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을 예약해 둔 강윤 덕분에, 눈으로도 호강할 만한 음식을 먹으며 은재는 마냥 신기해했다.
‘도강윤과 데이트를 할 줄이야.’
특히. 분위기를 압도하는 남자와 함께 마주 앉아 있는 현실이 비현실적인 것 같아서.
이 남자의 다정한 눈빛도 가식이 아닌 본심 같아서 주고받는 대화도 자연스럽고 편하게 흘렀다.
“오늘은 수행비서 없이 퇴근했나 봐.”
“업무 외적으론 대부분 출퇴근은 나 혼자 해. 성가시거든.”
“단순히 수행이 귀찮은 거야, 정 비서님이 시끄러운 거야?”
“시끄러워.”
“쿡.”
능청스레 한쪽 눈을 찡긋하는 강윤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옆 테이블, 뒤 테이블 할 것 없이, 이 레스토랑의 여자 손님들이 힐끔힐끔 훔쳐보는 기운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왜인지 뿌듯했다.
은재는 이런 마음이 깃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얼핏 민경애 여사의 행동에 공감했다.
이런 아들이 있으면, 세상에 남부러울 게 없을 것 같다.
“어떻게 정 비서님 같은 사람을 수행비서로 뒀어?”
“길에서 주웠어.”
“유기견이야? 길에서 줍게?”
“그 녀석이 원래는 길 강아지였는데, 내가 몇 번 먹이를 주니까 졸졸 쫓아오더니, 사람으로 변신하더라고.”
“말하기 싫으면 관두자.”
“알았어. 말해줄게.”
강윤도 이 분위기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발언에 짜증 내는 은재에게 다정히 웃어주더니, 유순히 입을 열었다.
“정 비서는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후원하던 보육원 원생이었어.”
“그래?”
“날 형처럼 따르고, 똑똑한 녀석이었지.”
은재는 이 남자의 다정다감한 태세 전환이 썩 마음에 들었다.
“난 대학까지 후원해 주고 싶었어. 하지만 녀석은 더는 신세 지기 싫다며 극구 사양했지. 그러고 나서 사회에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지.”
“어떤?”
“국가 지원금 500만 원 받고 자립하면서 공장에 취직했다가, 공장장한테 학대당한 거지.”
“세상에.”
은재는 안타까운 사실에 기함했다.
“구김살이 없어서 상상도 못 했어.”
“기질적으로 밝은 녀석이야. 그래서 나도 염려 안 했고, 별생각 없이 잘 지내나 싶어 찾아갔는데…….”
강윤이 묵직한 갈비뼈에 들숨을 넣었다.
“녀석이 제 편이 아무도 없는 세상이 무섭다며 울더군.”
“아.”
은재도 먹먹했다.
“그때, 내가 그 녀석의 어른이 되어주고 싶었어.”
“…그렇게 거둔 거구나.”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지. 내 수행비서로서 정직원이 되면 사택 혜택도 받을 수 있으니까.”
세상에 홀로 남은 아이를 일자리라는 명분으로 자립시키며, 보호까지 한 거다. 그로서도 어려운 결단이었을 텐데…….
“도형호 회장님을 용케 설득했네?”
“뭐, 대충.”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으쓱했다. 녹록지 않았음이 어렴풋이 가늠되었다.
“정 비서님은 몇 살이야?”
“스물넷.”
“아기네, 아기.”
“20대가 20대한테 아기라고 하는 거야?”
은재의 중얼거림에 강윤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난 적어도 20대 후반이야.”
“좋겠군. 노쇠하셔서.”
“30대분께 들을 얘기는 아니네요?”
뻗대던 스물아홉 살이 서른한 살의 어른한테 볼멘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랬더니 강윤이 체념한 듯 한술 더 떴다.
“예, 늙은이 주제에 훈수 둬서 죄송합니다.”
“쿡.”
그의 능청에 웃음이 났다.
짤막한 숨결 같은 소리가 곧 쿡쿡쿡 소리로 이어졌다. 픽, 따라 웃던 강윤의 입매가 길게 늘어났다.
불현듯 호석과 같은 나이였던, 스물네 살의 도강윤이 떠올랐다.
스물두 살이었던 은재 자신도.
‘우리도 어렸는데…….’
어린 우리가 우리끼리 아프고, 상처 내고, 상처받는 동안.
보호해 줄 어른들이 주위에 득시글했음에도 우릴 지켜준 어른들은 없었다. 도성만 회장이 있었지만, 그 또한 한걸음 물러나 있었다.
‘우린 이제 다 큰 어른이니…….’
은재는 그 여느 때보다 편안히 웃는 강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우릴 지킬 수 있을까?
***
“아! 짜증 나!”
쨍강―
현서의 울분에 찬 외침과 함께 던져진 와인 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김민서, 서은재. 이것들이 쌍으로…….”
병원에서 당한 치욕으로 분이 풀리지 않았다.
붉은 액체와 유리 파편이 사방에 흩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어차피 가사도우미의 할 일이므로.
“어떻게 복수하지?”
거실로 나온 현서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서성였다.
두 살 어린 김민서는 고등학교 시절 때부터 건들지 않은 것이 상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원체 미친놈이었다.
“아냐. 그 미친것하고 상종 안 하는 게 나아.”
