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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널 원해-25화 (26/84)

25.

은재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진 속 도강윤에만 시선을 붙박아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병원 로비에서 기다릴게.

그때 그녀를 채질하듯 딩동, 하며 도강윤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길 잃어버리지 말고 와.

울컥.

‘가’라는 말이 아닌 ‘와’라는 단어에 시큰한 무언가가 치밀었다.

“나쁜 놈아, 안 가.”

공연히 구시렁거리는데, 사철나무 화단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음과 함께,

“그럴 줄 알고 내가 왔어.”

라며 강윤이 나타났다.

“앗.”

깜짝 놀란 은재는 얼른 사진을 숨기고서, 새치름하게 핸드폰을 내 보였다.

“이건 페이크야?”

“로비로 가려던 중이야.”

태연히 응수한 강윤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알게 모르게 은재의 가슴골에 뜨끈한 기류가 올라왔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도강윤의 등장만으로도, 제 옆자리의 기운만으로도 안심하다니.

***

은재의 투명할 정도로 맑은 뺨이 물든 것처럼 붉은 기가 감돌았다. 강윤은 못내 미안했다.

“왜 말 안 했어?”

저도 모르게 그녀의 뺨에 손을 댔다.

“…….”

흠칫, 놀란 듯 은재가 고개를 돌리며 피했다. 그러더니 건조한 눈초리를 내리깔았다. 그녀를 강윤은 땅을 지키는 고목처럼 묵묵히 기다렸다.

“내가 간과한 게 있어.”

몇 분 후에야 은재가 침묵을 깼다.

“6년 전 이혼할 때, 도강윤과 같이 살 수 없었던 사유가 분명했는데…….”

그걸 왜 잊고 ‘이 수렁에 뛰어들었나?’ 하는 회한이었다.

“우린 단순한 게 단 하나도 없었잖아. 헤아리기조차 버거울 만큼 복잡했어.”

“…….”

“처음부터 어긋났던 관계였고.”

“어폐가 있어.”

잠깐 강윤이 반박했다.

“적어도 처음부턴 아니었지.”

“……?”

은재는 이해 못 하는 듯했으나 강윤은 확신했다.

적어도 자신들이 처음 만났던 때만큼 서로에게 호감 이상이 있었으므로.

“묻고 싶은 게 있어.”

은재는 의문에 파고들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말해.”

“왜 나와의 결혼을 막지 않았어?”

강윤의 눈썹이 꿈틀했다.

‘내 전략이었으니까.’

뇌론 대답했지만, 그는 자신과 은재와의 관계에서 불리한 언사는 내뱉지 않았다.

“나는 우리의 결혼이 진짜 실행될 줄은 몰랐어. 당연히 도강윤이 깽판 칠 줄 알았거든.”

답을 종용하지 않고 은재가 털어놨다. 강윤은 실소하듯 픽, 웃었다.

“그걸 바랐어? 내가 엎어버리길?”

“조금은.”

그녀로선 자신의 결정권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삼현그룹의 혼사에 목매단 것은 그녀의 아버지 서정탁이었으니.

서정탁은 도성만 회장으로부터 혼사를 제의받자마자 기사화하여 여론몰이에 나섰다. 기필코 정략결혼을 성사하겠다는 의지였다.

그 바람에 건우건설과의 혼담을 진행하며 그들의 결혼을 반대하던 강윤의 부모님은 마지못해 승낙했다.

“되짚어보면, 우리 결혼에 의문점이 많아.”

“…….”

“삼현의 회장님이 나를 어떻게 알아서 손자와의 혼사를 제의했을까? 더구나 나는 하청기업의 딸밖에 안 되잖아.”

‘어떻게 알긴. 손자 때문에 알았지.’

마음으로만 대답하는데, 은재의 초점이 그에게로 완전히 돌아왔다.

“할아버지가 결혼을 추진해서 거부 못 한 거야?”

“…그런 점도 없진 않지?”

강윤은 진실을 밝히는 데 망설였다.

‘알면, 날 미워하겠지?’

열아홉 살부터 변함없는 감정을 드러내고 싶다가도, 은재가 집착이라고 진저리칠 듯해서 두려웠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결혼생활 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점이 그거였으니.

서은재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

“근데…….”

나직한 읊조림에 은재의 눈길이 옮겨왔다. 강윤도 자신의 첫사랑을 바라봤다.

“내가 하고 싶었어.”

설핏 웃으며.

“너하고 결혼.”

“건우건설 임현서와 결혼해라.”

스물네 살의 강윤은 어렸다.

아무리 독보적인 아우라와 영민한 두뇌를 가졌다고 한들, 냉혹한 도형호의 아들로서 상대적 약자였다.

삼현그룹 3대 독자로 태어나 경영 후계자의 플랜대로 살아야 했으며, 아버지가 지정한 범주에서 벗어날 수도, 일말의 일탈도 허용되지 않았다.

열아홉 살의 짧은 일탈의 결과는 쫓겨나듯 유학에 떠난 거였고, 돌아와서는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내달 약혼식을 할 예정이다.”

“아버지, 저 이제 스물네 살입니다. 제가 왜 지금 결혼해야 합니까?”

