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샤워를 마치고, 목욕가운을 걸친 은재가 드레스룸으로 들어섰다.
부담스러운 선물인데다 얼마간의 시간을 보낼지 모르기에 외면했지만, 임현서 같은 인간한테 위자료 떨어졌냐는 소리나 들을 바엔 차라리 입는 게 나았다.
“오늘은 가볍게 이 정도.”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옷 중 바지 정장 세트를 꺼냈다.
가뿐히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니 청바지를 벗은 자신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세련된 디자인의 흰색 정장은 168㎝의 늘씬한 몸매에 멋스럽게 밀착되었고, 투명할 정도로 말간 은재의 피부를 화사하게 빛냈다.
“오랜만에 입으니, 어색하네.”
괜히 머쓱해서 얼른 거울 앞에서 떨어져, 어울릴 만한 클러치백을 골라서 들 때였다.
툭.
가방들 사이에 껴 있던 작은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이런 건 없었는데?”
은재는 상자를 집어 뚜껑을 개봉했다.
결혼생활 중 그녀가 즐겨 착용했던 물방울 목걸이와 비슷한 느낌의 목걸이가 담겨 있었다.
간단한 메모와 함께.
―애인의 3호 선물
“아, 이 남자.”
뜨끈한 전율이 온몸에 감돌았다.
“이건, 감동이잖아.”
알면 알수록 기이한 도강윤이다.
늘 무심하게 굴었으면서, 자신이 좋아하던 디자인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렇게 갖다 논 건지….
새삼 자신이 그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 같아, 은재는 들뜬 기분을 가다듬으며 거울 반대편의 자신과 대치했다.
휑한 목덜미를 한 여자가 ‘어서 차라’고 종용하듯 실눈을 떴다.
“목걸이쯤이야 할 수 있지.”
은재는 물방울 목걸이를 들어 허전한 목에 채웠다. 조명에 반사되는 목걸이가 점멸하는 등처럼 반짝였다.
“센스 있긴.”
저도 모르게 입매를 싱그레 늘리다가, 속없이 헤벌린다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흥흥.”
괜스레 콧소리를 내며 은재는 드레스룸을 사뿐사뿐 나왔다.
무의식의 손끝은 목걸이를 쓰다듬듯 매만졌다.
***
“작가님, 한국판 포토에세이 표지 나왔어요. 디자인 어때요?”
“좋아. 예쁘네.”
출판사로 호출한 민서가 표지 시안을 내보였다. 은재의 사진으로 흑백 효과를 준 표지가 깔끔하니 세련되었다.
“작가 이름은 이대로 필명을 쓸 거야?”
“왜?”
“미도 작가가 서은재인 걸 밝히는 건 어떨까 싶어서.”
귀신 같은 민서다.
오늘 밤 공식적으로 밝힐 계획을―도강윤과 둘만의 극비 사안인데―꿰뚫어 본 듯한 친구의 말에 은재는 은연중 오소소 떨었다.
“하긴. 네 정체를 밝히면 신상 털리고 한바탕 야단법석이겠지. 삼현그룹 현 상무이사의 아내였던 데다, ㈜정진의…….”
얼결에 아버지 얘길 꺼낼 뻔한 민서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너 그거 모르지?”
“뭐?”
그러곤 화제를 전환했다.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은재는 사뭇 담담히 그녀를 좇았다.
“오늘 밤에 삼현에서 프로젝트 발표회를 연다더라.”
민서가 책상을 뒤적이며 부연했다.
“주최자는 도강윤인데, 장소가 신화호텔인 걸 보니 파티 구상은 채종훈이 했겠지. 아마, 끔찍할 정도로 화려할 거야.”
‘그렇다더라.’
“어떤 프로젝트를 내세우려고 이리 유난인지…. 다들 도강윤이니 무조건 열광하는 분위기지만.”
‘네 앞의 친구를 내세우려고 유난인 거야.’
은재는 속말을 꾹꾹 참았다.
“이거.”
“뭔데?”
책상에서 돌아선 민서가 카드 봉투를 건넸다.
‘헉.’
내용물을 확인한 은재는 내심 기겁했다. 삼현에서 발송한 VIP 초대장이었다.
“너도 초대받았어?”
“나름 VIP니까?”
“갈 거야?”
“당연하지. 이 초대장 받은 VIP 몇 안 돼. 보나마나 임현서도 올 거고, 그러면 내가 더더욱 빠질 수야 없지.”
하.
지금 자백하고 맞아 죽는 게 나을까.
이따 현장에서 즉사 당하는 게 나을까.
“왜? 도강윤이 주최하는 거니 가지 말까? 네가 싫다면 구태여 안 가도 돼.”
정적을 민서가 잘못 해석했다. 지레 찔린 은재는 자진해서 제 등짝을 내놨다.
“민서야, 이실직고할게.”
몇 분 후.
퍽, 퍽!
은재는 강력한 손바닥에 두 대나 등짝을 후려 맞았는데, 민서는 그마저도 분이 안 풀리는지 연신 뜨거운 콧김을 불었다.
“더 해도 돼.”
“닥쳐. 시멘트 처발라서 바닷물에 담그기 전에.”
“어. 닥칠게.”
아무래도 민서는 출판사 대표가 아니라 사채업 대표를 했어야.
