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33화 (34/84)

33.

“바로요?”

“응.”

“채종훈 이사님께 연락드릴까요?”

“가면서 내가 하지.”

“예, 알겠습니다.”

슈트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강윤을 룸미러로 일별하며 호석이 시동을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어…….]

강윤은 종훈과의 통화연결을 시도했지만, 기계음만이 응답했다.

“상무님, 좀 찜찜합니다.”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자 호석이 운전하며 넌지시 주워섬겼다.

“왜?”

“회장님의 감시와는 완전히 차원이 달라요. 누군가 지속해서 상무님의 움직임을 쫓았다는 건데, 자칫 상무님께 해가 되지 않을지….”

“해를 끼치려는 목적은 아닐 거야.”

“그럼요?”

“만일 그렇다면, 진즉 내게 무력을 행사했겠지. 은재의 거처를 알려줄 필요도 없고.”

“하긴, 그러겠네요.”

호석이 수긍했다.

“분명히 다른 의도가 있어.”

“찾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상대에 따라 대처 방법도 다르겠지.”

“예.”

강윤은 그날 행사에 참석했던 초청자들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자신과 우호적인 관계일까?

그들 중 자신과 엮인 사람으로 범주를 좁히면…

과연 누굴까?

“상무님, 도착했습니다.”

여유롭게 삼현가를 빠져나와 한낮의 거리를 질주하던 세단은 어느덧 신화호텔의 위상을 나타내는 셔틀버스 정류장에 다다랐다.

골몰한 상념에 젖어 있던 강윤은 차창 너머 길고 긴 진입로를 내다봤다.

곧 웅장한 신화호텔의 외관이 나타났다. 강윤은 다시금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상대는 여전히 응답하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기다려.”

“예.”

강윤은 느슨히 풀었던 타이를 반듯하게 조이고, 호석이 정차하자마자 명쾌하게 내렸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호텔 로비로 들어선 그를 알아본 직원들이 묵례했고, 강윤은 가벼이 답례하며 곧장 프런트로 이동했다.

“어서 오세요, 상무님.”

“채종훈 이사 호출해 주십시오.”

“네, 잠시만요.”

그의 정중한 부탁에 직원이 스위트룸으로 연결을 시도했다. 채종훈의 스위트룸으로 직행하고 싶었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갖췄다.

“이사님께서는 어젯밤 늦게 귀가하셔서…… 아, 이사님.”

한참 동안 응답이 없자, 난감한 기색으로 변명하려던 직원이 갑자기 반색했다. 채종훈이 응답한 것이다.

강윤은 손짓으로 달라고 했고, 즉시 수화기가 건너왔다.

[…무슨 일 터졌어요? 설마, 아버지가 찾아요?]

저편에서 끙끙거리는 말소리가 넘어왔다. 숙취가 깨지 않은 채종훈의 하찮은 소리였다.

“나야, 도강윤.”

[응? 강윤. 웬일이야? 어? 나한테 전화했었네?]

“올라가도 돼? 난처하면 말하고.”

강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여자가 있느냐는 뜻이었다.

[어, 나 여기로 여자 데려오면 아버지한테 맞아 죽어.]

“알았다.”

채종훈의 승낙에 강윤은 주저 없이 수화기를 프런트 직원에게 돌려줬다.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 대신 가벼이 묵례하고 발길을 틀 때였다.

“어머.”

프린트로 다가오던 화려한 스타일의 중년 여성이 그를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강윤의 미간 또한 실룩했다.

그녀는 톱스타 배우인 백지연이었다. 강윤의 친모이기도 한.

“도강윤 상무님.”

다소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주위를 살핀 백지연이 격식을 차리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네요.”

처음 대면한 이래 14년 만이었다.

“도강윤 상무님 소식은 간간이 언론 보도를 통해 접했는데…. 제 소식도 들으셨죠?”

“아뇨, 전혀.”

자신의 친모인 백지연을 내려다보는 강윤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생판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당연히 민경애 여사인 줄 알고 자랐다가, 세간에 철저하게 숨겨진 친모의 존재를 파악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리고 그 친모가 다름 아닌 세상에 널리 알려진 톱스타 배우인 백지연임도.

“내가 영화 촬영차 뉴욕에서 이제 막 귀국해서 경황이 없네요.”

백지연은 손목시계를 보며 불편한 자리를 벗어날 구실을 대느라 여념 없었다.

“이 호텔엔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어서 방문했는데….”

“네, 가십시오.”

강윤은 막지 않겠다는 듯 선뜻 비켜섰고, 때마침 그들의 곁을 호텔 손님 몇이 지나쳤다.

“어머, 백지연이다.”

“같이 있는 남자는… 삼현그룹 도강윤 상무 아니야? 왜 둘이 같이 있어?”

톱스타인 그녀와 삼현그룹의 간판스타인 강윤의 대면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몰렸다. 그러자 그녀가 대외적인 가면을 썼다.

“네, 상무님. 시간 나실 때 식사 한번 해요.”

보란 듯이 목청을 높이며 살가운 고갯짓도 잊지 않았다.

“제가 정성껏 모실게요.”

