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17화 (18/84)

17.

번쩍!

은재는 눈을 떴다.

삽시간에 시각을 희롱하던 빨래판 복근은 사라지고 없었다.

“미쳤나 봐.”

깨자마자 꿈이었음을 자각한 은재는 격한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다 얼굴을 묻었다.

각인된 것처럼 도강윤의 관능적인 몸체가 뇌리에서 선명하게 떠다녔다.

“이, 음험한…….”

어떻게 그렇게 적나라한 꿈을 꿀 수 있을까. 심지어 자신이 더 그를 원했다.

쉴 새 없이 성적 자극을 퍼트리는 남자와 한집에서 머무는 탓일까?

‘이럴 줄 알았어!’

억울한 기분마저 들어서 은재는 베개를 주먹을 팡팡 때렸다.

‘어떻게 지운 6년인데…….’

좌절감도 용솟음쳐서 왈칵 눈물이 나려 했다.

뜨겁고 울렁울렁한 심장을 가라앉히려, 은재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다 머리부터 들이밀고 한참 동안 맞으며 열기를 식혔다.

그러곤 1층으로 내려가는 순간은 단두대에 오르는 것처럼 끔찍해서 머뭇머뭇 망설였다.

―Good morning. 임원진과 조찬 회의가 있어 먼저 나간다. 강윤.

다행히 은재를 맞이한 건 정수기에 붙은 메모였다.

시원스럽게 갈겨쓴 필기체에서마저 도강윤다운 자신감이 만발했다.

“도강윤, 진짜 많이 노력하네.”

은재는 혼잣말로 감탄했다.

그의 메모도, 그의 굿 모닝도 한없이 낯설지만, 또 싫은 기분은 들지 않아서 기분이 묘했다. 그러면서 하단의 ‘추신’을 마저 읽었다.

―추신 : 오전 9시에 손님 올 거야.

“손님? 갑자기?”

은재는 갸웃하며 오전 8시 10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힐끔 봤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민경애 여사의 방문을 예보한 건 아니겠지?

***

“하아. 하아.”

그녀는 맹렬한 파도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널찍한 가슴팍을 지지대처럼 짚고서 몽환적인 시선을 차창 너머의 밤하늘에 뒀다.

“아! 아!”

“헉. 허.”

오롯이 서로의 감각에 사로잡힌 채 그 또한 격한 탄식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런 와중에도 행여 그녀가 중심을 잃고 떨어지지 않을까, 그녀의 늘씬한 허벅지를 보호하듯이 잡았다.

“…현서야.”

재민의 큰 손이 아름다운 여인의 목선을 애틋하게 어루만졌다.

재민에게 있어 현서는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자였다.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간절한 감정이 복받쳐서 심장이 울렁거렸다.

“아.”

그가 제 이름을 부르자, 현서가 옅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쓱.

재민은 유연한 상체를 들었다.

전신을 빈틈없이 붙인 채, 벙긋 열린 그녀의 입술을 삼키며 열렬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화염처럼 불타는 신체와 체온, 타액을 하나처럼 공유하며 그는 힘차게 요동쳤다.

그의 열렬한 몸놀림에 따라 현서는 더 극심한 황홀경에 빠졌다. 그리고 뜨거운 절정을 맞이했다.

“하.”

재민의 입술이 겨우 떨어졌다.

간신히 떼어낸 입술을 그녀의 목덜미에 묻고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겹쳐졌고, 끈적한 공기가 두 사람의 틈새로 파고들었다.

“후.”

현서는 심호흡하며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현서야.”

재민이 불렀지만, 그녀는 땀으로 뒤범벅된 몸에 가운을 걸치며 대꾸하지 않은 채 침실에서 빠져나와 주방으로 가서 냉수를 따라 마셨다.

벌컥벌컥.

단숨에 찬물을 들이켜던 현서는 멈칫했다.

입속으로 번지는 차가운 기운이 마치 도강윤 같았다.

“나쁜 놈.”

현서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잔을 거칠게 식탁에 내려놓았다.

“날 뭐로 보고.”

어제 의성대병원 로비에서 자신에게 무정하게 등 돌리고 가버린 강윤의 태도가 밤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너무나 치욕스러웠고, 참을 수 없이 분했다.

그를 붙잡으려 뒤쫓았다가 놓쳤고,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무참히 거절당했다.

버려진 것처럼 홀로 있던 현서는 그 상태로 재민에게 찾아왔다. 밤새도록 그의 품에 안기며 그 울분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 불쾌한 기운은 가시지 않았고, 이런 와중에도 머릿속은 온통 도강윤 생각뿐이었다.

“그런 놈이 뭐 좋다고.”

스물네 살 귀국 파티 이후부턴 아예 자신을 벌레 보듯 하는 남자인데…….

경영수업 유학을 떠났던 도강윤의 귀국 소식을 접한 현서는 그를 잡을 기회라고 여겨, 파티 중독자인 채종훈을 꼬드겼다.

채종훈은 게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도강윤의 열렬한 추종자이니 선뜻 수락했고, 현서의 계획대로 도강윤의 귀국 축하 파티는 삼현그룹 프라이빗 하우스에서 이뤄졌다.

“건배하자.”

“난 됐어.”

파티가 한창 무르익던 시점, 현서가 맥주를 건넸지만, 강윤은 어김없이 거부했다. 그러자 도강윤의 열렬한 신봉자 같은 무리가 한 소리씩 보태었다.