띠― 띠―
하필, 문제의 남자로부터 메시지도 도착했고.
하필, 테이블에다 놔뒀던 핸드폰에 선명한 이름 세 글자가 떠올랐다.
―도강윤
그나마 하트하트는 지워서 다행이다.
“오호라, 도강윤!”
일순 민서가 파리 잡아먹는 황소개구리처럼 날름 낚아챘다.
“서은재, 오후 5시까지 와. 기다릴게.”
또박또박 메시지를 읽은 민서가 진저리쳤다.
“와, 닭살 돋았어! 도강윤이 기다린다고? 이렇게 다정한 놈이었어?”
은재는 자포자기했다.
그저 먼 산을 보며 딴청 피웠다.
“허!”
이어 첨부된 주소를 확인한 민서의 콧구멍이 커졌다.
“이야, 상위 1% 전용 의상실에서 만나자는 거네? 도강윤이 근사한 드레스를 준비했나 보다. 좋겠다, 친구야.”
“…….”
“나도 같이 갈래. 삼현 상무님께선 두 벌쯤은 거뜬할 거잖아? 그렇지, 친구야?”
“안 돼.”
은재는 퍼뜩, 일축했다.
“왜?”
“도강윤이 너 무섭대.”
“허!”
***
사락사락.
은재는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드러난 어깨선과 잇닿은 시폰 자락이 하늘거렸다.
“세상에나! 아름다워라.”
은은한 베이지 핑크빛의 오픈 숄더 드레스를 입은 은재의 시선이 자신의 목덜미에 머물렀다.
‘이래서 목걸이를.’
강윤이 오전에 깜짝 선물했던 목걸이가 은재의 고결한 목선과 쇄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 드레스가 심하게 여신 스타일이라 다들 부담스러워하는데, 사모님의 드레스 소화력은 변함없이 완벽하네요.”
“저도 부담스러운데요?”
의상실 원장의 극찬 연발에 은재는 난감했다. 그러나 흥분한 그녀의 귀엔 스쳐 가는 동풍일 뿐이었다.
“상무님께서 직접 방문해서 이 드레스를 초이스하셨는데, 상무님 안목도 대단하시죠?”
오후 5시에 의상실로 오라더니, 막상 본인은 감감무소식인 강윤이었다.
그런데 이런 수고까지 했다니.
“정말 눈부시게 우아하세요, 사모님.”
“야해요.”
“이만큼의 노출이 뭐가 야해요. 근데 사모님 볼륨이 워낙 탁월해서 야하긴 하네요. 호호호.”
“아무래도 벗어야겠어요.”
돌아서는 은재의 앞을 원장이 강경히 막았다.
“상무님께서 특별 지시하셨어요. 모두가 사모님을 주목하도록 만들라고.”
“…….”
“절 믿고 맡겨주세요, 사모님.”
6년 만에 만난 의상실 원장 또한 은재의 사생활을 알고 있었다. 알랑거리는 듯해도 치밀하고 속 깊은 사람이었다.
“알겠어요. 근데 사모님 소린 그만하세요.”
“한 번 사모님은 영원한 사모님이죠. 더구나….”
그녀가 은근히 물었다.
“상무님과 재결합하실 거잖아요?”
은재는 침묵했다.
공식 연인 선언 예정이라 섣부른 언사는 할 수 없었다.
“저는 두 분이 다시 만날 줄 알았어요.”
“어떻게요?”
“제가 40년 동안 모셨던 부부 중 두 분처럼 그림 같은 부부는 못 뵀죠. 웨딩드레스 맞추던 날부터 필연인 줄 알았어요.”
빙그레 웃은 그녀가 귓속말로 덧붙였다.
“입 단속할 테니, 마음은 놓으세요.”
“고마워요.”
필연이라…….
은재는 의례적인 인사로 화제를 차단했다. 아첨이라고 단정하며.
***
[이 천하 태평한 놈아, 주최자가 아직도 도착 안 하면 어떡하냐?]
“네가 있잖아.”
강윤은 전화로 투덜거리는 채종훈에게 건성으로 대꾸하며, 의상실의 출입구로 들어섰다.
[도강윤이 날 믿어?]
“내가 채종훈을 아주 많이 신뢰하지.”
[왜 이래? 설레게.]
뚝.
강윤은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 그러곤 핸드폰을 슈트 재킷 안주머니에 넣는데, 아치형 계단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심히 눈길을 돌렸다.
순간.
“아…….”
강윤의 넋이 나갔다.
실루엣 같은 시폰 드레스 자락을 사부작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은재의 모습은 흡사 인간을 홀리는 여신 같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워서.
“왔어?”
“…응.”
제대로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좀… 과하지 않아?”
강렬한 그의 눈빛에 쑥스러운 듯 은재가 고개를 기울였다. 긴장한 기색도 역력했다.
“전혀.”
강윤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뭇 장난기 서리게 찡긋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군. 출격 준비는 됐어?”
“완벽히.”
긴장이 조금이나마 완화됐는지 은재가 그제야 웃었다.
싱긋, 웃는 그녀에게 강윤은 팔을 내밀었다.
“갈까?”
“응.”
그녀의 손이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매니저가 출입문을 활짝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