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28화 (29/84)

28.

“……삼현은 나아갈 겁니다.”

민경애는 무대 위의 아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상이 아닌 실현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와 상생하겠습니다.”

한껏 우쭐했다.

“아울러, 내일의 세상을 이롭게 하도록 사회적 기업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자신이 키운 삼현의 차기 주자는 연회장의 분위기를 압도하며 VVIP들의 이목을 장악했다.

“감사합니다. 도강윤이었습니다.”

강윤이 정중한 묵례와 함께 프로젝트 연설을 마쳤다. 숨죽이고 집중하던 초청객들이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도강윤 상무님.”

사회자로 초청받은 유명 MC 윤재석이 무대로 올라왔다.

“삼현의 최고 비주얼만 담당하시는 줄 알았는데, 어쩜 저렇게 뇌도 섹시하죠? 동의하십니까?”

좌중이 ‘네!’ 하며 공감 어린 웃음소리를 내었다.

“다음은, 이번 삼현의 상생협력 프로젝트 리브(live)에 참여해 주신 작가님을 소개해 드릴 텐데요.”

윤재석이 한 발 물러나며 스크린을 가리켰다.

“이분은 공식 석상은커녕 정체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분이죠. 저도 무척 좋아하는 작가님이라, 이분을 뵙는 오늘 밤이 굉장히 설렙니다. 대체 어떤 분인지 보실까요?”

윤재석의 손짓에 따라 스크린 화면에 작품 사진이 떠올랐다. 일순 연회장이 술렁였다.

“어머, 미도 작가네?”

“미도 작가가 참여하는 거야? 미도 작가 사진 너무 좋잖아. 나도 저 책 열 권이나 사서 여기저기 선물했다니까.”

“역시 도강윤 상무네. 정체불명의 미도 작가를 섭외하다니…….”

한자리에 동석한 영은과 성미가 흥분한 어조로 감탄했다. 잠자코 듣던 민경애는 호기심이 일었다.

“아는 작가야?”

“작년에 유럽권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까지 SNS를 뜨겁게 달군 사진 작품집이 있어. 그 작품의 사진작가래.”

“경애 너는 미도 작가 모르니? 너는 미술품 애호가면서 사진엔 문외한이구나?”

성미가 친절히 설명하고 영은이 넌지시 빈정거렸지만, 민경애는 무시했다.

“SNS는 관심 없어서 몰랐네.”

그렇게 뛰어난 유럽 작가를 포섭하다니…….

‘우리 아들이니 가능하지.’

월등한 아들을 가진 자의 뻐기는 미소를 장착한 채 그녀는 스크린 속 사진을 감상했다.

‘사진이 좋긴 하네.’

살아가는 사람, 사람의 숨결이 온전히 담긴 사진은 그야말로 ‘상생’이었다.

더불어 구도며 색감이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들어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세련됐다.

“어렵게 모셨습니다! 미도 작가님, 어서 오세요!”

스크린 소개가 끝나자 윤재석이 우렁차게 외쳤다.

이윽고 미도 작가가 등장했다.

품격 넘치는 드레스 자락을 하늘거리며 나타난 눈부신 미모의 여성을 손님들은 일제히 기립하며 환영했다.

한편.

민경애의 안색은 시퍼렇게 죽었다.

***

‘저 남자가 곧 내 거라니.’

강윤의 멋진 모습에 현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상견례가 끝나면 만천하에 떠벌릴 거야.’

오롯이 자신에게만 눈길을 둔 박재민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도강윤의 대체일 뿐이니.

‘내가 도강윤의 여자라고.’

현서는 핸드폰 카메라로 무대 위의 강윤을 배경으로 두고 셀카를 찍었다. 그런 후, MC 윤재석은 관심 없기에 자신의 SNS로 사진 업로드를 준비했다.

“어렵게 모셨습니다!”

무대의 여자를 무심코 일별하며.

“미도 작가님, 어서 오세요!”

“……!”

여자의 얼굴은 알아본 현서는 얼어붙었다. 주위의 친구들은 물론이거니와 채종훈은 입안에 담고 있던 와인까지 질질 흘렸다.

“어머!”

“허! 서은재 아니야?”

“누구?”

“왜 있잖아. 도강윤하고 이혼한.”

어떻게…….

왜…….

서은재가, 저기 있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미도 작가님.”

“감사합니다.”

“많은 분이 작가님을 애타게 궁금해하셨는데요. 직접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윤재석의 마이크가 그녀에게 넘어갔다.

“네.”

약간 수줍은 듯 웃고 있지만, 당찬 눈빛은 어김없이 서은재였다.

“반갑습니다. 저는 미도 작가로 알려진, 서은재입니다.”

허.

폭탄테러에 당한 양 현서는 귀가 멍했다. 웅성웅성한 주위의 소음도, 무대의 마이크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왜지? 왜…….’

현실 같지 않은 상황이었다.

도강윤이 주최한 행사에, 도강윤이 기획한 프로젝트에 왜 서은재가 있는지…….

‘도강윤….’

현서는 얼빠진 눈길로 도강윤을 찾았다.

‘아…….’

강윤은 무대의 끝에 있었다. 오롯이 서은재에게만 초점을 둔 채.

지끈.

현서의 관자놀이에 극심한 편두통이 일었다.

