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악!”
은재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핸드폰을 냅다 던졌다.
징―
거실 중앙 소파에 착지한 핸드폰이 연신 ‘도강윤 ♥♥’을 반짝였다.
“뭐야, 저 끔찍한 문구는?”
저 소름 돋는 저장 이름은 호석의 만행임이 자명했다.
징―
도강윤 하트 하트는 집요했다. 끔찍한 물체를 노려보던 은재는 하는 수 없이 낚아챘다.
“어.”
[무사히 받았네?]
이 남자는 자신이 ‘도강윤 ♥♥’인 걸 알까?
“쓸데없는 참견이야. 필요하면 내가 어련히 안 살까.”
[애인의 2호 선물이야.]
“어제의 선물도 차고 넘치는데… 근데 그 호칭은 대체 언제까지 할 거야?”
[남편으로 발전할 때까지?]
남편?
어처구니없게도, 이 순간 어젯밤 꿈속에서 군살 없이 촘촘한 가슴팍의 야성미를 드러내던 도강윤이 떠올랐다.
‘미쳤어.’
은재는 질끈 눈을 감았다.
발긋하게 달아오르는 뺨을 인지하며, 도강윤이 제 앞에 없다는 사실에 거듭 안도했다.
[서은재.]
“응?”
[저녁에 데이트하자.]
들썩.
발긋한 뺨에 이어 심장까지 요동쳤다.
은재의 반응은 모르는 채, 강윤은 나직하게 웃었다. 그 희미한 허스키로 심장을 간질거렸다.
[퇴근하고 데리러 갈게.]
“…그래.”
요염한 음색이 이어져 은재는 겨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귓가에서 그의 비음 섞인 웃음소리가 집요한 여름 모기처럼 맴돌았다.
“아, 진짜 미쳤나 봐.”
아무래도……
‘꿈 때문이야.’
이 욕망덩어리.
***
“부르셨습니까?”
은재와의 데이트로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려는 강윤을 아버지 도형호 회장이 호출했다. 그리고 아들을 마주한 도형호의 눈빛에는 선득한 기류가 번뜩였다.
“터무니없는 보고가 올라왔던데?”
“무슨 보고입니까?”
강윤은 흐트러짐 없이 의연한 태도를 갖췄다.
“서은재.”
역시.
“왜 서은재를 데려왔지?”
질문이 교묘했다. 경로를 배제함으로써 내막을 파내려는 노림수.
어디서부터 아는 걸까?
순전히 병원에 데려왔느냐일까? 아님 섬에서가 포함된 걸까?
“여전히 저를 감시하느라 여념 없으시군요.”
강윤이 부러 언짢은 태를 내자, 도형호가 느긋하게 돌아섰다.
“삼현그룹 차기 후계자의 행보에 관심 두는 이는 내가 아닌 세간이다. 굳이 귀를 열지 않아도 메아리처럼 들여오더구나.”
“그래요?”
“아비로서 아들이 너저분한 구설에 오르내리지 않게끔 애써주는 게지. 하물며 결정적 하자가 있는 아들인데.”
결정적 하자(瑕疵).
강윤의 관자놀이가 실룩했다.
“서은재에 대해 설명해.”
“할아버지의 명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입원하신 지 얼마 안 되어, 제게 서은재를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너는 여태껏 서은재와 연락하였던 모양이지?”
“그럴 리가요.”
“왜 서은재가 네 펜트하우스에서 머무르는 거지?”
단호한 일축에 화살촉 같은 질문이 날아왔다.
꿈틀.
무심코 강윤은 반응했고, 빈틈을 꿰뚫은 도형호의 커다란 한 손이 주저하는 법 없이 아들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악력이 실리진 않았으나 지독한 위압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들에게 자주 행사했던 위압.
“왜 이러십니까?”
“수 쓰지 마라.”
아버지는 독수리 같다.
잔혹한 발톱을 가진 채 대상의 심장을 후벼 파는 독수리.
그리고 그 대상은 으레 강윤이었다.
“나를 또다시 너의 잔꾀로 농락할 궁리 중이라면 오산이야.”
어려서부터 그랬다.
아버지는 먹잇감을 낚아채는 일에만 몰두한 독수리였다. 전형적인 경영인으로서 강윤 또한 삼현의 대표 후계자로 커가길 바랐다.
그렇기에 아들의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다.
은재와의 결혼은 강윤으로서 최초의 반항이었는데, 그 일이 우매한 모험이었음을 결혼한 후에야 깨달았다.
도강윤과 서은재.
그들의 주위엔 온통 가시밭길만 존재했으니, 강윤은 은재에게 조금이나마 자유를 주기 위해 그녀를 멀리해야만 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그녀와 거리를 뒀고, 남모르게 이혼을 준비했다.
일련의 사건들로 그 시기는 예상보다 훨씬 빨라졌지만.
“자, 다시 묻지.”
독수리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서은재가 왜 네 펜트하우스에 있지? 둘이 동거라도 하려고?”
“제가 그 여자와 왜요?”
강윤은 모르쇠를 일관했다.
“할아버지께서 2층을 내주라고 명하셔서 저도 어쩔 수 없이 들였습니다.”
“어쩔 수 없다라……. 해명이 조잡해.”
“제겐 권한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펜트하우스의 주인도 할아버지시잖아요. 믿지 못하시겠으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면서 도전적으로 제 목덜미를 드러냈다. 부러뜨려도 상관없다는 듯.
“일단은…….”
