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들킨 거다.
영민한 남자한텐 허술한 전술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다시금 이 남자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며, 은재는 낮은 호흡을 했다.
“도망가지 않아.”
그리고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놔줘.”
강윤이 그제야 은재의 몸을 놔줬다.
단단한 몸체가 막상 떨어지자, 진한 허전함이 솟구쳤다. 자신의 반응이 어이없어서 은재는 짐짓 심드렁하게 고개를 비틀었다.
“잠깐 나온 건데 웬 호들갑이야?”
“분리불안증이 심해져서.”
쓱.
불시에 다가온 그의 엄지가 은재의 턱선을 부드럽게 애무하듯 쓸었다.
“네가 내 눈 밖으로 벗어나는 게 싫어.”
찌릿한 스파크가 일어서 은재는 움찔했다. 폴짝 뛰듯 뒤로 물러나며 쏘아붙였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그에게 닿은 살갗이 후끈거렸다.
“경고하는데, 함부로 접촉하지 마.”
“그러지.”
그사이 여유를 되찾은 강윤의 입매가 얄궂게 길어졌다. 은재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붙박아두며, 묻고 싶은 충동과 싸웠다.
‘임현서는 어쩌고?’
그녀를 두고 온 걸까?
그녀가 갔기에 온 걸까?
“피곤해.”
하지만 화제를 돌렸다.
질투심으로 비롯된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옳다. 더불어 그의 감정도 되새기지 말아야 한다.
사람 심리 꿰뚫어 보는 데 뛰어난 남자한테 약점이 되어 잡아먹힐 수 있으니.
“펜트하우스로 갈 거지?”
“응. 라면 사서 가야 해.”
“그래.”
은재와 강윤은 내면에 잠식된 감정들을 덮어둔 채 일상적인 관계처럼 무던한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의 공간인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라면을 사들고서.
***
“과해.”
펜트하우스로 귀가하자마자 은재를 반긴 건 명품관을 그대로 옮긴 듯한 선물 보따리였다.
어쩔 수 없이 한두 개만 고르려 했으나 통 큰 남자는 용인하지 않았다.
“괜히 비서님께 미안하네.”
이 물건들의 픽업은 수행비서에게 맡긴 강윤이었다.
그의 비서인 게 뭔 죄인지, 일요일에도 상무의 명령대로 이 물건들을 날라서 드레스룸으로 옮겨 꼼꼼히 정리까지 해놨다.
“내가 그렇게 초라한가?”
화려한 옷과 구두, 가방 등으로 꽉꽉 채워진 드레스룸을 둘러보며 구시렁거리던 은재는 민경애 여사의 말을 떠올렸다.
“네가 우리 아들과 함께 있는 그림을 또다시 보게 되다니……. 더구나 그런 남루한 행색으로.”
“그런 말을 들을 바엔.”
청바지도 남루하다고 여기는 민경애 여사에 대항하려면 괜한 꼬투리는 제거하는 게 맞다. 도강윤도 그런 판단일 거다.
“싸우자, 이기자, 아자, 아자, 아자.”
은재는 영혼 없는 응원을 중얼거리며 1층으로 내려갔다.
슈트 재킷을 벗은 채 거실에서 기다리던 강윤이 일어났다.
“점검은 끝났어? 빠진 물건은 없고?”
“너무 많아서 뭐가 빠졌는지도 모르겠어.”
“그래. 모자라면 말하고.”
이 남자는 방금의 ‘너무 많다’라는 말을 도대체 어느 구멍으로 들은 거야.
“라면이나 먹을래.”
일일이 대응하기도 성가셔서 은재는 편의점에서 사 온 라면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갑자기 도강윤이 스스럼없이 그녀의 손에서 라면을 가져갔다.
“내가 끓일게.”
“라면은 끓일 줄 알아?”
“그럼.”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두자, 강윤이 으쓱하며 셔츠 소매 단추를 풀었다.
툭툭.
무심히 소매를 접는 모습마저 절제된 세련미가 있었다.
“라면은 먹어봤어?”
“한국인 중에 라면 안 먹어본 사람이 있을까?”
“하긴. 할아버지도 애호 식품처럼 드셨으니.”
삼현가에서 지낼 때, 불면증에 시달리던 은재는 모두 잠든 시각이 되면 홀로 정원에 거닐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다가와서 라면을 끓여달라던 도성만 회장이었다.
“할아버진 원래 라면을 싫어하셨어.”
“그럴 리가. 나한테 야식으론 라면이 최고라고 하셨는데…….”
“널 혼자 두지 않으려는 의도였지.”
“그랬구나…….”
은재는 또 한 차례 할아버지의 애정을 느꼈다. 도성만 회장만은 틀림없이 그녀를 사랑해 주셨다.
“내가 간 후엔 안 드셨겠네?”
“아니, 오히려 더 자주 드셨어. 내가 끓여 드렸지.”
네가 없는 그 허전함을 라면으로 달랬다, 는 뒷말이 들리는 듯했다.
