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11화 (12/84)

11.

자신만 보면 날을 세우던 나날들이 거짓말처럼 은재는 그의 키스에 열렬히 호응했다.

꽉꽉 막혔던 갈증을 풀 듯 짙고 깊은 키스를 나누며, 강윤은 본능적으로 제 아래의 그녀를 내리눌렀다.

이토록 열렬히 서로의 입술을 머금은 적도, 서로의 몸체를 붙인 적도 없었다.

천장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떨어질 수 없다는 듯 서로의 입술과 혀, 서로의 숨결에 몰입했다. 창밖의 빗소리가 소멸할 정도로.

쪽.

진득한 키스에서 달콤한 입맞춤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윗입술을 훑고 아랫입술을 베어 물다가, 서서히 입술을 떼었다.

“하…….”

가쁜 숨소리를 낸 은재가 가물가물한 눈꺼풀을 닫았다. 이내 꿈나라 급행열차를 탄 듯 까무룩 도로 잠들어 버렸다.

“음?”

강윤은 적잖이 당혹했다.

“설마?”

키스하다가 잠든 건가?

이런 경우가 있나 싶어서 어안이 벙벙했다.

그의 심정은 모르는 채 은재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새근새근 잘도 잤다.

“하.”

강윤은 어이없어서 실소했지만, 그러면서도 은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은재가 키스를 먼저 했다.

자신을 죽도록 증오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까진 아닌 거다.

‘어쩌면 너도 날 원하는 걸까?’

물론 다른 이와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그래도 키스는 키스다.

“서은재.”

결론을 도출한 강윤의 한쪽 입매가 길게 늘어났다.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살 넘겼다. 그러곤 고개를 숙였다.

“네가 도발한 거야.”

쪽.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넌 이제 내게서 도망 못 가.”

***

은재는 산뜻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창으로 비쳐드는 화사한 아침볕을 느끼며 기분 좋게 눈을 떴다. 그러다 익숙한 방 안의 제 침대에 누워 있음을 인지했다.

“어? 집이네?”

때문에,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꿈꿨나?”

이 소박한 섬으로 자신을 찾아온 도강윤도, 그와 함께 서울로 가서 할아버지를 만났던 일도 가짜 같은 꿈이었구나, 하는.

그도 그럴 것이.

“은재야.”

꿈결인 듯 꿈결이 아닌 듯, 자신을 다정히 부르는 강윤의 허스키한 저음을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었다.

말이 안 되는 기억이었다.

도강윤은 늘 ‘서은재’라고 꼬박꼬박 성씨를 붙여서 불렀다. 그가 다정히 ‘은재야’라고 부를 리는 결단코 만무했다.

“맞네. 꿈이네.”

한낱 환상 같은 도강윤은 그만 잊자.

“허락 없이 남의 꿈에 나타나지 좀 마세요, 도강윤 씨.”

은재는 엄포 놓듯 혼잣말하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생생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도강윤이 들어왔다. 씻은 듯 뽀얀 살결과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일어났어?”

“하!”

은재는 질겁했다.

“도강윤이 진짜 있어?”

귀신이라도 본 양 자지러지는 그녀의 행동에 강윤의 미간이 좁아졌다. 더러 불쾌한 기색이었으나 그답게 냉정하게 대응했다.

“내가 있으면 안 되나?”

“언제부터 있었어?”

“쭉.”

새삼스러운 질문이라는 듯 강윤의 답은 짧았다.

“그래, 그랬지.”

분별력 또렷한 그의 표정을 마주하자 은재는 비로소 정신 차렸다. 금세 판단력을 회복했고, 꿈속의 도강윤과 실재의 도강윤을 분간했다.

‘하, 멍청한 착각을.’

다만, 어젯밤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도강윤, 내가 왜 이 집에서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어? 어쩌다 배를 안 탄 거지?”

“기억 안 나?”

“응. 전멸이야.”

“전멸이라…….”

강윤은 음미하듯 그녀의 언사를 우물거릴 뿐 별반 설명을 잇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 별일 없었어.”

그리고 덧붙인 말이 고작,

“네가 고단했던 모양이야. 밥 먹다 말고 잠들었더라고.”

라는 거짓말이었다.

기억이 도려내진 것은, 갑작스러운 폭우에 강윤이 장사(壯士)처럼 상을 들어 옮기던 이후였다. 그런데 그는 그 사실을 감추는 핑계를 댔다.

왜?

배려인가?

은재는 자신의 뇌에서 발생한 블랙아웃의 원인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른 체하며 웅얼거렸다.

“깨우지 그랬어.”

“시체처럼 잠들었어.”

“괜히 나 때문에 섬에서 발이 묶였네.”

“섬에서의 하룻밤도 나쁘지 않았어.”

“씻고 나올게. 서둘러 가야겠어.”

의뭉스러운 강윤 또한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그의 태도가 의심스러웠으나 은재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서 욕실로 들어갔다.

“왜 또.”

그러고 나선 거울 앞에서 심란한 상념에 젖었다.

“치유된 거 아니었어?”

