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악!”
우르르, 쾅쾅!
연속된 천둥은 은재의 사고와 정신을 송두리째 가져가, 6년 전 그 밤으로 내동댕이쳤다.
우르르, 쾅쾅!
볼록한 배를 손바닥으로 끊임없이 쓸어대며, 창가에서 서성거리던 은재의 귀청을 엄청난 천둥소리가 뒤흔들었다.
“헉.”
불길한 징조 같았다.
아버지의 재판이 끝나고 실형이 확정된 날이었고, 아까 통화한 엄마는 이미 흠뻑 취해 있었다.
불안감이 증폭된 은재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부랴부랴 방에서 나갔다.
“서은재! 어디 가?”
“집에.”
쏟아지는 언론 기사로 인해 늦게 퇴근하던 강윤과는 현관 출입문에서 맞닥뜨렸다.
“데려다줄게.”
창백한 은재의 안색만 보고서도 강윤은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간파했다.
그는 은재가 젖지 않도록 차고로 이끌어 제 차에 태우고, 폭풍우가 쏟아지는 차도를 질주하여 은재의 친정에 도착했다.
탁!
“서은재!”
대문 앞에 도달하자, 주차를 끝내기도 전에 은재는 차에서 내렸다.
“헉. 헉.”
운전석의 강윤이 불렀지만, 마음만은 뛰고 싶은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대문을 열었다. 굵직한 빗줄기가 제 몸에 때리는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끼익.
대문을 열고 정원으로 들어선 순간.
우르르, 쾅쾅!
사위를 아우르는 우레로 시야가 번쩍했다. 동시에 3층 야외 테라스에서 휘청하더니, 거꾸로 떨어지는 인영이 보였다.
쿵! 턱!
지진이 온 것처럼 땅에 격한 진동이 전해졌다.
“악! 엄마!”
은재는 그 인영이 엄마임을 알아보았다.
정원의 석으로 떨어진 엄마에게 미친 듯이 달려갔다. 옅은 회색빛 바닥에 검은 액체가 스멀스멀 번지며 영역을 넓혔다.
“엄마….”
우르르, 쾅쾅!
은재는 차디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시뻘건 피로 흥건한 엄마의 머리를 들었다.
눈을 뜬 채 부들부들 경련하던 엄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은재야…….”
희미하게 우물우물한 입으로 은재는 귀 기울였다.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린 엄마의 눈이 무기력하게 감겼다.
“엄마! 엄마!”
은재의 처절한 비명은 비정한 천둥소리에 묻혔다.
“장모님!”
뒤늦게 들어온 강윤이 숨 가쁘게 달려왔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그는 침착하게 은재의 어머니 목덜미에 검지를 대어보고, 고개를 기울여 호흡을 확인했다.
사망했음을 확인한 그는 119 신고부터 한 후, 의식을 잃을 것처럼 울부짖는 은재를 붙잡으려 했다.
“서은재!”
강윤은 먼저 은재의 임부복 치맛자락이 붉게 물들어가는 걸 발견했다.
그의 눈초리를 따라 검붉은 핏줄기가 은재의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순간.
“아, 악!”
은재는 복부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골반이 뒤틀리고 발끝까지 저릿저릿할 정도로 고통스러워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도강윤!”
은재는 본능적으로 제 배를 감싸며, 그의 팔뚝을 불끈 움켜쥐었다.
“아, 아기… 아기가…….”
창백하다 못해 시퍼런 은재를 잡은 도강윤의 안색도 새하얗게 질렸다.
“내 아기……. 내 아기 지켜줘. 지켜줘, 도강윤.”
“내가 지켜줄게.”
그가 망설이지 않고 은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맹세코.”
망설이지 않은 채 대문 밖으로 이동했다.
성큼성큼, 그의 긴 다리가 뻗어질 때마다 은재의 하체에서 붉은 핏방울이 차가운 땅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바닥을 얼룩진 핏방울은 하늘에서 낙하하는 빗물을 머금으며, 장미꽃잎처럼 활짝 만개했다.
“악!”
은재는 떨칠 수 없는 기억으로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폭격 같은 빗줄기가 몸체를 두들겨도 꼼짝하지 못한 채 경련했다.
뇌의 기억에 자신이 완전히 매몰될 것 같았다.
“아, 아…….”
***
상을 바닥에 내려놓던 강윤의 귀에 은재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돌아선 강윤은 쪼그려 앉은 채 오들오들 떠는 은재를 포착했다.
“서은재!”
놀란 그는 즉각 달려갔다.
“왜 그래?”
“엄마… 엄마…….”
소란스러운 낙뢰와 천둥소리에 묻혔던 은재의 흐느낌을 강윤은 명료하게 들었다.
“아.”
그의 목구멍에서 탁한 날숨이 새었고, 아릿한 전율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기세로 흘렀다.
“…엄마.”
“은재야.”
강윤은 강경하게 은재를 부여잡았다. 저릿한 심장을 억누르며, 그녀에게 강경하게, 보다 또렷하게 읊조렸다.
“아니야. 지난 일이야.”
은재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마치 정원의 석 바닥에서 피범벅인 채로 누워 있는 엄마의 환시를 보는 양 까만 공기를 훑으며 후들거렸다.
