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껄껄껄.”
만사태평하게 TV를 시청하던 도성만의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할아버지, 은재 20분 내 도착합니다.
“아이고! 이놈의 자식, 미리미리 알려주라니까.”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용의주도한 손자이기에 메시지 보낼 타이밍이 적절치 않았음이 분명했다.
“내 생에 화장을 다 해보고.”
첫 번째 단계는 혈색이었다.
그는 수납장 깊숙이에서 파우더를 꺼내 얼굴에다 덕지덕지 두들겼다.
“다음은.”
두 번째 단계는 환자의 기본 아이템이었다.
“회장님, 안색이 또 왜 이렇게 창백해지셨어요?”
“영 기력이 달려서 눈도 못 뜨겠어. 링거나 꽂아줘.”
호출받고 달려온 간호사에게 그는 앓는 소리를 냈다.
“또요? 회장님, 원 교수님 오시면 검사부터 하고 나서…….”
“웬 잔소리가 이리 많나? 노인들 몸에 좋다는 활력 비타민 같은 거 놔주면 될걸.”
“회장님.”
간호사는 난색을 보였다.
평소 태평양 같은 성품의 도성만이 연일 까탈스럽게 굴고 있었다.
주사도 질색하던 양반이 대체 왜…….
“어허! 빨리 놔달래도!”
“알았어요. 교수님께 여쭤보고 조치해 드릴게요.”
기죽은 간호사에겐 몹시 유감인 일이나 그는 불굴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자고로 링거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야 중환자다운 법이지 않은가.
***
“할아버지, 저 왔어요.”
타이밍에 행운이 따랐다. 은재와 강윤이 도착하기 3분 전, 도성만의 환자 분장은 완벽히 갖춰졌다. 무시무시한 주삿바늘을 감내하느라 괴로웠지만.
‘오늘도 열정이 넘치시네요?’
노란 비타민액을 일별한 강윤이 무언의 신호를 보냈고, 도성만은 실눈으로 응답했다.
‘요놈 자식아, 나중에 곱절로 갚아라.’
‘과하게 바르신 거 아닙니까?’
강윤은 할아버지 눈썹에 뭉친 파우더 가루를 포착했다. 은재의 관심은 오롯이 할아버지 안위에만 쏠려 있었다.
“열은 없으세요?”
“음…….”
쓱.
강윤의 우아한 손길이 할아버지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면서 손끝으로 가루를 자연스레 털면서 은폐에 성공했다.
“안색이 너무 창백하세요.”
“걱정하지 마라. 링거 맞고 있으니 곧 괜찮아지겠지.”
“이 수액이 약이에요? 잘 안 들어가나?”
도성만의 안색을 살피던 은재가 돌연 링거를 올려다봤다.
무심히 좇던 강윤의 초점에 링거줄의 라벨이 잡혔다. 명확히 ‘멀티 비타민’이라고 한글로 표기된.
“조절해 드릴까요?”
“내가 하지.”
발각될 위기라 강윤이 나섰다.
기민하게 자신의 넓은 등짝으로 은재의 시야를 가리며 감쪽같이 라벨을 뗐다.
“할 줄은 알아?”
“이 정도야.”
“줘.”
거만스러운 남자에게 코웃음 친 은재는 능숙하게 수액 조절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면서 무심결에 링거의 ‘MULTI VITAMIN’이라고 써진 영문 표기를 읽으려 했다.
“콜록!”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콜록, 목이 말라.”
“물 드릴게요.”
도성만의 탁월한 연기력으로 2차 위기에서 벗어났다. 철저한 강윤은 허술한 결함을 찾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병실은 전반적으로 깔끔했다. 너무 깔끔해서 문제라면 문제.
“드세요.”
“고맙다.”
은재로부터 물을 받아 마신 도성만은 행여 그녀가 수액에 관심 둘까 화제를 돌렸다.
“어딜 다녀왔어?”
