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여린 살결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에도 그의 욕구가 고스란히 전달됐다.
바짝 긴장했던 근육이 그의 부드러운 매만짐으로 서서히 이완됐고, 지독한 소름처럼 오싹한 전율이 전신을 휘감았다.
“음…….”
발가락이 바짝 오므라들었고, 폐가 조이는 듯한 거친 호흡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아.”
“하. 하.”
두 사람은 벗어날 수 없는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서로의 입술과 서로의 손길에 몰입했다.
갈수록.
더할수록.
은재는 해일에 휩쓸린 연약한 해초처럼 그의 몸에 붙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완전히 제 몸에 얽히도록 만들고 싶었다.
‘도강윤…….’
환각에 취한 것처럼.
‘내게서…….’
가뭄에 시달리던 마른 나뭇잎처럼 절실히 그에게 얽혀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멀어지지 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모든 걸 그에게 전달하고, 자신의 전부를 주고 싶은 갈망.
여태 아등바등 부여잡고 있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고, 만질 수 없는 공기처럼 붙잡을 수 없었던 그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재야.”
강윤이 꿈결처럼 불렀다.
제 이름을 다정히 부르는 도강윤의 음색이 듣기 좋았다.
계속, 계속 듣고 싶은.
“은재야.”
그의 유혹 같은 속삭임을 흡수하며, 은재의 무의식은 바랐다.
‘이 꿈에서 깨지 않으면 좋겠다.’
라고.
***
스륵.
가만히 눈을 뜬 은재는 희뿌연 새벽빛이 비쳐든 천장을 노려봤다. 흉악한 경험이라도 한 듯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병인가. 어떻게 연일 야한 꿈을 꾸지?’
입술을 잘근거리며 돌아눕는데.
“흡……!”
은재는 기절초풍할 뻔했다.
제 옆에 도강윤이 잠들어 있지 않은가. 심지어 헐벗은 상반신으로.
‘꿈이 아니었던 거야?’
시야를 희롱하는 탄탄한 이두박근이며, 완만한 굴곡을 이루는 가슴팍을 훔쳐보듯 힐끔거리던 은재는 살그머니 시트 속을 살폈다.
“이…….”
미친.
육성으로 욕설이 나올 뻔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은…….
‘튀자.’
은재는 최소한의 소음으로 바닥의 속옷을 낚아챘다. 그러고서 굼벵이처럼 꼬물꼬물 입고, 꼬물꼬물 침대 밑으로 내려가 옷가지를 챙겼다.
“음…….”
흠칫.
위에서의 미약한 소리에 은재는 침대에 바짝 붙었다. 온 신경의 촉각이 곤두섰다.
‘눈 뜨는 날엔 죽여 버릴 거야.’
“…….”
돌아오는 답은 정적.
살며시 확인하니, 잠결에 뒤척인 듯 도강윤은 세상 나 몰라라 꿈나라였다.
‘휴.’
안심한 은재는 낮은 포복하듯 그의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무사히 2층에 도달했음에 감사히 여겨야 할 지경이었다.
“나, 돌았나 봐.”
털썩.
침대로 다이빙하며 은재는 절망에 빠졌다. 도무지 어젯밤 상황이 짐작되지 않았다.
“필름이 어디서 끊긴 거지?”
맥주 몇 모금에 잠들어 버린 도강윤을 질질 끌어다가 침대에 눕힌 것까진 기억난다. 그러다가 취기가 급상승하여 잠든 듯하고.
“왜 옷은 벗고 있어?”
그 야한 꿈이 실제 행했던 행위인가.
은재는 시트를 뒤집어쓰며 아른아른한 영상을 떨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돌지 않고서야 어떻게 도강윤과…….”
설령 취했다고 한들, 설령 그 묻어뒀던 감정이 되살았다고 한들, 그와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설마…….
다정한 도강윤에 들뜨기 시작한 나머지, 꾹꾹 묻어뒀던 감정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걸까?
***
똑똑.
새벽 5시에 그의 침대에서 도망쳐 나와 갖가지 구실을 열거하며 괴로워하다, 어느 틈에 잠든 모양이다. 아침 7시가 넘어 은재는 작은 노크 소리에 질겁하듯 깨어났다.
“왜?”
“괜찮아? 어제 꽤 많이 마셨던데?”
부러 퉁명스레 문을 열자, 근사한 슈트 차림의 강윤이 물었다. 표정도, 태도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 정도는 거뜬해.”
“서은재가 의외로 술이 세군.”
“어. 제법 세.”
“그래?”
문득, 그의 웃음기 실린 목소리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숨결처럼 불러주던 음색이 겹쳤다.
“은재야.”
‘정신 차려. 이 남자가 그렇게 다정히 불렀을 리 없잖아.’
은재는 내심 저 자신에게 야박한 힐난을 쏟았다. 눈앞에 실재하는 남자도 냉담히 보려 애썼다.
“난 내가 침실로 어떻게 간 건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별일 없었지?”
“도강윤이 멀쩡히 숨 쉬고 있으니, 별일 없는 거지.”
“죽이고 싶었어?”
“아니. 죽일 정도로 애증이 깊은 사이는 아니라서.”
“그래.”
삐뚠 언사에 도강윤이 설핏 웃었다.