문제는 비단 김민서가 아니었다.
서은재의 등장만큼 심각한 사안이 있을까.
“언제 귀국한 거야? 도강윤하고 이미 만난 건가?”
그녀는 불안 심리로 제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
이제야 깨달았다.
서은재와 마주한 장소가 의성대 병원이었다는 사실을. 그곳엔 도성만 명예회장이 입원하고 있지 않은가.
“멍청이! 그걸 왜 생각지 못했어!”
서은재와의 만남으로 놀라는 바람에 까맣게 잊어버렸다. 자신이 병원에 갔던 목적 또한 도성만 회장이었음을.
“그게 회장님께 알랑방귀 뀌려고 거기 온 건가? 혹시… 도강윤하고 합치려고?”
‘혹시’로 파생된 추측에 현서는 오소소 떨었다.
6년 전, 그때도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후 미치도록 절망했는데…….
결단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 앙큼한 서은재한테 또다시 도강윤을 빼앗길 수 없다.
조급한 현서는 즉각 전화를 걸었다. 두어 번의 신호 만에 건우건설 임보성 회장이 받았다.
“아빠.”
[우리 딸, 이 저녁에 어쩐 일이야? 아빠랑 밥 먹자고 해도 바쁘다더니…….]
“아빠 어디신데?”
[집이지. 좀 전에 귀가했어. 오늘 피곤해서…….]
“지금 갈게요.”
이기적인 현서는 부친의 고단한 음색은 개의치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곤 서둘러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두고 봐.”
아랫입술을 바락 물며.
“이번엔 절대로 안 놓쳐.”
***
강윤과 은재는 레스토랑 인근의 한적한 공원을 거닐었다. 식사만으로 데이트를 끝내고 싶지 않은 강윤의 이동을 은재가 자연스레 따랐다.
“예쁘네.”
은재가 바닥 분수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짓을 따르듯 바닥 분수에서 형형색색의 조명이 들어왔다. 은은한 빛을 띠는 물결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진 찍고 싶어?”
“카메라가 없어.”
“안타깝네.”
“괜찮아. 때론 눈으로만 담아도 좋은 것들이 있으니까.”
설핏 웃으며, 은재가 바람으로 인해 하느작거리는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러고선 알록달록한 빛줄기에 눈길을 붙박아뒀다.
“…….”
반면, 강윤은 오롯이 은재만을 담았다.
서은재.
네가 내겐 그런 거다.
내 눈에만 담아도 좋은 것.
‘픽.’
그는 내심 웃었다.
아무래도 은재는 어젯밤 일을 또 기억 못 하는 듯했다. 섬에서의 키스 때처럼.
‘조금은 분하네, 자기가 유혹했으면서.’
강윤은 은밀한 어젯밤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뿐이랴.
새벽 5시에 은재가 도망가는 것도 자는 척하며 내버려 뒀고, 그녀가 난처할 듯해 자신도 필름이 끊긴 척했다.
‘만약 기억한다면 죽일지도.’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경영이면 경영 등등 모든 종목이 쉬웠던 강윤이었다. 그런 그의 유일한 취약점은 알코올이었다.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 맥주 한 잔에도 저세상 체험이 가능했다.
그래서 술자리는 영민한 처세로 차단했으며,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이 약점을 아는 채종훈이 방패막이가 되어줬다.
귀찮은 보상을 해줘야 하지만.
그런데 취한 서은재는 피할 수 없는 자극제였다.
“무슨 맥주를 사약 보듯 봐? 같잖아서 나랑 마시기 싫어?”
“그럴 리가.”
귀여운 시비에 넘어가 독약 같은 맥주를 마셨고, 그 바람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깨었을 때는 환상 같은 서은재가 제 옆에 있었고, 놀랍게도 눈을 뜬 서은재가 먼저 키스했다.
일순, 이성을 잃어버린 강윤이었다.
안 그러겠는가.
그토록 원하고 바랐던 서은재와의 키스였는데…….
다른 남자로 착각하는 건가, 라는 불안감도 증폭되었지만, 그녀의 입술에 취해가며 ‘뭐든 상관없다’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 도강윤.”
그런 강윤의 마음을 읽은 듯 은재는 농염한 숨소리처럼 그를 찾았다.
은재가 부르는 이름.
다른 남자가 아닌 명확한 자신의 이름, 도강윤.
강윤은 그녀의 입에 제 이름이 담기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더불어, 그의 몸을 탐색하듯 어루만지는 은재의 손길은 이성 따윈 던지라는 유혹 같았다.
‘너도 날 원했던 거야?’
전율이 솟구쳤다.
전신의 힘줄이 팽팽해질 정도로.
“아, 서은재.”
강윤은 절제력을 던져 버렸다.
은재는 지독히 매혹적이었다. 그 어떠한 향신료보다도 향기로웠으며, 그 어떠한 화염보다도 그를 달뜨게 했다.
“은재야.”
표출하지 않았던 갈망을 여실히 드러내는 몸의 구석구석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지고 애무했다.
부부였음에도 둘 사이에 이토록 진한 애무는 맹세코 처음이었다.
첫날밤조차 그의 손길을 거부하였던 은재였기에 조심스럽기도 했으나 그녀는 밀어내지 않았다.
“하아.”
마치 못 견디게 그를 원한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