“이른 결혼은 우리 집안의 내력이다.”

“내력이요? 차라리 손이 귀한 집안이라 대를 이어야 한다고 솔직히 말씀하시죠.”

“맞는 말이다. 너도 익히 알고 있으니 숨기지 않으마.”

“제가 동물입니까?”

“자손 잉태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신성한 축복이다. 결혼식은 5월이 좋겠구나. 2개월이면 결혼 준비 기간으로도 충분할 테니.”

아버지 도형호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

강윤은 늘 아버지의 억압에 반항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자신의 발목에 채워진 사슬도 풀고 싶어도, 책임감과 의무로 버텼다. 하지만 결혼만은 강압으로 할 수 없었다.

“전 임현서랑 결혼 안 해요! 더더구나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랑 결혼할 수 없어요.”

“감정을 운운하다니…. 네가 어린애긴 하구나.”

“네, 저는 어린애라서 감정이 중요해요.”

“허허.”

“저도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이라.”

아버지는 무정한 로봇처럼 살았고, 감정에 연연하는 사람을 가장 하찮게 여겼다. 그래서 강윤의 절절한 호소도 한껏 비웃었다.

그때.

강윤은 자신의 유일한 일탈을 떠올렸다.

자신의 첫사랑이기도 한 서은재.

열아홉 살, 당시의 강윤은 죽을 것처럼 절망의 나락에 빠져 있었다. 제 주어진 환경이 끔찍했고, 한정된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때, 그를 자극한 것은 서은재였다.

우연히 만났고, 그 우연이 필연처럼 다가왔다.

기껏해야 짧은 몇 달이었지만,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에도 강윤의 심장에 잠식된 채 소멸하지 않았던 은재였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흉통을 일게 만드는 너.

서은재.

내 첫사랑.

“제가 아버지 같았으면 좋으시겠어요?”

“쓸데없는 소린 그만두고 결혼 준비나 해라.”

“아버지 뜻대로 되진 않을 거예요.”

냉혈한 같은 아버지는 꿈쩍하지 않았지만, 강윤은 결심했다.

자신은 숨을 쉬어야겠다고.

자신의 유일한 일탈을 되찾아오며.

“할아버지가 도와주세요.”

그래서 강윤은 아버지가 유일무이하게 반기를 들지 못하는 사람, 할아버지 도성만 회장의 도움이 절실했다.

“어차피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면, ㈜정진의 서은재와 결혼하겠습니다.”

“네 아비는 건우건설과 혼담을 추진하던데?”

“싫습니다. 서은재 아니면 아무하고도 하지 않을 거예요.”

당차게 할아버지 앞에 서서 요구했고, 강력히 밀어붙이며 설득했다.

“네 아비가 결정한 일이야.”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하십니다. 아시잖아요?”

“그 아이가 대체 어떤 애인데?”

“제겐 할아버지가 놓쳐 버린 그분 같은 여자요.”

“영악한 녀석 같으니라고.”

약주 한 잔에 주절주절 첫사랑을 털어내던 당신의 심금을 건드리며.

그날이, 강윤이 삼현그룹의 최고층 조력자를 얻은 날이었다.

***

불끈.

심장으로 스며들어 온 도강윤의 눈빛이 안개처럼 번졌다. 민경애로 인해 메말랐던 감정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픽.”

강윤이 짐짓 가벼이 웃었다.

“이 말을 결혼식 전에 하고 싶었는데.”

“왜… 안 했어?”

“서은재가 기회를 안 줬지.”

“아…….”

결혼식 전 그의 전화를 계속 피했던 일이 떠올랐다. 임현서와 침대에 누워 있던 장면을 목격한 영향이 컸다.

징―

그들의 분위기를 전화가 방해했다. 그의 시선이 물러났고, 은재는 눈을 내리깔았다.

“응.”

[상무님, 빨리 오세요! 회장님께서 당장 들어오라며 노발대발하시는데……!]

“바로 갈게.”

흥분한 호석이 꽥꽥 고성을 내질러서 통화 내용이 세세히 들렸다. 강윤은 침착하게 일어났지만, 은재는 심란했다.

“어머님과의 일 때문이지? 어머님께 뭐라 말씀드린 거야?”

“아니야. 외부 미팅 다녀오는 길인데 업무 보고가 늦어져서…. 내가 딴짓하는 것 같으니까.”

“딴짓도 할 줄 알아?”

“지금도 서은재 보러 왔잖아.”

빤한 거짓말이 밉지 않았다.

은재는 코웃음으로 모른 체했고, 강윤은 뻔뻔한 능청으로 답했다.

“더한 딴짓도 할 수 있는데.”

그러곤 별안간 은재의 팔목을 휙! 하고 능숙하게 빙 돌리더니, 가느다란 허리를 자신의 한쪽 팔로 거뜬히 감아 안았다.

“이런 딴짓.”

그러곤 엄지손가락을 은재의 아랫입술에 갖다 대며 살며시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으로, 그의 농염하게 짙어진 목소리와 눈빛으로, 짜릿한 전율이 가슴골 사이를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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