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축하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좋다는 소리에만 예민하게 받아들이자, 채종훈이 기도 안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하, 도강윤이 질투를 다 하네.”
“넘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온전히 걸어 다니고 싶으면.”
“예, 예, 명심합죠.”
날카로운 충고에 채종훈이 영혼 없이 끄덕거리며 도망치듯 돌아갔다.
“돌은 새끼. 서은재한테 미친 새끼.”
진저리치며.
***
―어디야?
―병원에 가는 길.
세단의 뒷좌석에 오르며 보낸 메시지의 답이 왔다. 몇 글자에 불과한데도 강윤의 눈매가 길게 늘어났다.
“픽.”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도 냈다.
“네?”
“아니야.”
운전석의 호석이 자신을 부른 거로 오해하고 반응했다. 실없는 사람이 된 듯해 강윤은 정색하고, 핸드폰을 내려놨다.
“CCTV는 제가 확인하면 되죠? 포렌식도 맡겨야 할까요?”
“삭제 정황이 발견된다면. 하지만 그렇게까지 치밀하진 않겠지.”
“네.”
호석이 수긍하며 말을 이었다.
“신기해요. 저도 그리 오랫동안 찾질 못했던 사모님인데, 그 사람은 어떻게 찾았는지…. 상무님을 뒷조사한 걸까요?”
“그러겠지.”
호석을 공식적인 수행비서로 들이기 전, 강윤은 극비로 그를 유럽에 파견 보냈다. 그리고 호석은 2년간 유럽을 돌며 은재의 자취를 추적했다.
하지만 그때, 강윤은 이미 실패를 예측했었다.
“누구일까요?”
“은재의 실물을 명확히 아는 자겠지.”
실패는 당연한 결과였다. 호석은 은재에 대해 아는 거라곤 기껏 사진 몇 장에 불과했기에.
“추정되는 분이 계세요?”
“아직.”
어느 정도는.
강윤은 머릿속에서 그리는 이미지를 섣불리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명확한 답은 증거물이 밝혀줄 터.
“어? 상무님! 작은 사모님이요.”
의성대 병원 정문으로 진입하던 때, 호석이 전방을 가리켰다. 차창 너머로 보니 은재가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보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세워.”
“네.”
강윤의 명령을 받자마자 호석은 갓길에 세단이 멈췄다. 주저 없이 차에서 내린 강윤은 큰 걸음으로 은재의 뒤를 쫓았다.
‘은재야.’
은재는 앞만 보고 가느라 그의 접근을 인식하지 못했다.
‘서은재.’
그가 속으로 계속 불러도 추호도 모르는 채 제 앞으로 직진만 했다.
‘돌아봐.’
어쩜 저렇게 한 번을 뒤돌아보지 않는지.
둔한 것도 아니면서.
강윤의 주문은 전혀 먹히지 않은 채, 은재는 주차장 건널목을 건넜다.
‘돌아보라고.’
내심 쿡쿡거리며 강윤이 성큼성큼 건널목으로 진입하려 때였다.
부아앙―
별안간 주차장 모퉁이에서 등장한 오토바이가 곧장 은재를 향해 질주했다. 추돌이라도 할 기세로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서은재!”
강윤의 다리가 반사적으로 뛰었다.
은재의 팔목을 잡아채어 격하게 제게 당겼다.
“앗.”
억세다시피 한 힘으로 은재는 강윤의 품으로 착지했고, 동시에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오토바이가 그녀의 앞으로 지나쳤다.
쌩―
검은색 헬멧을 쓴 오토바이 운전자는 멈추지 않았다.
용 그림으로 뒤덮인 팔뚝을 보란 듯이 내보인 채 아스라이 멀어졌다.
“괜찮아?”
은재와 겹친 가슴팍이 발끈발끈 뛰었다. 은재의 심장박동이 아니라, 놀란 강윤의 심장박동으로 인해서였다.
네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응. 뭐야, 저 사람.”
은재는 그의 어깨 너머로 오토바이를 일별하며 중얼거렸다.
“병원에서 왜 저렇게 빠른 속도로 달려.”
강윤도 그녀의 눈길을 좇던 그때.
눈에 익은 자동차가 병원 정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
틀림없이 민경애의 세단이었다.
‘만일, 우연이 아니라면…….’
강윤의 목덜미에 선득한 기류가 엄습했다. 이어 뇌리를 사로잡는 섬뜩한 추정을 떨칠 수 없어 건조한 입술을 다물었다.
“덕분에 살았네?”
“내가 생명의 은인인가?”
은재는 수상한 낌새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아, 강윤은 내색 없이 농담을 던졌다.
“그 정돈 아니야.”
샐쭉하게 고개를 흔든 은재가 턱을 곧추세웠다.
“언제 온 거야? 어떻게 내 뒤에 있어?”
“몰랐어? 내가 서은재 스토커인 거?”
그녀의 비스듬한 얼굴이 한없이 귀여워 강윤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범죄자네.”
장단을 맞춘 은재가 쿡쿡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만 놔.”
“이대로 좋은데?”
강윤은 외려 그녀의 허리춤을 굳게 당기며, 자신의 복부에 밀착했다. 그러고선 한쪽 눈을 찡긋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집으로 돌아갈까?”