비로소 도형호가 손아귀를 풀었다.
“알겠다.”
명예회장이자 삼현그룹의 대주주인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법 없는 도형호였다. 그렇기에 분별없는 소행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일단은.’
강윤은 도형호의 음험한 발언을 곱씹었다.
불길한 징조가 뒷덜미로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꿋꿋하게 의연한 태도를 갖췄다.
“아버지.”
그러면서 짐짓 억울하다는 듯 열거했다.
“저는 손자로서 도리를 할 뿐입니다. 저라고 이혼한 아내와 함께 있고 싶겠습니까?”
“알았다. 허튼짓하지 마라.”
“나가 보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방심해선 안 된다.
은재에게 저 잔혹한 발톱이 향하지 않도록 보호할 것이며, 누구든 그녀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자가 아버지라 할지라도.
***
초조하게 거실을 배회하던 은재의 핸드폰이 울린 시각은 저녁 7시였다.
큼큼, 괜히 헛기침하고서 전화를 받았다.
“어.”
[기다렸어?]
“아니.”
[그럼 다행이고.]
다행?
[오늘따라 일이 많아. 아쉽지만, 데이트는 다음으로 미뤄야겠어.]
이봐요, 도강윤 씨.
[저녁 맛있게 먹어.]
나 옷 차려입었다고!
“어. 수고해.”
발끈하는 앙탈을 꾹꾹 누르고, 은재는 성질부리듯 확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람 갖고 노니!”
그러고선 애먼 핸드폰을 또다시 던졌다.
뒤늦게서야 인지했다.
오만을 떨어댄 주제에 결국은 도강윤과의 데이트를 학수고대했음을.
“등신이야, 등신.”
이혼녀 주제에 데이트를 한 번도 못 해본 등신이, 전남편과의 데이트가 뭐 그리 좋다고.
“차라리 어디든 가자.”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도강윤의 귀가를 맞이하는 자신은 싫었다. 은재는 불끈거리는 속을 제어하고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네.]
“잘 있었어? 나야, 서은재.”
[…야―이! 나쁜 년아!]
***
“나쁜 년.”
“나쁜 년 소리 좀 그만해. 듣는 나쁜 년, 귀 딱지 앉기도 전에 성격 나빠지려 하니까.”
“넌 원래 성격 쓰레기였어, 이년아.”
6년 만에 마주한 친구 민서는 서운한 티를 감추지 않았다. 퉁퉁 부은 채 공격성을 띄었으나 은재는 한껏 기분이 좋았다.
“어떻게 6년 동안 소식 한 번 안 줄 수 있어? 적어도 생존 여부는 알려줬어야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죽었다는 부고가 가지 않으면 생존한 거야.”
“말 참 예쁘게 한다.”
“내가 예쁜 게 말뿐이야?”
“어휴, 저 얄미운 주둥이. 언제 귀국했어?”
“얼마 안 되었어.”
2년 전에, 라고 말하면 죽이려 들겠지.
“어디서 지내는데?”
도강윤 집.
“대충 구했어.”
죽는 데다 갈기갈기 찢길 듯해서 이 또한 둘러댔다. 어차피 기거 기간은 길진 않을 테니…….
“자꾸 성의 없이 대답할래! 나를 그동안 무진장 애태웠으면서! 내가 널 찾아다니느라 엄청 힘들었어, 이년아!”
“뭘 그리 찾아다녀. 빚도 없는데.”
“빚 있거든!”
농담으로 던진 말에 민서가 정색하더니, 다짜고짜 서류 뭉치를 꺼내어 탁! 내밀었다.
“나랑 계약하자.”
“무턱대고 무슨 계약?”
은재는 황당하여 눈살을 찌푸렸으나 민서는 싱긋,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곤 맨 위의 서류를 쓱 옆으로 밀었다. 밑에 가려져 있던 포토에세이가 나타났다.
“네 작품이지?”
“어? 이거 한국에서도 팔아?”
“요즘 같은 세상에 저작자 계약도 없이 팔겠니? 프랑스 프리마켓에서 주워왔다. 한눈에 네 작품인 거 알았지.”
“어떻게?”
“내가 네 사진을 왜 몰라.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색감이나 구도가 영락없이 서은재이던데.”
설명하던 민서가 책자의 작가명을 짚었다.
“그리고 이 작가명, mido. 고등학교 때 내가 너한테 지어준 필명이었잖아. 맞지?”
“딱 걸렸네.”
은재는 시인했다.
사진작가가 꿈이었던 그녀의 사진을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민서는 ‘미친 구도’라며 제멋대로 ‘mido’라는 필명을 갖다 붙였다.
“걸린 김에, 나랑 계약하자.”
“싫어.”
“야!”
“나와 만난 목적이 계약이야? 난 친구 만나러 온 건데? 아니면, 난 가고.”
“더럽게 깐깐하다니까. 알았어! 치사해서, 오늘은 관둘게!”
민서가 구시렁거리며 책자와 계약 관련 서류 뭉치를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서 편한 친구로서 화제를 돌렸다.
“어떻게 지냈어?”
“잘.”
“비싸게 굴지 말고, 그간의 행보를 줄줄 브리핑해라. 유럽에 쭉 있었어?”
“응, 유럽에만. 지구를 정복하기엔 6년은 짧더라고.”
“뭘 지구까지 정복해.”
“이 지구상에 내가 머물 곳은 없잖아.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다녔어. 내가 완벽한 이방인이라 오히려 편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