“내 역할이라곤 고작 그뿐이었어.”
이어진 언사는 어렴풋이 회한 같았다.
자신의 몫임에도 자신이 해주지 못하는 그 나날들에 대해 미안함이 담긴.
‘아.’
은재의 심장이 조였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끊임없이 심장을 자극할까.
일부러 이러는 걸까. 고도의 작전으로.
“파는 있겠지?”
은재는 못 들은 척했다.
“가사도우미 아주머니 다녀가시니까.”
냉장고로 돌아서서 깔끔하게 정리된 내부에서 파를 찾아서 싱크대에서 씻었다.
뒤통수로 도강윤의 눈길이 감지하며, 수도꼭지로 흘러나오는 냉수를 온수처럼 뜨겁게 느꼈다.
***
“와.”
몇 분 후, 강윤이 기념비적인 라면을 대령했다. 자주, 라는 언사가 허세는 아닌 듯 솜씨가 가히 요리사급이었다.
“내 생애 도강윤이 끓여주는 라면을 먹다니…….”
은재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터졌다.
“감격스러워?”
“그 정돈 아니야.”
포장지의 이미지를 복사해서 붙여넣은 듯한 라면의 형태에 웃음이 났다. 매사 철두철미한 남자는 라면에도 빈틈이 없다.
“적당히 먹을 만해 보여 다행이다 싶어.”
“실망이군.”
강윤이 다소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못내 못마땅한 표정에 약 올리는 기색이 다분했다.
“애인한테 손수 끓여준 첫 라면인데 말이지.”
“자꾸 애인이라고 하지 마.”
“왜? 어색해?”
“어. 미치도록.”
“미친 애인은 고달플 것 같은데.”
“농담이라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진담이야.”
“하.”
도무지 이 남자를 이길 수 없다.
어이없으면서도 속없는 웃음이 터진 바람에 은재는 머쓱했다. 얼른 입술을 앙다물며 그를 샐쭉하게 흘겨봤다.
“어쨌건 라면은 맛있게 먹어줄게.”
“영광이야.”
도도한 그녀에게 강윤이 뻗댔다.
1년여의 결혼생활을 했던 그들은 처음으로 라면을 같이 먹기 시작했다.
면발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은재는 힐끗 그를 훔쳐봤다.
‘희한하다.’
이혼하고 더 단란한 분위기라니…….
이 묘하고 야릇한 분위기는 서로에게 ‘잘 자’라고 인사할 때도 이어졌는데, 그래서인지 은재는 묘한 달뜸을 간직한 채 잠이 들었다.
새벽녘.
끼익― 문이 열리며 거뭇한 인영이 방으로 들어설 때까지.
철렁.
잠결에 기척을 느낀 은재는 지푸라기처럼 시트를 움켜쥐었다.
“자?”
문가에서 나직한 저음이 물었다.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닌 듯 도강윤이 다가왔다. 검은 인영이 가까워질수록 남자의 강렬한 기운을 느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서은재.”
침대가 쑥, 내려앉으며 묵직한 체중이 실렸다.
이어 큰 손이 은재의 정수리를 지그시 덮었다. 손길일 뿐인데도 뜨거운 통증이 가슴골로 퍼졌다.
“선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몸이 추웠어. 한기가 든 것처럼.”
강윤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네가 또 떠난 게 아닐까, 두려웠어.”
깃털처럼.
“서은재.”
따뜻한 손도 은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너의 온기가 필요해.”
그윽한 목소리는 손길처럼 심장을 어루만졌고, 간절한 바람은 심장을 전율케 했다.
일순, 은재는 팔을 올리며 돌아누웠다.
서슴없이 그의 목덜미를 감으며 그를 제게로 당겼다. 그리고 기울어진 그의 입술에다 키스했다.
강윤도 주저하지 않았다.
치열을 가르고 입안을 헤집고 들어온 혀로 그녀의 혀를 감아챘다. 은재는 입술을 한껏 벌리며 제어했던 열정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열렬한 키스를 퍼붓던 그의 입술이 턱으로, 턱에서 목덜미의 살결 따라 내려왔다. 동시에 그녀의 옷 속으로 침범한 손길은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서두르지 않는 애무가 지독히 자극적이었고, 그의 탄탄한 몸에서 발산되는 열기와 갈망으로 은재는 미칠 듯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은재의 손이 자연스레 그의 상의 안으로 들어가 살결을 매만졌다. 벽돌처럼 딴딴했지만, 아연할 정도로 매끈하고 부드러웠다.
“…하.”
못 견디겠다는 듯 강윤이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단숨에 상의를 벗어 던졌다.
군살 없이 잘 다듬어진 팔뚝, 지독하게 섹시한 목덜미와 쇄골, 근육으로 다부진 가슴팍이 야성적으로 들썩였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서은재.”
포식자는 목하 잡아먹을 기세였지만, 은재는 도리어 열렬해졌다.
목마른 갈증으로 양손을 뻗었다.
‘어서.’
그를 애타게 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