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23화 (24/84)

23.

결국.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막고 있는 옷가지를 벗어버렸다. 얇디얇은 속옷조차도 완전히 내동댕이쳐 버려 완연한 빈 몸이 되었다.

참을 수 없는 욕구로 허벅다리가 당길 만큼 그는 팽창해 있었다. 과하게 흥분한 은재도 애타게 그의 어깻죽지에 매달렸다.

그리고……

결합 직전의 순간.

“아.”

강윤은 바락 이성의 끈을 움켜쥐었다.

‘이렇게는 안 돼.’

취한 은재가 자신을 원하는 이 밤의 욕망에 먹히고 싶지 않았다. 둘에게 상처만 남겼던 그 밤들을 답습하는 기분도 들었다.

‘어떻게 기다린 순간인데…….’

그는 절제했다.

힘겨웠다.

죽을 정도로.

어금니를 갈며, 터지기 지경인 자신을 평정하며 은재를 제품에다 그득하니 안았다. 열띤 숨소리가 평온해질 때까지.

뜨겁고 짙은 숨결을 내뱉던 그녀는 금세 잠들었다. 그리고 잠든 은재를 바라보았다.

밤새도록.

그윽한 눈길을 떼지 않으며.

‘은재야.’

나는.

간절히 널 원한다.

네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그래도, 기다릴 거다.

너 또한 날 진정으로 원할 때까지.

그랬으면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저 예쁜 여자를 안지 않았음을 극렬히 후회하는 중이고.

“뭘 그렇게 빤히 봐?”

“아니야.”

그의 진득한 시선을 느낀 은재가 물었다. 강윤은 의연히 도리질하며 발길을 옮겼다.

“서은재.”

“응?”

몇 발짝 가다 말고, 그는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동작에 은재가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강윤은 천연덕스레 요구했다.

“손쯤은 잡아줘. 먼젓번에도 잡았잖아.”

“엄밀히 말하면 내가 잡은 게 아니지.”

하여간 깐깐한 여자야.

“그래서 또 뿌리칠 거야?”

“…….”

“첫 데이트인데?”

쐐기 같은 말에 은재의 눈알이 또르르 굴렀다. 그러다가 ‘옜다, 선심’ 하듯이 제 손바닥을 올렸다.

“픽.”

강윤의 입매가 호선으로 길어졌다.

큰 손은 은재의 작은 손을 감싸듯 그러쥐었다.

그리고 느린듯하게 걸음을 옮겼다. 은재도 가만히 따랐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서로의 온기와 맥박이 전해졌다.

어쩌면.

열일곱 살과 열아홉 살에 잡고 싶었던 손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어린 신랑과 어린 신부일 때 잡았어야 하는 손인지도 몰랐다.

그 손을 스물아홉 살과 서른한 살이 되어서야 맞잡았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길 바라며.

***

“고단하군.”

아침 햇살을 맞으며, 다이닝룸으로 들어서는 도형호의 안색이 퀭했다. 체질적으로 음주에 약한 그가 과음한 탓이었다.

“입맛이 없어.”

“해장국이니, 한술이라도 뜨세요.”

민경애의 손짓에 요리사와 메이드들이 분주하게 아침 식사를 세팅하고서 물러났다.

유리문이 닫히며 방음이 이뤄지자, 비로소 민경애가 입을 열었다.

“어제는 웬일로 늦은 밤에 나가서 약주를 하셨어요?”

“임 회장 장단 맞춰주느라 그랬지.”

“장단이요?”

“어젯밤 건우건설 임 회장이 넌지시 혼사 문제를 거론하더군.”

“정말요? 그래서 약주가 과해지신 거예요?”

일순 민경애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그쪽은 엄연히 초혼 아닌가. 귀한 딸을 재취로 보내려니 영 섭섭한 게지.”

“워낙 딸 바보인 양반이니 오죽했겠어요? 어쩌다가 결혼 얘기가 나온 거예요?”

“현서가 강윤이와 결혼하겠다고 안달복달을 했다더군.”

“임 회장이 그 고집을 못 꺾는 거네요. 우리는 현서한테 고마운 일이고.”

“조만간 현서가 자네에게도 인사 온다고 하니, 채비를 잘 해둬.”

“아무렴요. 선물을 준비해야겠네.”

때마침 시즌 한정판 명품 핸드백이 입고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참이었다.

“결혼은 언제쯤 성사될까요?”

“올해 안에. 임 회장은 내키지 않은 듯하지만, 현서의 의사는 그렇다더군.”

“잘 되었네요.”

“우린 하자가 있으니, 성사만 된다면 결혼에 관한 제반 비용은 물론, 건우건설에 부족한 물자를 최대한 지원할 계획이야.”

도형호의 아들 폄하에 민경애의 이마에 핏줄이 발끈했다.

“지나치게 굽히진 마세요.”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하자라니.

“도 상무는 이혼이 유일한 흠일 뿐, 어느 집안의 자제보다 우월하잖아요. 중매 시장에서도 월등히 탐내는데요.”

“건우건설만 한 곳이 있나?”

“국내 최대 건설사하고 비할 순 없지만요. 아무튼 도 상무에게 들르라 할게요.”

그녀는 두둔을 그만두었다.

“다른 일은 없고?”

“있을 일이 없죠.”

도형호가 수저를 들며 화제를 전환하여, 민경애는 가식적으로 대답했다. 서은재가 목 안의 생선 가시처럼 걸렸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

다음 날.

