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21화 (22/84)

21.

고가의 명품 아니면 물건 취급도 안 하는 임현서다운 발언이었다. 제 능력이 아닌 집안 재력으로 누리고 살면서 뭐 그리 잘났다고.

“반가운가 봐요?”

“내가 왜 너 같은 걸 반가워해?”

“그런데 왜 굳이 시간 할애해서 알은체를 할까.”

신랄하게 빈정거리고, 은재는 제 갈 길을 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앞길을 막았다.

“한국에 언제 왔니?”

“언제 왔든.”

“거지 같은 꼴로 돌아온 걸 보니, 위자료 떨어졌니? 내가 보태줄까?”

“왜 임현서 씨가 보태줘요?”

“그래야 네가 다른 나라로 꺼지지.”

6년 만에 만났는데도 신물이 났다. 은재는 상대하기 싫어서 무표정을 일관했다.

“깜냥도 안 되는 게 꼴값을 떨다가 쫓겨났으면 죽은 듯이 살지, 이 나라로 어떻게 돌아오니? 너도 참 뻔뻔하다.”

그때였다.

“이 나라가 네 거야, 이년아.”

“악!”

별안간 나타난 민서가 현서의 머리끄덩이를 휘어잡았다. 질겁한 현서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대한민국 국민이 내 나라에 오든 말든 네년이 뭔 상관인데!”

“김민서, 이 미친년아! 이거 안 놔!”

현서도 꽥꽥거리며 양손으로 민서의 머리채를 잡아챘고, 우악스러운 민서는 뿌리까지 뽑을 양 현서의 머리끄덩이를 줴흔들었다.

“그래! 넌 쌍년이고, 난 미친년이다!”

“악!”

“내가 그냥 미친년이냐? 미쳐도 단단히 미친, 미친년이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삼현고등학교 여학생들을 평정했던 싸움의 대가, 김민서였다.

점잖은 국회의원 부친과 고상한 대학 교수 모친에게서 ‘어쩌다 이런 DNA가 나왔느냐’는 구설에 오를 만큼 화나면 물불 가리지 않았다.

“너 오늘 잘 걸렸다. 이 미친년한테 한번 당해봐라, 임현서 이 쌍년아!”

“악!”

개싸움 하는 그들에게 병원 산책로의 이목이 쏠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던 은재는 할아버지의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도 깊게 잠드신 듯 잠잠했다.

“그만해. 애들처럼 뭐 하는 거야.”

“…….”

“사람들 보잖아. 당장 놔.”

은재의 질책에 민서와 현서의 꽥꽥거림은 멈췄다. 그러나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며 머리카락은 놓지 않았다.

“셋에 둘 다 놔.”

쓸데없는 기 싸움에 은재는 피로했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충 숫자를 셌다.

“하나.”

“…….”

“둘.”

“…….”

“셋.”

휙, 두 사람의 손이 풀렸다.

민서는 제 손가락에 낀 머리카락을 끄집어냈고, 현서는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한 움큼의 머리카락을 털었다.

“고소할 거야, 김민서.”

“바라는 바다. 내 변호사 소개해 주리?”

“나도 있거든?”

“쌍방폭행입니다. 합의하세요.”

은재는 차분히 중재했다. 그러자 현서가 매섭게 노려보았다.

“김민서가 공격했잖아!”

“일방적으로 폭행당한 거 아니니 쌍방입니다. 그러게, 끝까지 참으셨어야죠.”

은재의 냉소적인 지적에 현서가 으르렁거렸다.

“난 정당방위야.”

“정당방위이기엔 과했죠. 민서는 한 손이었는데, 임현서 씨는 양손을 쓰셨잖아요?”

은재는 침착하게 바닥에 떨어진 현서의 명품 클러치 백을 가리켰다. 그 위에 민서의 머리카락이 수북했다.

“고소해. 난 네년이랑 법정에서 만나고 싶으니까.”

“…….”

껄렁한 민서가 자극했지만, 현서는 입술을 악다물었다.

명망 높은 집안의 딸들이 머리끄덩이 시비가 붙었다는 입소문이라도 나면 도리어 타격이 컸다.

더한 문제는 상대가 입소문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망나니 김민서라는 것.

“정말 수준 떨어져서.”

으르렁거린 현서가 바닥의 백을 주워서 돌아섰다. 그러곤 몇 발짝 가다 말고 사나운 눈초리를 던졌다.

“김민서, 호칭 똑바로 해.”

“예, 언니. 들어가세요.”

능구렁이 민서는 제 복부에다 양손을 대고서 폴더인사를 했다. 두 살 언니인 현서는 진저리치더니, 서둘러 가버렸다.

“넌…….”

“속 시원하지?”

잔소리하려는데, 민서가 선수 쳤다. 은재는 심드렁하게 끄덕였다.

“어.”

일순.

두 친구의 입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짓궂은 민서는 바닥에서 나뒹구는 현서의 머리카락을 발바닥으로 비벼댔다.

***

“어떻게 된 거야? 병원엔 왜 왔어?”

“너야말로 왜 도성만 회장의 병간호를 하는데?”

