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12화 (13/84)

12.

징―

페리호가 섬을 떠나는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강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제부터 집요하게 울려대는 것이, 발신자는 보나 마나였다.

“받아. 난 개의치 말고.”

눈치챈 은재가 무덤덤하게 턱짓하며, 바다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윤은 부러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니.”

[도 상무, 왜 이리 통화 연결이 어렵습니까?]

“죄송합니다.”

[어제부터 회장님께서 기다리는데 이리 연락이 안 되어서야……. 오늘 저녁에 삼현가로 들어오세요.]

“오늘은 안 돼요.”

[중요한 사안입니다. 열 일 제쳐두고…….]

뿌웅―

민경애의 말소리는 페리호의 우렁찬 기적 소리에 묻혔다. 뜻밖의 소음에 어머니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도 상무! 대체 어디입니까? 배를 탔어요?]

“네.”

강윤은 슬쩍 은재를 넘겨다보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유람을 나왔어요.”

“풉.”

[뭐라고요! 유람?]

곁에서 듣던 은재는 웃음이 터진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고, 민경애는 고성을 내지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도 상무! 이 어미를 놀리는 겁니까!]

페리호와 마찰하는 물결 소리조차 삼킬 정도로 쩌렁쩌렁한 울림에 강윤이 핸드폰을 제 귀에서 멀찍이 뗐다.

***

은재는 보란 듯이 제 곁에서 민경애 여사에게 얄궂게 구는 강윤의 빤한 의도를 읽었다.

일종의 독립 선언이었다.

설계대로 살며 일분일초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 후계자의 숨 막히는 환경에서.

품격 넘치는 삼현가의 이면은 지극히 강박적인 분위기였다.

그것은 유일한 후계자인 아들에게 향한 절대적 압박으로 작용했는데, 강윤으로선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은재도 그의 아내로서 여실히 체감했었고, 도강윤 또한 녹록지 않은 삶이라며, 딱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런 강윤이 변했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혈압에 좋지 않습니다.”

[내 걱정을 하려거든….]

“아버지께는 내일 회사서 뵙자고 해주세요. 이만 끊겠습니다.”

[도 상무!]

민경애 여사의 처절한 외침이 이어졌으나 강윤은 무정하게 통화를 종료했다.

은재는 그의 태세 전환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은근히 빈정거렸다.

“당신의 소중한 도 상무가 배반을 시작했네.”

“모자(母子) 사이에 배반이라니.”

강윤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보통의 모정은 감내, 라고 하지?”

그 특유의 능청스러운 표정조차 섹시한 건, 다른 이도 아닌 도강윤이라서였다.

“민 경애 여사님껜 어려운 일 같은데.”

“자주 겪으시면 내성이 생기겠지.”

“쿡.”

여유로움 이상의 태평함은 은재를 기분 좋게 만들었고, ‘어쩌면’이라는 기대감도 불러일으켰다.

“도강윤.”

그래서 모험을 강행하기로 했다.

“정말, 나랑 연애하고 싶어?”

강윤의 눈썹이 의외라는 듯 올라갔다. 그러곤 모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긍정의 턱짓을 했다.

“왜?”

“연애를 못 해봐서?”

“사기꾼 같은 대답 말고.”

은재는 거짓 능청인 줄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그의 연인이었던 건우건설 외동딸인 임현서에 대해서 따지고 싶었지만, 질투로 보일 듯해서 입 다물었다.

“왜 하필 나야? 도강윤의 연애 상대는 널렸을 텐데…….”

“난 거듭 밝혔어.”

은재의 신랄한 지적에 강윤이 단호히 피력했다.

“난 널 아내로 되돌릴 거라고.”

“…….”

“네가 날 신뢰하지 못하니, 그만큼의 노력을 하겠다는 뜻이야. 너와의 연애로.”

“이상하지 않아? 이혼한 아내와 연애하는 거?”

“우린 결혼부터가 이상하지 않았나?”

“하긴.”

은재는 수긍했다.

“이상한 결혼도 해봤으니, 이상한 연애도 해볼 만하겠네.”

자못 씁쓸한 혼잣말에 강윤의 눈빛이 깊어졌다.

흑막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읽히지 않아 혼란스러웠지만, 은재는 결단을 내렸다.

조만간 불어닥칠 위험을 해결할 묘수로선 적당할 듯하다.

“그래, 하자. 오늘부터 연애.”

“진정?”

강윤의 반응은 되레 시들했다. 무미건조하게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당연하지.”

“나와 사는 동안 겪게 될 분쟁에 방패막이 삼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는 맞다.

이 남자는 도대체 몇 수를 내다보는 걸까?

은재는 자신의 패를 대번 읽어버린 남자에게 자신이 휘둘리는 건 아닐지 적잖이 불안했다. 하지만 꼿꼿하게 대응했다.

“나도 보상심리가 있어. 그 정도는 대비해야지.”

“보상심리라…. 그래도 상관없어.”

뜻밖에 도강윤이 가벼이 받아들였다.

“어차피 서은재가 내게 설렘을 느껴서 연애하자고 할 리 없을 테고.”

이건 바보네.

벌써 많이 설렜어, 인마.

“난 서은재한테 안달복달 중이니까.”

강윤이 돌연 양팔을 펼치며 너른 가슴팍을 드러냈다. 냉큼 안기라는 듯.