엄마가 돌아가신 밤과 비슷한 천둥소리와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리면 이상 증후를 겪던 은재였다.

“한국 와서는 이런 적 없는데…….”

증상은 특별한 행동장애는 없고, 블랙아웃이 된 것처럼 기억의 공백이 생기는데, 잦진 않은 증세라 자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의사 또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일종으로 컨디션과 스트레스의 영향일 거라는 의례적인 진단을 내렸을 뿐이다.

“어쩌면…….”

도강윤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어제 희성과 함께 있는 모습에서 유산한 아기를 떠올렸지 않은가.

“하.”

은재는 세면대 가까이 얼굴을 숙였다.

울컥거리는 감정을 잠재우기 위해 세면대 수도꼭지를 눌렀다.

쏴―

시원한 물소리가 울기를 감췄다.

***

‘잊었군.’

밤새도록 은재의 곁을 지켰던 강윤은 내심 안도했다. 어젯밤의 일을 잊은 그녀가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아쉽지만.’

둘이 나눴던 키스를 잊은 건 못내 서운했지만.

넌지시 넘겨보던 강윤의 시야에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건넛방이 포착됐다.

“암실?”

암흑의 공간엔 사진 현상 기구 등과 그간 현상된 사직이 벽면에 그득하니 부착돼 있었다.

지난 6년 동안의 서은재 발자취.

섬마을은 물론이거니와 핀란드, 파리, 이탈리아 등.

‘서은재답네.’

특히 독특한 구도와 색감으로 사람들의 표정이나 일상을 담은 사진은 상당히 매혹적이다.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그 안에 풍부한 감정을 담고 있는 서은재처럼.

“이 사진은…….”

강윤의 눈에 하나의 사진이 들어왔다.

로마 거리에 드러누운 채 담배를 태우는 노숙자의 사진으로 유난히 눈에 익었다.

어디서 봤지?

“왜 허락 없이 남의 공간에 들어와?”

“열려 있었어.”

싸늘한 힐책과 함께 은재가 암실로 들어왔다. 강윤은 벽면에서 물러났다.

“그렇다 해도 환영의 뜻은 아니야. 나와.”

“서은재.”

단호하게 일축에 강윤은 묵직한 눈초리를 두었다.

“넌 이렇게 사진이 좋으면서, 결혼했을 땐 왜 그렇게 쉽게 포기했어?”

스물두 살의 서은재는 사진을 전공하던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정략결혼이 이뤄지며 미련 없다는 듯 휴학했었다.

“포기가 아니야.”

어스름을 뚫고 은재의 씁쓸한 기운이 번졌다.

“체념이었지.”

“내 잘못이었군.”

강윤은 갈비뼈 안쪽이 욱신거렸다. 입안도 썼다.

“명확히 말하면, 도강윤의 잘못은 아니었지.”

“아니.”

은재의 말을 강윤은 냉담히 정정했다.

“내 잘못이야.”

너를 택했으면서 너를 외면했고, 끝끝내 널 지키지 못한 나의 책임.

명백히 나의 잘못이다.

“나와. 이번 배 타야 해.”

“그래.”

차디찬 은재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서둘러 집을 나서는 그녀에게 토 달지 않은 채 강윤은 묵묵히 따랐다.

노력할 거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후회로 지난 6년을 보냈으니, 무조건 만회해야 한다.

그녀를 놓치지 않도록.

***

페리호에 승선하며 출항을 기다리며, 은재는 의도적으로 강윤과 거리를 뒀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더없이 심란했다.

첫째로 전(前) 시어머니가 걸렸다.

‘이미 병원에서 부딪쳤고.’

도강윤과의 동거가 아무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때문이라도, 민경애의 개입은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민경애는 잘난 아들이 마치 본인의 작품이라는 양 집착하는 메두사 아닌가.

‘가장 큰 취약점은 바로 이 남자인데.’

은재는 슬그머니 강윤을 일별했다.

‘이 남자는 까맣게 모르겠지만…….’

지난 과거의 은재는 도강윤 때문에, 혼자 아프고 혼자 상처받았었다.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삼현그룹의 후계자인 데다 존재 자체로도 유명세를 달리는 남자는 대외적인 활동 땐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역할에 충실했다. 그래서 매번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후계자 잉태라는 명분으로 몸을 섞을 땐 그 치명적인 매력과 맹렬한 기교는 말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목석일지라도 사랑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토록 거부했던 자신마저…….

‘부정하고 들키지 않으려 애썼지만.’

은재는 지난 6년간 심신에 잔재한 그의 흔적을 지우느라 힘들었고, 이제야 훌훌 털어냈다.

그런데 다시금 시험에 빠진 기분이었다.

더욱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모순은, 그의 진짜 감정을 알고 싶은 욕구였다.

‘아니야, 알아서 뭐 해. 어차피 저 남자와의 결론은 정해져 있는데…….’

묵직하면서 서늘한 통증이 가슴골로 치밀었지만, 은재는 체념하듯 심호흡으로 떨쳤다.

그러고 나니 들쑥날쑥하던 감정이 차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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