오수에서 깬 도성만을 병실에다 모셔다 드린 후, 은재는 민서가 기다리는 산책로로 나왔다. 대번에 질책 어린 눈초리가 왔지만, 은재는 의연히 받아쳤다.

“내 질문이 먼저야.”

“아까 네가 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니까 큰 병에라도 걸렸나, 그래서 한국에 왔나, 별의별 걱정이 다 되더라고.”

민서가 주절주절 부연했다.

“내가 안 왔으면 어쩔 뻔했냐? 넌 왜 그년의 주접을 받아주는 건데?”

“상대해서 뭐 해. 피곤하게.”

“하여간… 근데 여우 같은 년이 도성만 회장은 못 본 것 같더라. 그러니 그 지랄을 떨었지.”

“응.”

단언컨대 임현서는 근거리의 도성만 회장을 못 봤다. 만일 인지했다면, 조금 전의 마찰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터.

“그나저나 네가 왜 도성만 회장의 병간호를 하고 있냐니까? 그사이 도강윤하고 합친 거야?”

“……!”

정곡이 찔렸다.

눈치가 빠른 놈이긴 하지만, 이렇게 훅 들어오다니.

“할아버지가 입원하셨다는 소식 듣고 온 거야.”

은재는 의연한 척 구느라 진땀을 뺐다.

“너도 알다시피 내겐 친가족보다 더하게 가족 같던 분이셨잖아.”

“아, 맞다. 은재 네가 떠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뇌수술을 크게 받으셨었지. 그때 세간이 발칵 뒤집혔었는데……. 도강윤도 혼이 나갔었고.”

“그랬어?”

은재는 씁쓸한 눈길을 내리깔았다.

“응. 도강윤이 완전히 딴 사람 같았어. 핼쑥해진 데다 그 총기 넘치던 남자가 텅 비어 보였달까?”

도강윤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자신을 가장 아끼던, 소중한 할아버지이니.

“넌 전혀 몰랐어?”

“한국 소식은 일부러라도 외면하고 살았으니까. 꽤 오랫동안 뉴스도 접하지 않았어.”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

민서가 수긍했다.

“아무튼 회장님은 그때 수술 잘 돼서 완치했다고 들었거든. 근데 왜 병원에 계셔? 또 안 좋아지신 거야?”

“아니. 건강관리 차원.”

은재는 도성만 회장의 위중한 상태를 숨겼다. 행여 입소문 나면 세간이 떠들썩해질 것은 자명했다.

“도강윤도 만났겠네?”

“응.”

만난 것뿐인가.

어젯밤에는 너랑 술 처먹고 일생일대의 실수를 했단다.

“뭐래?”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어.”

“알았어. 너라고 전남편 얘길 하고 싶겠니. 내가 주책이지.”

“오지랖이야.”

은재는 쿡 웃었다. 예전처럼 한결같은 민서가 있어서 든든했다.

“병원에 더 있을 거 아니지?”

“응.”

은재는 친구와 나란히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제 차의 조수석 문을 연 민서가 거들먹거리듯 턱짓했다.

“야, 타.”

“뭐야.”

“집으로 갈 거잖아. 데려다줄게.”

“…볼일 있어. 따로따로 가자.”

도강윤의 펜트하우스를 모를 리 없는 민서기에 은재는 에둘러댔다. 민서는 의심 없이 ‘계약 반드시 해줘라’라는 당부를 잊지 않고서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듯한데…….’

알면서도 밝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은재는 못내 미안한 마음으로 투덕투덕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끼익―

버스가 아닌 검은색 세단이 버스정류장 갓길에 정차했다. 무심히 쳐다보는데, 조수석 차창이 열리며 낯익은 사람이 나타났다.

“타.”

도강윤?

깜짝 놀라서 멀뚱거리던 은재는 뒤편으로 접근하는 버스를 포착했다. 어쩔 수 없이 서둘러 그의 차에 올랐다.

“여기 어떻게 왔어?”

“어떻게긴. 강아지처럼 서은재 뒤를 졸졸 쫓아온 거지.”

의연히 받아친 강윤이 여유롭게 차선을 변경했다. 병원에서부터 따라왔다는 소리에 은재는 의아했다.

“왜?”

“김민서랑 같이 있었잖아.”

“설마, 민서 때문에 알은체 안 한 거야?”

“무서워서 피한 거야. ‘막돼먹은 김민서 씨’잖아.”

“허?”

강윤의 엄살에 은재는 기함했다.

아무리 ‘막돼먹은 민서 씨’라는 별명의 민서라도, 타고나길 대범한 남자조차 피하다니…….

하기야 아까 임현서 머리끄덩이 휘어잡는 품새를 보니, 기량이 여전했다.

‘이 남자는 임현서 당한 걸 알면 어떤 반응을 할까?’

문득 궁금했으나 은재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현서를 통해 알지도 모르는데 굳이.

“어디 가? 이쪽은 펜트하우스 방향이 아닌 것 같은데?”

“우리 남은 숙제 해야지.”

“숙제?”

영문 모르는 은재가 눈썹을 들썩이자, 강윤이 넌지시 일별했다.

“데이트.”

나긋하게 웃으며.

“데이트하러 갈 거야.”

***

묘한 경험이었다. 결혼도 했고, 이혼도 한 부부의 첫 번째 데이트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