“마음껏 활용해. 내가 지켜줄게.”

저도 모르게 발뒤꿈치가 움찔했다.

방심한 사이 그에게 휩쓸릴 뻔한 몸에 힘주며, 은재는 끔찍하다는 듯 물러났다.

“치워.”

“그럴 수 없지.”

하지만 매사 기세등등한 남자는 되레 은재의 곁에 붙다시피 섰다.

“내가 이제 서은재 애인인데.”

“애인?”

“왜?”

“이상해, 그런 단어 입에 올리지 마.”

“뭘 정색을 하고 그래? 연애하니 애인이지. 일단은 풋풋하게 시작할까?”

“어떤 풋풋함?”

극도로 경계하자, 동요하는 심장을 알아챈 듯 강윤이 한쪽 입술을 의뭉스럽게 휘었다.

“가령…….”

강윤의 큰 손이 슬그머니 은재의 손바닥 아래로 치고 들어왔다. 그러더니 쓱, 은재의 손을 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이런 거?”

이어 깍지까지.

깍지로 맞잡은 두 손에서 서로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이됐고, 밀착한 살갗으로 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음.”

심장도 덜컥, 했다.

은재는 기겁해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지만, 부러 오만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우리 진짜 이상하다.”

“좋은데?”

강윤은 시원스레 웃었다.

그 미소가 무척 달게 보였다.

바닷바람으로 휘감기는 머리카락조차 달착지근한 기류를 탔다.

아무도 모르게.

은재의 가슴골로 짜릿한 전율이 퍼졌다.

***

또각또각.

공항 게이트를 나서며 임현서는 핸드폰을 들었다. 몇 번의 신호음에 이어,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아…….]

라는 안내음이 들렸다.

집요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으나 같은 음성이 반복될 뿐이었다.

“아 씨, 도강윤!”

현서는 잘근거리며 공항 주차장으로 나갔다.

미리 도착하여 기다리던 박재민이 운전석에서 나와 손을 들었다.

“왔어? 장시간 비행기 타느라 피곤하지?”

“어.”

반색하는 그에게 현서는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짐꾼한테 떠맡기듯 제 캐리어를 넘겼다. 재민이 순순히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

“배고프지? 뭐 먹고 싶어?”

“입맛 없어.”

운전석으로 돌아온 재민은 다정다감한 눈길을 보냈지만, 현서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임현서. 1년 만에 보는데 눈이라도 마주쳐 주라.”

“재민아.”

“왜?”

드디어 현서의 초점이 그에게 꽂혔다. 그녀의 얼굴만 봐도 좋은 재민의 입술이 방실거렸다.

“도강윤 어디 있어?”

“뭐?”

“내 전화 계속 안 받네? 도강윤, 어디 있는지 수배 좀 해줘. 채종훈한테 연락하던가.”

재민의 웃음기가 가셨다. 굳은 얼굴로 운전대를 잡으며 정색했다.

“네가 해.”

“채종훈이 내가 연락하는 거 싫어하잖아! 재수 없는 자식,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훈계를 해?”

“그럴 만했어. 네가 강윤이한테 집착하니까…….”

“너까지 그딴 소리 할 거야?”

“알았어.”

싸늘한 현서의 눈초리에 재민은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흥, 콧바람 소리를 낸 현서는 도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도강윤의 자취를 찾았다.

“아! 그렇지! 내가 왜 그걸 잊었지?”

눈을 부라린 현서는 서둘러 연락처 저장 목록에서 목표를 찾았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간 후.

“어머니!”

[어머, 현서야! 이게 얼마 만이니? 라스베이거스는 요즘 분위기 어때?]

민경애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옥구슬처럼 간드러졌다.

***

“여긴 왜? 병원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당연지사 도성만 회장이 입원한 의성대 병원으로 향할 줄 알았는데, 강윤이 향한 곳은 명품관이었다.

“순서대로 해야지.”

주차한 차의 보닛을 빙 돌아온 강윤이 조수석 문을 열고서 손을 내밀었다.

“나와.”

무심코 그의 손을 잡은 은재는 움찔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덤덤한 척 물었다.

“무슨 순서?”

“손도 잡았겠다.”

강윤이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그러쥐고서 제 길을 이끌었다.

“애인으로서 선물도 해야겠지?”

“됐어.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일축하며 돌아서려는 찰나.

“어서 오세요, 상무님.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차장까지 마중 나온 매니저가 깍듯이 인사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도강윤을 고객으로 모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저희에게 연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언제?’

은재는 적잖이 황당했다. 그를 올려다보자, 강윤은 여유롭게 눈썹을 들썩하며 은재와 맞잡은 손을 꾹 쥘 뿐이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손도 잡혔고, 체면도 차려야 했기에 은재는 뿌리치지도 못한 채 순순히 매니저의 안내를 따랐다.

그리고 도착한 귀빈실엔 숨이 턱 막힐 만큼.

“최고의 선택을 위해 최선으로 준비했습니다. 마음껏 살펴보세요.”

역대급의 옷들과 잡화, 액세서리 등이 즐비해 있었다.

“허.”

흔히 볼 수 없을 굉장한 광경에 말문이 막힌 은재의 귀로 비스듬히 기울인 강윤이 속닥이듯 나직이 읊조렸다.

“모두 가져.”

소름 끼치도록 농염하게.

“보너스로 나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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