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도강윤이 결혼한다면…….’
도강윤의 재혼을, 도강윤이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음을 왜 여태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
‘왜 심장이 저릿해.’
은재는 민서에게 들키지 않으려 동요하는 제 마음을 붙들었다.
“그것도 일종의 허언증이지? 솔직히 도강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응?’
“임현서가 암만 들이대 봐라. 도강윤은 눈길도 안 줘. 지나가는 똥개도 그보단 관심 두겠다.”
저린 감정과 의문이 교차했다. 은재는 민서의 빈정거림이 이해되지 않았다.
“민서야.”
되물으려는 찰나.
“김민서 대표님, 오랜만에 뵙네요?”
“어머, 안녕하세요. 은재야, 잠깐만.”
훤칠한 남자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민서가 콧소리로 인사하더니, ‘먼젓번에 맞선 봤던 남자’라고 귓속말하고서, 남자와 저만치로 갔다.
‘어째서?’
혼자 남은 은재는 복잡한 의문에 휩싸였다.
‘도강윤이 왜 임현서를 그리 대하지?’
파티 중에도 침대에서 뒹굴 정도로 뜨거웠던 관계였잖아.
또한.
“우리, 유학하는 동안 동거했었어.”
도강윤과의 결혼 소식으로 세간이 떠들썩해진 후, 은재를 찾아왔던 현서로부터 직접 들었던 말이다. 당당히 사진도 내보였는데…….
‘아, 그 사진…….’
헐벗은 채 침대에 누워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세밀히 보지 않았다. 증거품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심장이 바들바들 떨려서.
‘제대로 봤어야 했나?’
은재는 비로소 깨달았다.
현장을 목격했다는 것만으로 그저 그를 냉대했지, 당사자에게 그들의 관계를 물은 적도, 들은 적도 없음을.
“피곤해?”
당사자가 그녀에게 왔다.
은재는 제 망막을 채우는 도강윤을 빤히 올려다봤다.
“집에 갈까?”
“찬바람 먼저 쐬고 싶어.”
“이쪽으로 와.”
강윤이 테라스로 이끌었다.
울긋불긋한 꽃이 핀 야경의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테라스에서 은재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폐 속에 담았다.
“힘들었어?”
“아니.”
강윤이 느긋하게 난간에 기댄 채 바라봤다. 사뭇 다정한 남자의 눈빛에 은재는 갈등했다.
“도강윤.”
묻고 싶다.
“응?”
“나하고 왜 결혼하고 싶었어?”
임현서가 아닌 왜 나와.
“정작, 내가 이율 모르더라고.”
“픽.”
도강윤의 한쪽 입술이 비뚤어졌다.
“서은재는 모르는 게 많지.”
어렴풋한 조소 같기도 했고, 공허한 실소 같기도 했다.
“한 발 닿은 듯하면 두 발 물러나고.”
쓱.
“영영 외면할 듯하다가 내 눈을 또 사로잡고… 애써 다가가면, 냉담히 차단하지.”
그의 팔이 허공으로 올라왔다.
“그렇게 내 애간장을 태웠으면서…….”
큰 손으로 사뿐히 정수리를 덮고서 눈길을 내렸다.
“내가 왜 본인과 결혼한 지도 모르지.”
“…….”
“어려운 여자야.”
정적처럼 멈춰 버린 은재를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가늘게 길어졌다.
희미하게 여울지는 동공에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울컥.
은재는 알다가도 모를 감정에 휩싸였다.
왜인지 심장에 촉촉한 기운이 번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때였다.
“호호호. 제 말이 맞죠?”
“그러니까요.”
테라스로 소프라노 웃음소리와 함께 사모님들이 넘어왔다.
“눈썰미가 대단하세요.”
은재는 타인의 눈에 자신들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탁.
그의 팔뚝을 잡아 테라스 가장자리를 차지한 나무 뒤로 들어갔다.
그녀의 의중을 간파한 강윤이 자신의 단단하고 길쭉한 몸으로 방어벽을 세우듯 앞에 섰다.
“뭐가 맞아요?”
“글쎄, 저번에 임 여사님이 FG 스카이라운지에 식사하러 갔다가….”
그녀들이 테라스 난간까지 왔다.
“삼현 아드님이 여자하고 데이트하는 걸 봤는데, 아무래도 전 부인 같다면서….”
여차하면 들킬 수 있는 상황이라, 강윤이 성큼 한 발짝 움직였다.
크고 풍성한 나무 뒤의 공간이 비좁은 탓에 두 사람은 거의 밀착하듯이 마주 섰다.
“…둘이 재결합할 모양이라고 했거든요.”
“어떻게 아셨어요?”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를 하는데 분위기가 야릇하더라고요.”
나무의 거뭇한 음영이 두 사람을 완벽히 은폐했고, 붙듯이 선 그들은 숨죽인 채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왜 있잖아요. 남녀의 그 미묘하게 끈적거리는….”
그녀의 말이 내레이션처럼 들려왔다.
은밀하게 서로의 눈을 교환하는 그들에게서 미묘하고 끈적이는 기류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좁은 틈새로 팽팽한 긴장감이 소용돌이쳤다.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까맣다 못해 검푸른 동공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고, 그의 탄탄한 몸에서 발산되는 열기와 갈망은 은재의 심장에 잔재했던 감정이 자극했다.