“픽.”

강윤의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녀는 여전했다.

그가 제 아들임이 세상에 밝혀질까 지레 겁먹고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했다.

늘 여유롭고 체계적인 행동을 일삼는 강윤의 마음이 삐딱한 반항심이 깃들었다.

“네, 시간 되면 뵙죠.”

그는 그녀의 곁으로 한 발 성큼 뻗어 귓가에 들리도록 나직하게 읊조렸다.

“어머니.”

움찔.

파들 소스라치는 백지연의 몸체를 감지하며, 강윤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냉혹한 태도를 고수하며 돌아섰다.

“음.”

백지연의 탁한 심호흡이 어렴풋이 들렸지만, 그대로 뒤돌아보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갔다. 남모르게 갈비뼈 안쪽을 묵직한 돌덩이가 짓눌렀다.

***

“후.”

이성을 잃고서 아들한테 윽박지른 후였지만, 민경애는 분이 가시지 않았다. 자신에게 무정한 아들이 한없이 괘씸했다.

“저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삼현그룹의 3대 독자이면서 유일한 후계자인 강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혼외자였다.

불임인 민경애는 남편인 도형호와 백지연의 상간을 묵인했고, 백지연이 임신하자 그녀와 협의하여 대리모로서 아기를 낳도록 했다.

그 대가로 당시 무명 배우였던 백지연을 톱스타 반열에 올렸고, 민경애는 가짜 임산부를 연기하며 철저하게 세간의 눈을 속여 삼현그룹의 후계자를 낳았다.

그렇기에, 누가 뭐라 해도 강윤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그 수모를 참아가며 키웠건만.”

문제는 영민한 아들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즈음, 어떠한 경로로 눈치챘는지 남모르게 제 출생의 비밀을 추적한 강윤은 백지연과도 대면하여 확증을 얻었고, 용의주도하게 친자 확인을 하며 친모 백지연을 밝혀냈다.

“그때부터였나.”

오롯이 삼현그룹의 후계자로 커가며, 사춘기도 무던히 넘겼던 아들은 완전히 변한 건 그 이후였다. 세상사에 무관심했으며 민경애 여사와도 격을 뒀다.

“아니야, 서은재 때문이야.”

민경애로선 세상에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아들의 일탈에 전전긍긍하던 때에 강윤은 서은재를 만났다.

단순히 반항일 거라 판단했던 아들의 로맨스는 예상 범주에 벗어날 만큼 뜨거웠다.

하지만 도형호는 더없이 비정했는데, 철없이 사춘기를 겪는다며 아들을 사육하듯 가둬놨다가 유학을 보내 버렸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은 지독히 냉랭해져 있었다.

민경애는 그 모든 책임을 서은재에게 전가하며 미워했다.

“걜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화로웠을 텐데…….”

오늘날까지도.

“안 비서.”

상념을 떨친 그녀는 기품 넘치는 진주 귀걸이를 차고서 핸드폰을 들었다.

“회장님 병원에 가야겠으니, 차 대기해.”

***

신화호텔 기획이사지만, 세상 한량인 채종훈이었다. 출퇴근을 위한 거리 이동마저 귀찮아서, 아버지에게 졸라 호텔 스위트룸에서 기거하는 녀석은 침대에 드러누워 VR 게임을 하다가 강윤을 맞이했다.

그래도 당당히 CCTV 자료를 요구하는 강윤의 명령 같은 부탁을 군소리 없이 들어줬다.

강윤을 무조건 신봉하는 그이기에 직접 보안팀으로 출동하여 손수 구해오기도 했다.

“알지? 우리 호텔의 보안 CCTV다. 어떤 인사가 잡혔든 비밀엄수 잊지 마.”

“모를 리 없지.”

“설령, 우리 아버지가 보이더라도 내게 전하지 말아줘.”

“그러지.”

망언을 주절거리는 친구에게 강윤은 무덤덤하게 끄덕였다. 그의 의중을 꿰뚫은 채종훈이 괜히 섭섭하다는 듯 ‘나쁜 놈’ 하고 구시렁거렸다.

“어쨌든, 고맙다.”

“뭘 볼 건데?”

인사는 하며 호텔 주차장으로 향하려는 강윤을 채종훈이 굳이 졸졸 쫓아오며 의문을 제기했다.

“글쎄. 보여야 보지?”

“무정한 새끼.”

강윤의 능구렁이 같은 처세에 채종훈의 입술이 잘근거렸다. 강윤은 너스레를 떨 듯 친구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나중에 말해줄게.”

“약속 반드시 지켜라.”

“그래.”

짧은 미소로도 구슬리기 쉬운 채종훈이었다. 금세 헤벌쭉한 녀석이 그제야 강윤을 놔줬다.

“참, 어제는 미처 말 못 했는데, 서은재와 재결합 축하해.”

돌아서려다 말고 채종훈이 엉큼한 미소로 고갯짓했다.

“난 서은재 좋아.”

한쪽 눈을 찡긋하며.

“네가 왜 좋아?”

우뚝, 멈춘 강윤의 미간이 구겨졌다. 부라리는 눈동자에 얼핏 살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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