“짐 챙겨 오느라고.”
“내 뜻을 들어주려고? 둘이 같이 살기로 한 게지?”
“네. 당분간 도강윤… 강윤 씨와 함께…….”
은재는 호칭 문제로 버벅거렸다.
6년 만에 할아버지 앞에서 부르려니 어색했다.
“나 때문에 우리 은재 피곤하겠네. 어서들 가거라.”
“저녁 식사 챙겨 드리고 갈게요.”
“한숨 자련다.”
“네, 그럼 저희는 이만 퇴장할게요.”
고집스러운 은재의 어깨를 강윤이 잡고서 돌려세웠다. 못내 미련이 남은 은재는 주춤거렸으나 강윤이 좀 더 힘을 줘 그녀를 이끌었다.
“아이고, 이제야 살 것 같네.”
비로소 도성만은 자유를 찾았다.
“저 똘똘한 은재를 속이려니 죽겠네. 도리어 더 빨리 죽겠다.”
그사이 눈자위는 거무죽죽했고, 온몸의 기력은 쇠진하여 피로도가 급상승했다. 눈꺼풀도 천근처럼 가물가물 감겼다.
“얼빠진 녀석.”
그래도 어릴 적부터 제 감정을 꾹꾹 누르며 냉정함을 무장한 채 살던 손자의 달뜬 표정을 보고 나니 더없이 행복했다.
“그리 좋을까.”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
“도 상무는 재혼 안 한다니?”
신화호텔 안주인이면서 강윤의 절친한 친구인 채종훈의 엄마인 이영은이 다짜고짜 물었다. 민경애의 여고 동창이기도 했다.
“뜬금없이 우리 아들을 왜 화제에 올려?”
“멋있는 도 상무가 혼자니까.”
날 선 민경애의 기류에 또 다른 친구 대영제약 사모인 안성미가 눈치껏 끼어들었다.
“도 상무 정도야 하고 싶으면 언제든 하겠지. 좋은 혼처 자리도 줄 섰는데.”
“하긴, 나이로 따지면 초혼 나이긴 하지. 워낙 일찍…….”
“아유, 쓸데없이 네가 왜 나서니? 네 아들이나 챙겨라.”
영은의 주책이 이어지자 성미가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비로소 영은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구시렁거렸다.
“맞아. 우리 채종훈이 코가 석 자다. 그 녀석은 대체 왜 연애를 안 하는 건지.”
‘흠.’
그들은 화제를 전환했으나 민경애의 심중은 폭발 직전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그녀는 잘난 아들의 이혼 경력이 치욕스러웠고, 그 원망은 고스란히 서은재에게 향했다.
‘이게 다 서은재 때문이야. 걔랑 결혼만 안 시켰더라도…….’
“여사님.”
은연중 어금니를 가는데, 안 비서가 정중한 태도로 다가왔다. 그러곤 다른 사모들이 듣지 못하도록 귓속말했다.
“상무님께서 서은재와 병원에 방문하셨습니다.”
“언제?”
민경애의 안광이 번뜩했다.
배 타고 유람을 한다더니… 또다시 병원에 얼쩡거려?
“얼마 안 되었습니다.”
“알았어.”
민경애는 디저트 포크를 내려놓고, 시커먼 속과 달리 기품 있게 일어났다.
“나는 이만 우리 명예회장님 병원에 가봐야겠네. 오늘 식사 계산은 내게 할게.”
안 비서의 호위를 받으며 그녀는 호텔 입구로 이동했다.
징―
세단의 뒷좌석에 오르자마자, 핸드백이 부르르 진동했다.
일순 심각한 낯에 발긋한 화색이 피었다.
[어머니!]
“현서야! 이게 얼마 만이니? 라스베이거스는 요즘 분위기 어때?”
[저 귀국했어요.]
“정말? 영화 제작은 끝난 거니?”
