다. 되레 볼품사납게 넘어지도록 만들겠다는 위협을 돌려받은 현서가 오만상을 쓰며 떨어졌다.

“나한테 함부로 하지 마. 내가 쉽사리 물러날 줄 알아?”

“마음대로.”

씩씩거리는 현서를 뒤에 두고서 강윤은 대기하는 세단에 올라탔다.

“후회할 거야! 도강윤!”

분통이 터진 현서가 발을 동동 구르며 고함을 내질렀지만, 무관심하게 손짓했다.

“출발해.”

“회장님께 보고가 올라가겠는데요?”

“그러겠지.”

호석이 백미러로 현서를 응시하며 핸들을 돌렸다. 강윤은 피로도가 급상승하여 등받이에 깊숙이 기댔다.

“노트북 켜놨습니다.”

“그래.”

고단한 심리를 헤아린 호석이 화제를 전환했다.

뒷좌석에 놓인 노트북을 들어 절전모드를 해제하자, 화면이 떴다.

“제가 야무지게 편집도 했습니다.”

호석이 득의양양하게 으쓱거렸다. 강윤은 무덤덤하게 플레이 버튼을 실행했다.

비교·분석하듯이 분할 화면으로 두 개의 영상이 떴다.

일순,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화면 속 인물은 엉뚱한 인물이라 할 순 없었다.

이미 께름칙한 예감은 실재했기에.

“정 비서, 지금 목적지가 어디지?”

“당연히 상무님 펜트하우스죠.”

“차 돌려.”

펜트하우스에는 은재가 있다.

호텔 메모 건은 까맣게 모르는 은재에게 괜한 불안감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갈까요?”

“보안 유지 가능한 곳.”

“그게 어디일까요?”

룸미러로 뒷좌석을 넘겨다보는 호석의 눈알이 또르르 굴렀다. 강윤은 노트북 속의 영상을 닫고 시스템도 종료했다.

“네 집.”

“차 돌리겠습니다.”

호석이 군소리 없이 핸들을 틀었다.

어차피 사옥이기에 상무이사인 강윤도 출입이 가능했고, 외부 사람은 진입 자체가 어려웠기에 그보다 안전한 곳은 없었다.

30분 후.

강윤과 호석은 나란히 앉아 노트북 영상을 면밀하게 확인했다.

“시간부터 보세요.”

분할 화면 모두 상단 CCTV 기록 시간은 동일했다.

화면의 왼편은 호텔 프런트였고, 오른편은 채종훈의 VVIP 초청행사가 한창인 연회장 출입구인데 둘 다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했다.

“이제 나오죠.”

연회장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주위를 면밀하게 살핀 남자는 로비가 아닌 뒤편의 객실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이동했다.

“복도 카메라입니다.”

호석의 편집대로 오른편 화면이 바뀌었다. 짧은 시간 내에 이 자료를 찾아서 편집까지 한 녀석이 우쭐하듯 손가락질했다.

“이제 호텔 뒤편 정원 카메라로 이어집니다.”

바뀐 카메라의 앵글이 정원의 가로수에 숨다시피 선 남자를 잡았다.

남자는 슈트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는 듯한 행동에 이어 버튼을 몇 번 누른 후 제 귀에 갖다 댔다.

동시에 왼편 프런트의 매니저가 전화를 받았다.

“주소를 불러주는 거죠.”

오른편 남자는 다른 핸드폰을 꺼내서 들여다봤고, 왼편 매니저는 펜을 들고 받아 적었다.

잠시 후 남자는 다른 핸드폰을 닫았고, 매니저도 펜을 놓고 몇 마디 나눴다.

그리고 왼편과 오른편 영상은 정확히 같은 시각에 귀에서 핸드폰과 수화기를 뗐다.

이어 오른편 남자가 대포폰의 전원을 끄는 동안, 매니저는 프런트에서 나와 연회장으로 향했다.

‘저 여자다.’

강윤은 그녀를 기억했다.

행사장으로 들어와서 은재의 거주지가 적힌 메모를 전달했던 매니저였다.

그러니 이 영상 속 그녀가 들고 있는 저 하얀 종이는 틀림없이 그때의 메모였다.

‘확실하군.’

매니저가 강윤과 대면하는 동안, 오른편 남자는 대포폰을 안주머니에 넣으며 돌아섰다.

정원 CCTV 초점이 남자의 얼굴을 또렷이 포착했다.

“상무님.”

호석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화면의 남자를 꾹 짚었다.

“박재민 실장님 맞죠?”

“응.”

호석의 물음에 강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 생수로 쓰디쓴 입안을 적시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 정원은 기지국 범위에도 맞아떨어져요. 박재민 실장님이 보낸 메모가 확실하죠?”

“확실해.”

“박 실장님께서 어떻게 알았을까요? 제가 몇 년 동안 못 찾은 사모님인데….”

“워낙 명철하잖아. 내가 은재를 찾는 걸 눈치챘을 거고, 정보통신 회사 임원이니 우리보다 추적이 수월했을 거야.”

박재민은 굴지의 정보통신 그룹의 4세로 현재 기획실장직을 맡고 있다.

“상무님을 도와주기 위해 실장님이 나선 걸까요?”

“글쎄.”

강윤은 어림짐작하지 않았다.

“근데, 전 실장님이 사모님을 찾은 것보다 왜 상무님께 이런 방식으로 전달했는지가 더 궁금해요.”

“자신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겠지.”

“왜요?”

“그건 만나서 연유를 들어봐야겠지.”

“박 실장님 만나러 가시게요?”

강윤은 망설임 없이 세단의 키를 챙겨서 일어났다.

명쾌하게 현관으로 향하는 그의 뒤를 기겁한 호석이 졸졸 쫓아왔다.

“넌 있어.”

“안 돼요. 위험한 일이라도 발생하면 제가 상무님을 지켜 드려야죠.”

“그럴 일 없어.”

오두방정 떠는 호석의 어깨를 툭 두들기곤, 강윤은 의연히 나왔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했다.

[어, 강윤아.]

재민이 받았다.

***

여가수의 끈적이는 노랫소리가 클래식 바를 채웠다. 바에 들어선 강윤은 바텐더가 건네는 술을 받는 재민을 포착했다.

“많이 마셨어?”

“아니.”

재민은 말과 달리 관자놀이 부위가 벌겠다. 강윤은 바텐더에게 무알코올 음료를 주문하며 그의 곁에 앉았다.

“아직도 술은 입에도 못 대?”

“체질이 어디 가겠어?”

“픽.”

조롱이 아닌 헛숨 같은 실소였다. 그러곤 재민은 푸르른 색채의 술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심란한 기미가 역력했지만, 토로할 의중은 없는 듯했다.

“이거.”

그래서 강윤은 단도직입적으로 핸드폰에 저장해 온 영상을 오픈했다.

호텔 CCTV가 플레이되자, 재민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발견했네. 너라면 알아챌 줄 알았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