“도강윤 상무님도 모시겠습니다.”

윤재석의 호출에 강윤이 시원시원한 태도로 중심에 섰다.

“상무님, 서은재 작가님이 상생 프로젝트에 참여하신 데는, 두 분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라면서요?”

“네, 맞습니다.”

강윤이 서은재와 묘한 눈길을 교환했다. 그러곤 한 치의 주저 없이 밝혔다.

“서은재 작가님과 저는 한때 서로의 법적 보호자였고, 오랜 기간 친구로 서로를 응원했습니다.”

“오! 아메리칸 스타일!”

다소 어수선한 수군거림이 발생했다. 윤재석의 노련한 농담으로 좌중의 집중도를 높였다.

“그리고 현재.”

강윤 또한 한숨 끊으며 긴장감을 조성했다.

이어, 한없이 그윽한 눈빛으로 서은재를 바라보며 씩― 매력적으로 웃었다.

“연인으로, 좋은 만남을 시작했습니다.”

툭.

현서의 핸드폰이 무기력하게 낙하했다.

***

“최고의 반전이었다.”

강윤과 은재의 공식 연인 선포를 마지막으로 발표회가 종료되고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자, 건우건설 임 회장 내외와 임현서는 연회장을 떠났고, 삼현그룹의 총수인 도형호 회장은 아들에게 접근했다.

“프로젝트 초청작가가 서은재였다니…….”

평온한 표정을 가장했지만, 눈빛만큼은 살벌했다.

“네가 내게 도전하려 단단히 작정했구나.”

목소리도 음습했다.

“미도 작가라는 눈속임으로 나의 결재를 유도하며, 감히 잔재주를 부려?”

“눈속임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미도 작가인 건 확실하니까요.”

강윤은 의연히 아버지의 힐난을 흡수했다.

“애초에 너의 작전이었느냐?”

“작전이요?”

“서은재를 유럽으로 보내 사진작가로 키우고, 그 아이의 인지도를 형성한 후 적당한 시기에 불러드릴 작전.”

“절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제가 그 정도의 혜안을 가지고 있진 않아요.”

강윤은 천연덕스레 반격했다. 아버지로부터 빠드득, 어렴풋이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 회장님! 아주 부럽습니다.”

첨예한 부자의 곁으로 정치권 인사가 다가왔다. 그를 필두로 몇몇 인사들이 얼씨구나 몰려들었다.

“이렇게 훌륭한 아드님을 두어서 든든하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의원님.”

도형호의 표정이 금세 대외적으로 바뀌었다.

잠시 후 도형호는 각계각층 인사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며 연회장 밖으로 이동하고, 한발 물러나 있던 민경애 여사도 기품 있게 뒤를 따랐다.

강윤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쏘고서.

‘일단락은 되었으니.’

부모의 압박을 바윗덩이처럼 뒷골을 눌렀지만, 강윤은 냉정했다.

힐끗.

경망스러운 김민서에게 잡힌 은재를 곁눈질하며, 거듭 결의를 다졌다.

‘너만 다시 얻을 수 있다면….’

후사도 두렵지 않다.

“개자식.”

쓸데없이 심기 불편한 남자가 한 명 더 있었으니, 그 이름 채종훈이었다.

“나까지도 속이고……. 내 파티에서도 아내 데리러 간다고 사라지더니, 이젠 아예 등신 취급이냐?”

“네 덕분에 무사히 끝냈어. 고맙다.”

“입술에 침이나 발라, 개놈아!”

툴툴거리는 채종훈의 입에서 진한 와인 냄새가 진동했다. 잠깐 사이 술을 들이부은 모양이다.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주지! 박재민 새끼는 미도 작가가 서은재인 걸 알았던데……. 나 진짜 서운하다.”

“박재민이?”

“그래! 난 네가 항상 1순위인데, 넌 왜 매번 박재민이 우선이냐? 나 진짜 서운하다.”

“친구 사이에 순위가 어디 있어.”

강윤은 침울한 친구를 대충 달래고, 연회장 인파를 치밀히 훑었다. 동기 무리에 있던 박재민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

“임현서 표정 봤어?”

발표회 행사가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가자마자, 민서가 득달같이 다가왔다. 미도 작가에게 관심 어린 시선도 끊임없이 왔다.

“오자마자 무대 뒤에서 대기하느라 왔는지도 몰랐어.”

“네가 멋지게 등장할 때, 그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완전히 벙하더라.”

“그래?”

은재는 무심히 대응했다.

무대에서 상석의 도형호 회장과 민경애 여사의 살벌한 눈초리를 견뎌낸 후라 긴장감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얄미운 거한테 한 방 먹인 거 같아서 대박 고소했어.”

“넌 왜 그리 임현서를 싫어해?”

“일단 재수가 없어. 공주님도 그런 공주님이 없잖아.”

민서가 질색했다.

“거기다, 도강윤을 제 남자로 착각하고 살잖아. 너랑 도강윤하고 결혼했을 때도 난리 폈잖아. 널 화냥년 취급하며.”

자기 남자가 맞았으니 그러겠지.

“네가 떠난 후에는 더하게 꼴 보기 싫었어. 도강윤과 결혼하겠다고 오만 지랄발광을 떨었다니까.”

‘결혼?’

심장이 철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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