‘나는 왜 이 남자를 매번 비뚤게 보았을까.’
은재의 손이 공기를 타고 올라갔다.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제 앞의 남자가.
실재하지 않는 환상 같아서.
그의 뺨을 애무하듯 손끝으로 스르륵 어루만졌다.
덥석.
그 손길이 신호처럼, 도강윤의 큰 손이 은재의 목덜미를 억세게 움켜쥐며 거침없이 끌어당겼다. 그러고서 주저하지 않은 채 은재의 입술을 삼키듯 머금었다.
기다렸다는 듯 은재도 고개를 뒤로 젖혔다.
괴로운 신음을 토해내듯 깊은숨을 몰아쉰 그의 입술이 거칠다시피 은재의 입술을 벌리며, 잠시의 멈춤도 없이 뜨거운 혀를 밀어 넣었다.
삽시간에 자극적인 혀가 은재의 혀를 어루만지며 격정적으로 옭아매며 빨았다.
동시에 큰 손으로 은재의 풍성한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며 그녀의 머리를 단단히 움켜쥐었고, 다른 팔로는 그녀의 허리를 휘감듯이 와락 끌어당겼다.
자신의 복부에 단단히 붙들어둔 채 맹렬한 키스로 짙은 키스를 퍼부었다.
화염 같은 열기가 온전히 서로의 숨결에 섞였다. 도강윤은 마치 집어삼키듯 은재의 숨결과 타액을 빨아들였다.
처음이었다.
서은재가 허락하고, 서은재가 받아들이고, 서은재도 원하는 키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던 견고한 벽이 무너지듯 서로가 진정으로 원하여 나누는 첫 키스였다.
간절히 원했서일까?
아님 그의 맹렬한 성향 탓일까?
도강윤의 키스는 형용할 수 없이 전투적이었다. 막강한 공격력과 세밀한 결을 겸비하여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기세로 은재의 입안을 휩쓸었다.
시작한 이상 끝을 보겠다는 집념마저 있었다.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입안의 타액을 꿀떡꿀떡 넘기면서 혀뿌리를 갈취했다가, 빙그르르 돌려 묶어 빨아대길 반복하는 키스가 숨 막힐 정도로 저돌적이었고 집요했다.
‘아…….’
은재는 펄떡거리는 심장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이성을 차릴 새도 없이, 노련하게 움직이는 혀의 놀림과 달콤한 꿀처럼 다디달게 느껴지는 숨결에 송두리째 사로잡혀 버렸다.
미열마저 오르는 기분이었다.
“하…….”
슬쩍 벌어진 잇새에서 야릇한 신음성이 새어 나올 뻔했다.
자칫 그들의 은밀한 밀어가 들통날 위기였다.
이 고목 너머에서 아직도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데 말이다.
불끈.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은 도강윤의 팔뚝에 힘주어 바짝 당기며, 숨소리까지 먹어치울 요량으로 제 입술을 더더욱 크게 벌려 아예 은재의 입술을 삼켜 버렸다.
“…….”
테라스의 수다 소리, 도시의 소음이 귓가에서 아스라이 퇴각했다.
강윤과 은재는 오직 서로에게만 몰입했다.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애달프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듯 격렬히 탐하고 또 탐했다.
짙은 키스가 더할수록 강윤의 갈증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못 견디겠다는 듯 그의 탄탄한 몸체가 밀고 들어왔고, 그의 힘에 밀려 은재는 한 발 뒷걸음질 쳤다.
그 바람에 차디찬 석벽에 등이 닿았다.
파들.
드레스 원단이 없는 등마루에 냉기가 퍼져, 은재는 무심코 떨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강윤의 혀가 놀림을 멈췄다.
떨어지긴 아쉽다는 듯 천천히 핥다가, 아랫입술을 짤막한 입맞춤처럼 물고 떼었다.
쪽.
이윽고 약한 소음을 흩뿌리며 두 입술이 떨어졌다. 그러자 몸체는 그 상태로 멈췄다.
“…….”
옅고 거친 숨결이 좁은 간격에서 역류했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그들은 가쁜 호흡만을 밀어내며 서로의 들썩이는 가슴팍과 심장의 헐떡거림을 공유했다.
테라스에 정적이 감돌았다.
수다스러운 사모님들이 어느 틈에 연회장으로 나갔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강윤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여졌다. 그의 입술이 귓가로 옮겨졌다.
“…갈까?”
화기를 머금은 속삭임이 귓속을 자극적으로 건드렸다. 은재는 무의식중 호흡을 정지했다.
말을 할 수 없었다.
진이 빠진 듯 목구멍으로 숨을 불어넣는 것조차 버거워, 그에게서 풍기는 짙은 페로몬에 온몸이 흐느적거렸다.
끄덕끄덕.
맥없이 고갯짓만 했다.
강윤의 큰 손이 은재의 손을 거머쥐었다. 나무 뒤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그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곧장 연회장을 떠났다.
성큼성큼.
은재의 손을 꽉 그러쥔 남자의 발걸음이 여느 때와 달리 성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