“채종훈이 너의 아버지 설득해서 기껏 주최한 파티인데, 주인공이 너무 심드렁한 거 아니냐?

“그래, 인마. 무시하는 걸로 보여.”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데, 적어도 맥주 한 잔 정도는 해줘.”

친구들 등쌀에 못 이긴 강윤은 드디어 알코올을 섭취했다. 그리고 몇 분 안 되어 2층 객실에서 기절하듯 잠들었다.

“씩.”

현서의 진짜 속셈은 이것이었다.

도강윤을 제 남자로 만들기 위한 계략.

우연한 기회에 ‘맥주 한 잔에도 기절하듯 자버리는 알코올 쓰레기 도강윤’이라고 투덜거리는 채종훈의 혼잣말을 들었던 현서였다.

그래서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남자에게 술을 먹인 후, 정사를 나눈 것처럼 꾸몄다.

깊이 잠든 그의 옷가지를 벗기고, 자신도 알몸인 채로 침대로 들어가 이두박근이 도드라진 그의 팔뚝을 베고서 누웠다.

왕성한 스물네 살의 남자가 홀딱 벗고 밀착한 여자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을 테니.

“넌 이제 내 거야.”

그와의 뜨거운 정사를 고대하며 현서는 그의 매끈하고 아름다운 몸을 더듬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도강윤은 살결만으로도 정신이 홀리는 것 같았다.

그때.

“…뭐 하는 짓이야?”

“강윤아.”

도강윤이 자신을 더듬는 손을 덥석 잡으며 깨어났다. 술에 취했던 남자 같지 않게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강윤아!”

강윤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현서를 냉랭히 뿌리쳤다.

“놔.”

“기억 안 나? 우리 잤어.”

현서는 부리나케 이불을 젖히며 제 알몸을 드러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텅 빈 눈동자로 직시하던 강윤이 돌연 쓱 상반신을 기울였다.

“임현서.”

나직한 저음은 음산할 지경으로 탁했다.

“네가 아무리 발가벗고 발악해도…….”

흠칫.

“난 너랑 안 자.”

한껏 조롱한 그는 냉혹하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서느런 눈초리조차 주지 않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도강윤, 내가 물러설 줄 알고?”

현서는 바르르 떨었다.

그때의 치욕이 아직도 선명해서, 기필코 도강윤을 제 남자로 만들겠다는 집념을 재차 불태웠다.

“같이 씻을까?”

침실에서 나온 재민이 뒤에서 현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그녀의 목덜미에 다정히 입 맞추었다.

“재민아.”

“응?”

현서는 돌아서며 그의 목덜미를 팔로 감았다. 농염하고 유연한 그녀의 몸이 재민에게 밀착했다.

“날 안기나 해.”

도강윤 대체자로서.

“좀 전보다 더 뜨겁게.”

***

딩동.

정각 9시를 알리며 초인종이 울렸다.

은재가 인터폰 영상으로 방문자의 정체를 확인하는 찰나, 별안간 헤실헤실 웃는 허여멀건 얼굴이 나타났다.

“작은 사모님~”

“헉.”

작은 사모님?

‘누구? 나?’

“사모님~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도강윤 상무님 수행비서 정호석입니다~”

질겁해서 정지한 은재를 알기라도 한 듯 호석이 신분증과 사원증을 꺼내어 렌즈 가까이에 들이밀었다. 하는 수 없이 은재는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듣던 대로 굉장히 미인이십니다, 사모님!”

“저기, 사모님 소린…….”

“제가 사모님을 얼마나 뵙고 싶었는지 모르시죠?”

기껏해야 스물서너 살가량인 듯한 호석의 주둥이는 모터가 달려 있었다. 도무지 제어할 수 없었다.

“제가 사모님 덕분에 유럽의 웬만한 나라 땅은 죄 밟아봤지 않습니까. 이렇게 뵙게 되어 감격스럽기까지 하네요.”

눈시울마저 발그스름한 그로 인해 은재는 당황스러웠고, 3분도 안 되어 급속한 피로를 느꼈다.

“사모님께서는 상무님처럼 정 비서라고 편하게 불러주시면 됩니다.”

“제게 볼일 있으신가요?”

“상무님께서 친히 보내셨습니다.”

친히?

호석으로부터 두 개의 쇼핑백이 건네졌다. 하나는 핸드폰 브랜드 로고가 있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유명 죽집 상호였다.

“핸드폰은 좀 전에 개통했으니 바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아… 네.”

어제 말없이 잠적한 여파인 모양이다.

빠르기도 하네.

“제 번호도 저장해 놓았으니, 볼일 있으실 때마다 개의치 말고 불러주십시오. 저는 사모님껜 무조건 5분 대기조입니다.”

“괜한 수고를 했네요. 저는…….”

“명예회장님께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 있으니, 필히 핸드폰을 소지하라는 상무님의 전언이십니다.”

사절하기 전에 호석이 선수 쳤다.

도강윤의 잔꾀임이 빤했으나 허튼소리는 아니었다. 은재는 군말 없이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호석이 떠난 후, 신분 확인까지 했음에도 의구심이 일었다.

호석은 완벽주의자에 근접한 냉철함을 가진 도강윤과 차원이 확연히 달랐다.

더불어 시끌벅적한 걸 질색하던 그가 저토록 번잡스러운 인간을 최측근으로 둘 리 없지 않은가.

징―

께름칙한 기분으로 쇼핑백의 핸드폰을 꺼냈다.

일순 핸드폰 액정에 기겁할 만한 글자가 떴다.

―도강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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