“할아버지 뵙지도 않았어.”
“할아버지야 내일도, 모레도 계실 거고. 나는 당장이 급하고.”
“언제부터 이렇게 엉큼했어?”
“아마도 쭉?”
은재가 샐그러진 눈을 했지만, 강윤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서 그녀의 귓불에 입술을 붙고서 달콤하게 속닥였다.
“집에 가자, 응?”
조르듯.
“까르르.”
기막힌 은재가 소리 내어 웃어젖혔다. 그러고서 냉담하게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탁, 쳤다.
“신고 들어와요.”
이대로 애정행각을 벌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한낮의 병원 주차장이기에 강윤은 하는 수 없이 놔줬다.
“얼른 뵙고 돌아가자.”
미련을 못 버린 채.
***
“어디야?”
강윤은 중요한 통화가 있다며 은재를 VIP 병동으로 들여보낸 후, 인적 드문 곳에서 호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원 지하주차장이요. 상무님 기다리면서 호텔 CCTV 보고 있습니다.]
“할 일이 하나 더 늘었어.”
[말씀하세요.]
속에서 부글부글한 분노가 들끓었지만, 강윤은 절제력을 발휘하며 주차장에서의 상황을 설명했다.
[예? 작은 사모님을요?]
호석은 경악했다.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음, 없어.”
짐짓 태연히 대꾸하고 있었지만, 강윤의 심장은 망치질하듯 쿵덕거렸다. 저릿한 가슴팍을 억제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보다 병원 CCTV 확보해 줘야겠어.”
[오토바이 번호판 확인해서 운전자 추적하면 됩니까?]
“아니… 일단 가져와.”
[알겠습니다. 호텔 CCTV는 제가 조금 더 살펴보고 타임라인을 표기해서 넘길게요.]
“그래. 수고해.”
[네!]
호석의 우렁찬 대답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강윤은 핸드폰을 슈트 주머니에 넣으며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
병원 주차장 CCTV는 자신이 직접 볼 생각이었다.
만일 어머니 민경애 여사가 연루되었다는 정황을 찾는다면, 주저 없이 담판 지을 계획이다.
차후의 발생할 위험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도록.
***
강윤과 산책로에서 헤어진 은재는 곧장 VIP 병동으로 이동했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를 향하는데, 곁을 지나치던 하얀 가운의 남자가 멈칫했다.
“서은재?”
우뚝.
제 이름에 걸음을 멈추니, 남자가 귀신이라도 본 양 내려다봤다.
의아한 시선을 돌리던 은재는 그를 알아봤다.
“하준 오빠?”
삼현고등학교로 전학 왔을 때 3학년 전교 회장으로서 그를 처음 만났고, 여러모로 은재에게 많은 도움을 줬던 선배인 원하준이었다.
“오빠, 오랜만이네.”
의사 집안의 아들로 부친이 의성대 병원 교수였는데, 가운을 입은 거로 보아 그도 의사의 길을 걷는 모양이었다.
“하, 서은재 맞네.”
은재의 실제와 만난 하준은 묵직한 날숨을 쉬었다.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감정을 제어하며 가까이 다가가 제 눈으로 재차 확인했다.
맞다.
서은재다.
“한국에 있었어?”
“응.”
도강윤보다 먼저 보았고, 자신이 먼저 좋아했던 여자.
자신의 첫사랑을 고백하려던 때, 도강윤과 결혼하는 바람에 남모르게 실연을 안겨준 여자.
그리고.
이혼했다는 소식과 함께 홀연히 떠나 버려, 미련마저 영영 묻게 했던 여자.
그녀가 돌아왔다.
“언제 들어온 거야?”
“귀국한 지 좀 됐어.”
스물아홉 살의 서은재는 여전히 열일곱 살의 서은재처럼 눈망울이 맑았고, 스물두 살의 서은재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성숙한 고결함마저 풍겼다.
“유럽 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지냈던 거야?”
“잘.”
“내가 곤란한 질문을 했나?”
“곤란한 건 아닌데, 딱히 할 말은 없어.”
“그래, 건강하게 돌아왔으면 됐어.”
서먹한 듯한 그녀를 내려다보며 하준은 만감이 교차했다.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목울대를 바락 조여야 했다.
“오빠는 좋아 보이네?”
“매일 폐인인 일상이지 뭐. 내가 자는지 먹는지, 제대로 사는 건지 모른 채 병원의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어.”
“쿡. 오빤 여전하다.”
하준이 퀭한 눈을 끔벅이며 너스레 떨어 은재는 설핏 웃었다. 그녀의 청량한 웃음소리만으로도 하준의 기분은 달떴다.
“넌 병원엔 왜 왔어? 어디 아파?”
“…아니. 입원한 분이 계셔서.”
“아, 그럼 내가 붙잡고 있으면 안 되겠네.”
병원 로비인 탓에 간호사나 동료 의사들이 지나치며 힐끔거렸다. 하준은 공적인 공간인 만큼 일단은 제 핸드폰을 내밀었다.
“내게 연락처 줄 수 있어?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밥 한번 먹자. 오빠가 사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