“엄마… 엄마……. 흑.”
새파랗게 질린 은재의 눈동자에도 그렁그렁하게 액체가 차올랐다. 안쓰러운 마음에 은재의 팔뚝을 잡은 강윤의 손에 악력이 가해졌다.
“정신 차려!”
우르르, 쾅쾅!
“악!”
“서은재!”
은재가 두 귀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강윤은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자신의 품에서 바들거리는 몸체를 강하게 안고서 어르듯 토닥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허. 헉헉.”
극렬한 고통을 느끼듯 거칠게 호흡하던 은재의 사지가 축 늘어졌다.
“하.”
강윤은 혼절한 은재를 바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질끈.
아랫입술을 악다물고, 그녀를 단숨에 안아 올렸다. 그 상태로 돌담 너머 어둑한 섬마을을 휘둘러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
방바닥에 눕히는 동안에도 은재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 깨어나지 않았다.
강윤은 그녀의 인중에 뺨을 대고서 은재의 따뜻한 숨결을 느낀 후에야 안도했다.
“그래.”
그리고 슬픈 안광을 내리깔며, 은재의 이마에 큰 손을 댔다.
“차라리 자.”
다행히 열도 없었고, 그의 몸체가 막아줬기에 크게 젖진 않았다.
강윤은 수건을 가져와 젖은 그녀를 닦고, 방 안의 침대 시트를 정리해서 은재를 편안히 눕혔다.
그러고선 침대 맡에 앉아 은재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을 애틋하게 들여다봤다.
‘혼자 견뎠군.’
강윤의 기억회로도 6년 전 그 밤을 복기했다.
은재와 강윤이 결혼한 지 1년여가 흘렀을 때, 은재가 스물세 살이며 임신 6개월 차였던 그때.
지금 이 상황처럼 극심한 우레와 폭우가 쏟아지던 밤이었다.
아버지의 형량 확정 소식을 들은 후, 은재는 불안감으로 떨다가 결국 제집으로 달려갔었다.
그리고 대문을 열던 그 순간, 술에 취해 테라스에서 추락하는 자신의 엄마를 목격했고, 그 충격으로 23주였던 뱃속의 태아를 잃었다.
어린 그녀로선 감당하기 버거웠던 사건, 사고들이었다. 그래서 그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고스란히 남은 모양이었다.
“하.”
강윤의 가슴이 묵직한 흉통으로 숨이 막혔다.
몰랐다.
그 고통스러운 밤을 여태껏 간직하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아파했으리라곤.
“은재야, …미안해.”
강윤의 흐트러진 앞머리에서 맺혀 있던 물방울이 그의 허벅지로 떨어졌다.
눈물처럼.
뚝.
뚝.
“미안하다.”
***
어둠이 내린 방 안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잠결에 눈을 뜬 은재는 제 옆에 누워 있는 어슴푸레한 신체를 인지했다.
젖은 셔츠가 달라붙은 채 구부정하게 잠든 도강윤이었다.
‘도강윤이 있네.’
꿈결같은 그를 멍하니 보며, 은재는 머릿속으로만 그를 불렀다.
‘도강윤.’
마치 듣기라도 한 듯.
마치 응답하듯.
도강윤의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
일순, 은재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따뜻한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
빗속에서 혼절해 버린 은재기에 강윤은 한시도 한눈팔지 않은 채 지켜봤다. 젖은 제 몸으로 침범하는 한기도 느끼지 못했다.
“쌕쌕.”
은재가 규칙적인 호흡을 내쉴 때쯤, 고단한 강윤은 쓰러지듯 그녀의 곁에서 잠들었다. 그러다 잠결에 시선을 감지했다.
눈꺼풀을 올렸을 때 어렴풋이 은재의 형상이 보였다.
순간, 그녀가 그에게 키스했다.
파들.
강윤의 속눈썹이 여릿하게 떨린 것도 잠시, 애탄 그의 손은 은재의 뺨을 감쌌다. 동시에 제 상반신을 들고서 입술을 맞물었다.
부드러웠다.
야들야들한 입술의 감촉.
뺨에 닿는 속눈썹의 풍성한 촉감.
깃털처럼 자신의 뺨을 간질이는 속눈썹에 입매가 저절로 늘어났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싸며, 도톰한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쓰다듬다가 힘주어 벌리며 혓바닥을 밀어 넣었다.
열린 잇새로 새어 나오는 은재의 달짝지근한 숨결을 단숨에 빨아들이며, 능란하게 그녀의 혀를 낚아챘다.
그러면서 큰 손으론 그녀의 턱을 감싸며 세밀하게 파고들었다.
“음…….”
작은 혀를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처럼 열렬히 빨아대며 충분히 맛보았고, 입속의 구석구석까지 각인하듯 꼼꼼히 탐닉했다.
결단코 나눠본 적 없는, 밀도 있는 키스의 시작은 남녀의 입술과 입술을 겹쳐지고, 혀와 혀가 묶고서 서로의 타액을 섞었다.
17세에 충돌 같았던 첫 키스가 아닌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로 집중되는 키스였다.
그들의 키스는 짜릿했다.
탄식 같은 신음성이 나올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