민서의 닦달에 못 이긴 은재는 그녀의 출판사에 들렀다. 소규모의 출판사이긴 해도, 저명한 작가들의 서적이 상당수였다. 내력이 탄탄하다는 의미였다.

“병원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거야.”

“도도하긴. 그리 바쁘면 후딱 계약서에 도장 찍고 가버려.”

“너 참 집요하다.”

“이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집요한 근성이 있어야 하거든. 내가 한 집착하잖아.”

“어련하겠어.”

친구의 너스레에 은재는 심드렁하게 출판 계약서를 살폈다. 그러는 동안 민서가 커피를 내어주며 본심을 꺼내었다.

“나 자꾸 이런 식으로 뻗대면, 너한테 무척 서운해. 우리 약속은 까마득하게 잊었나 보더라.”

“무슨 약속?”

“너의 첫 번째 작품집은 내가 출판해 준다고 했잖아.”

“네가 진짜 출판사를 차릴 줄 몰랐지.”

“싸가지. 나는 너랑 한 약속을 지키려고 이 살벌한 업계에 뛰어들어서 그간 죽자고 고생했는데…….”

태평한 대꾸에 민서가 흘겨보았다.

“암튼 그사이 다른 데랑 계약하는 법이 어디 있니? 구두 약속이긴 했어도 엄연히 계약 위반이야, 이년아!”

“정식 출판이 아니었어.”

“책자에 버젓이 출판사가 명시되어 있는데?”

은재의 말에 민서가 서지정보를 펼쳤다.

“나도 너 찾으려고 이곳이랑 통화했었는데? 작가 개인 정보라고 더럽게 안 가르쳐 주더라.”

“그렇게까지?”

“나의 진한 우정이랄까? 암튼 이 출판사랑 정식계약이 아니면?”

“로마에서 머물던 집주인의 출판사였는데, 내 사진을 보고 출간 제의하기에 사진 몇 장과 원고를 드렸던 거야. 거의 폐업 위기였거든.”

“저작권료는?”

“집세로 대신했어.”

“몇 달?”

“한 달.”

“고작 한 달? 아이고, 얘가 진짜 세상 물정 모르고 사네.”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두들긴 민서가 핸드폰을 열면서 다가왔다.

“네 책이 유럽에서 얼마나 핫한 줄 알아? 그 출판사 수익이 어마어마할걸?”

“잘 되었네. 좋은 분들이시니.”

“이거 봐라. SNS에서도 난리이고.”

그녀의 말마따나 은재의 포토에세이는 SNS에서 수천 개의 해시태그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국 출판사들도 작가 찾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다고, 이것아.”

“너처럼?”

“얘가 날 아주 악덕 업자로 취급한다니까.”

원통하다는 듯 째려보던 민서가 갑자기 껌을 꺼냈다. 그러더니 질겅질겅 씹어대면서 다리도 덜덜 떨었다.

“이왕지사 악덕으로 찍힌 거, 손가락 잘리기 전에 그 계약서에 도장 찍어라.”

“누가 보면 내가 사채 빚 진 줄 알겠다.”

“빚진 거 맞지! 내가 임현서도 해치워 줬잖아!”

“고작 한 번?”

은재는 민서의 어투를 시늉하며 반격했다.

“언제든지 콜 해. 임현서 머리끄덩이는 내가 맡을 테니.”

“아이, 든든해라.”

은재는 결국 임현서 머리끄덩이라는 사채를 얻었고, 민서는 판권 계약과 신작 계약권을 쟁취했다. 악착같은 친구는 그 후에야 입안의 꿀처럼 굴었다.

“조속한 시일 내 정식 출간할 작품과 원고 부탁드려요, 작가님.”

“예, 예.”

가까스로 친구의 마수에서 벗어난 은재는 곧장 의성대 병원으로 향했다.

VIP 병동의 도성만 회장의 병실 앞에 도착했는데, 반갑지 않은 손님과 맞닥뜨렸다.

“은재야, 왔구나.”

민경애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저편 간호사실의 영향이었다.

“안 그래도 널 보러 왔는데, 없어서 서운했단다.”

“그러셨어요?”

“나와 얘기 좀 하자.”

“접견실로 가시죠.”

은재도 태연히 미소 지었다. 그러곤 품위 넘치게 접견실로 들어가는 민경애의 뒤를 따랐다.

찰싹―!

문을 닫자마자 첨예한 손바닥이 은재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번개가 들어오듯 눈앞이 번쩍했고, 투명할 정도로 뽀얀 살결은 금세 붉게 물들며 부풀어 올랐다.

“네가 날 우습게보는 게지.”

격하게 흥분한 민경애가 가방에서 뭉치 더미를 꺼내어 던지다시피 테이블에 놓았다.

촤르르― 파도처럼 퍼지는 것은 사진들이었다.

‘음…….’

강윤과 은재의 첫 데이트 사진들.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에서 나와 인근 공원으로 걸어가며 대화하고, 다채로운 조명이 내비치는 공원의 분수대를 거니는 그들의 시간.

“넌 정말 낯짝이 두껍구나.”

“…….”

“우리와 다신 엮이는 일 없도록 하랬더니, 대놓고 우리 도 상무를 꼬드겨? 어디서 배워먹은 싸구려 짓거리야!”

민경애의 고함이 끝날 기미가 없었다. 잠자코 있던 은재는 딱하다는 듯 입을 뗐다.

“그만하세요, 민경애 여사님.”

“뭐!”

“위신은 지키셔야죠.”

그러곤 검지로 천장의 CCTV를 가리켰다. 비소를 머금으며.

‘때론 내가 악역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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