[아직 조금 남았는데, 저는 좀이 쑤셔서 그냥 왔어요.]
“시차 적응도 힘들 텐데, 나부터 챙기니? 고맙구나.”
[제가 마땅히 그래야죠.]
“어쩜 말도 예쁘게 하지.”
[근데 어머니, 강윤이 왜 전화 안 받아요? 걔 주말에도 혼자 바빠요?]
일순 민경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치솟는 부아를 누그러뜨리고 우아하게 되물었다.
“우리 도 상무가 전화를 안 받니?”
[그렇다니까요. 전화뿐만 아니라 메시지도 계속 씹네요? 통화 안 될 이슈가 있는 건 아니죠?]
있긴 하지.
서은재라는 흉조.
“그럴 일이 어디 있니. 일만 하는 놈이라…….”
간교한 민경애의 눈빛이 사악하게 번뜩였다.
“현서야, 너 시간 있니?”
***
‘석연치 않아.’
은재는 의문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혼이 나갔던 첫날에 놓쳤던 허점을 발견해서였다.
‘병상도 허술하고…….’
일단 VIP 병실일 뿐 중환자실이 아닌 데다, 위중한 환자의 곁엔 응급용 의료기구는커녕 심전도 측정기도 비치되어 있지 않다.
“왜?”
“아니야.”
골몰한 그녀에게 강윤이 물었다.
심증만 있을 뿐, 불분명한 추론이기에 은재는 의심을 제기하지 않았다.
차차 찾아야 할 답이다.
“아무래도 내가 호칭을 정리해야겠어.”
은재는 로비로 나서며 화제를 전환했다.
“호칭?”
“응.”
아까 바보처럼 버벅거린 게 마음에 걸렸다.
강윤이 두 살 연상이지만, 은재는 삼현고등학교 최고 우상이며 스타였던 그를 친구들이 ‘도강윤’, ‘도강윤’ 하며 부르던 걸 따라서 입에 붙어버린 데다, 결혼한 후엔 반항 심리로 친밀한 호칭은 극히 거부했었다.
그런 탓에 호칭은 시의적절하게 변경했는데, 그와 단둘이 있을 땐 어김없이 ‘도강윤’이었고, 시어른들 앞에서나 대외 행사 때는 ‘도 상무님’이거나 ‘강윤 씨’였다.
오빠 소리는 지혁 씨 앞에서의 ‘아는 오빠’가 처음이었고.
‘나도 참 번거롭게 살았다.’
은재는 속으로 한심한 자신을 질책하며 말했다.
“도강윤이라고 계속 부를 수 없으니까.”
“새삼 왜?”
“내 습관만 바뀌면 되잖아. 할아버지 앞에서도 난감해.”
“그래서 뭐라고 부르려고?”
“적어도 연장자 대우는 해줘야지. 앞으로는 꼬박꼬박 강윤 씨라고 부를게.”
“안 돼.”
도리어 강윤이 거부했다.
“왜?”
“그렇게 부르지 마.”
결혼한 후에 처음 ‘도강윤 씨’라고 격식체로 불렀을 때처럼 이번에도 그는 질색했다.
“남들 보기에도…….”
“남이 무슨 상관이야.”
강윤은 자못 단호했다. 난처해서 은재가 올려다보자, 그가 다정한 눈빛을 내리깔았다.
“도강윤이라 불러.”
“…….”
“예전처럼, 지금처럼.”
그러곤 싱긋, 미소를 던졌다.
“난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좋으니까.”
더없이 산뜻한 미소에 홀린 심장이 뛰었다.
속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은재는 오만상을 썼다.
“도강윤이 정말…….”
심호흡도 했다.
“미친놈이 되었네.”
“하하하.”
은재의 투덜거림에 강윤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우며 왕왕 울렸다.
그의 섹시한 웃음소리에 기막히게도 허벅지 안쪽에 야릇한 전율이 흘렀다. 은재는 움찔하며 입술을 악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