‘맞아. 아무 일도 없었던 걸 거야.’
어젯밤에 대한 의구심도, 의문도 제기하지 않아 은재는 은연중 안도했다.
“오늘은 가사도우미 아주머니 오실 거야. 밥 챙겨주실 테니, 해장해.”
“출근해?”
“응. 할아버지껜 언제 갈 거야?”
“어제처럼 점심시간에 맞춰서.”
“데려다줘?”
“필요 없어. 대중교통이 널렸는걸.”
“정 비서 보내줄까? 대중교통보단 편할 텐데.”
강윤이 자연스레 수행비서를 언급했다. 기회다 싶어서 은재는 입을 열었다.
“정호석 씨 말이야. 도강윤 상무님의 수행비서가 확실해?”
“응. 왜?”
“좀… 이상하던데?”
6년 전 도강윤 실장이던 시절, 도형호 부회장이―현재 회장―붙여준 그의 비서는, 냉철하고 완벽한 도강윤에 상응하는 비서였다.
무서울 정도로 과묵하고 콘크리트 벽처럼 서늘했다.
그에 비해 정호석은 다른 종족 같다. 경박한 느낌으로 나부대는 데다 몹시 허술해 보인다.
“이상했어?”
강윤이 픽, 웃었다.
“좋은 녀석이야.”
친근한 언사도 뜻밖이었다.
“취향이 변했네?”
“비서한테 취향이라니… 실례야.”
“실언이야, 취소.”
엄한 빛을 띠는 그에게 건성으로 손짓했다. 실쭉, 내려다본 강윤이 부언했다.
“까불긴 해도 강점이 많은 녀석이야.”
도강윤이 이토록 타인을 용인했던가?
“다녀올게.”
은재는 눈길을 회피했다.
제게 출근 인사를 하는 도강윤도, 타인과 격을 두지 않는 도강윤도 하염없이 낯설었다.
“어.”
그녀의 뚝뚝한 응수를 듣고도 긴 눈매를 휘는 도강윤도.
다정한 도강윤은 위험하다.
매번 심장 발작을 유발한다. 사람 홀릴 정도로 매력적이라.
‘도대체 어쩌려고.’
강윤이 펜트하우스에서 나간 후, 은재는 얹힌 듯한 가슴팍을 주먹으로 문질렀다.
한참 동안.
***
울긋불긋한 단풍이 물든 산책로를 따라 은재는 도성만의 휠체어를 밀었다.
당신께서 답답하다고 보채어서 할 수 없이 나왔지만, 행여 탈날까 싶어 전전긍긍했다.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오랜만에 바깥 공기도 쐬고, 은재가 밀어주기도 하니 좋기만 해.”
“좋으세요?”
“그럼. 10년은 너끈히 살 것 같네.”
“50년은 사셔야죠.”
“늙은이 백 살 넘게 살아서 뭐 하게?”
“뭐 하긴요. 봄엔 벚꽃 피는 거 보고, 여름엔 장마도 맞이하고, 오늘 같은 가을날엔 저렇게 예쁜 단풍도 보고요.”
“한량처럼 살라는 거네?”
“여태 바지런히 사셨으니 여생은 그러셔도 돼요.”
“말만 들어도 한가로워.”
온화한 볕을 쬐던 도성만이 꾸벅꾸벅 졸았다. 들어가느냐고 물었더니, 이대로 편하신지 설레설레 고개만 저었다.
결국 그는 잠들고, 은재는 곁의 벤치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징―
서서히 졸음이 밀려오는데, 민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의 달콤한 오수를 방해하지 않으려 저만치로 이동했다.
[나 거의 다 왔어.]
“어딜?”
[의성대 병원. 어느 과에서 진료 중이야?]
한 시간 전에도 전화해서 계약하자고 질척거리는 그녀에게 의성대 병원 진료 있다고 둘러댔던 은재였다. 그런데 득달같이 달려온 거다.
“여길 왜 와?”
[우리 작가님 병원 진료받으시는데, 내가 수발해야지.]
“없어도 돼. 계약은 조금 더 고려해 볼 테니까 그냥 돌아가.”
[어휴, 우리 작가님은 생김새답게 참으로 신중하셔. 그러지 마시고요, 작가님. 이왕지사 온 김에 얼굴 좀 보여주세요.]
거머리 같은 친구가 간드러지게 종용했다. 그러나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은재는 매정했다.
“여기 오면, 계약은 영원히 이룰 수 없을 줄 알아.”
[야!]
쌀쌀맞은 엄포에 민서가 꽥 소리를 질렀다.
“오려면 와.”
“돌아간다, 가! 나쁜 년아!”
코뿔소처럼 흥흥거리는 숨소리를 낸 민서가 전화를 끊었다.
“하여간.”
은재는 혀를 차며 할아버지께 되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서은재?”
또각또각, 힐 소리와 함께 앙칼진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은재는 긴장했다.
아랫입술을 맞물고 미간을 실룩이다가, 짐짓 평온을 가장하여 돌아섰다.
“…….”
“허, 서은재 맞네?”
그녀를 불러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임현서였다. 그녀가 멸시 어린 눈초리로 은재의 전신을 훑었다.
“하도 추레해서 못 알아볼 뻔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