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에 반응하듯 은재의 목구멍은 거품이 가득한 듯 부글거렸다.
‘참아.’
은재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입술을 꽉 물었다.
이 시기에 입술을 떼었다간, 아무 말이라도 터트렸다간, 그에게 흔들리는 자신의 밑바닥을 내보일 듯했다.
***
은재는 한동안 강윤과 적당한 간격을 둔 채 드넓은 바다만 바라봤다.
시각은 바다에 두었지만, 그 외적인 감각은 오롯이 그를 탐색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무랄 데 없이 멋진 남자가, 바로 이렇게 제 옆에 있었으므로 모든 의식이 예리하게 그에게만 뻗쳤다.
정말 한심한 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저기, 죄송한데요.”
그들의 빈틈에서 움튼 정적을 깨트린 건, 페리호 탑승객인 학생 커플이었다. 남학생이 전문가용 카메라를 든 은재에게 부탁했다.
“저희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네, 그러죠.”
차라리 딴 일에 집중하는 생각에 은재는 선뜻 수락했다. 남학생이 자신의 핸드폰 카메라를 내보이며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다녀와.”
그때, 강윤이 부부였던 때의 대외적인 미소를 장착하며, 다정하고 품위 있는 남편으로 분해 은재의 카메라를 친히 가져갔다.
‘하여간 여우 같은 남자.’
은재는 혀를 내둘렀다.
어릴 때부터 삼현그룹의 후계자로 철저하고 체계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왔으니, 저 기품은 타고난 거나 진배없었다.
“바로 찍어드리면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은재의 말에 거듭 인사한 어린 커플이 신나서 폴짝거리다가, 뱃머리 난간에서 서로를 안다시피 자세를 취했다.
“하나, 둘….”
연애 초기인 모양이었다.
눈만 마주쳐도 저절로 늘어나는 입매, 서로를 안은 손의 작은 꼬물거림조차 토끼 구름 같은 몽글몽글한 설렘이 가득했다.
‘도강윤.’
은재는 내심 뽀로통한 마음이 깃들었다.
‘연애는 보통 저렇게 하는 거야. 이 연애의 연(戀) 자도 모를 남자야.’
찰칵― 찰칵―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도 찍어드릴까요?”
몇 장의 사진을 찍어준 후 핸드폰을 돌려주는데, 눈치 없는 남학생이 물었다.
“아니….”
“고맙습니다.”
불쑥 강윤이 선수 쳤다.
그의 민첩하고 재빠른 동작으로 허락 없이 은재의 카메라가 넘어갔고, 전문가용 카메라를 받은 남학생이 반색 어린 흥분을 했다.
“와, 필름 카메라네요? 이 제품 엄청나게 고가라고 들었는데…. 괜히 겁나네.”
“사용하기 까다로우실 거니 안 찍으셔도 돼요.”
“엄청 전문가이신 모양이네요. 아까 사진 찍는 포스도 장난 아니시던데.”
“그냥 주세요.”
카메라에 대해 기본지식은 있긴 하나 초보적인 느낌이 강했다. 뺏어올 기회라 은재는 얼른 손을 뻗었다.
“제 친구도 필름 카메라를 만지거든요.”
그런데 눈치 없는 남학생은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는 듯 카메라를 요리조리 감상했다.
“그래서 저도 몇 번 써봐서 대충 조작법은 알아요.”
“아… 아시는구나.”
실망이다.
“한번 열심히 찍어보겠습니다!”
“굳이 열심히까진…….”
“이리 와.”
퀭해진 은재를 강윤이 강한 손으로 옭아매듯 잡아끌어서 제 옆에다 데려다 놓았다. 옆구리가 밀착되듯 간격이 좁아 은재는 비딱하게 허리를 비틀었다.
“찍을게요!”
뻣뻣하게 굳어진 그녀에게로 강윤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은재의 귓불에 닿을 정도로 입술을 댄 그가 은밀하고 농염하게 속닥였다.
“웃어.”
“…….”
“이왕이면 행복하게.”
강윤의 한쪽 입꼬리도 얄궂게 올라갔다.
“아니면, 뺨에 입이라도 맞출까?”
“…한 대 얻어터지고 싶으면.”
얄미운 남자에게 어금니를 바르르 갈며, 은재는 흰자위 많이 보이게 쏘아보았다.
“저…….”
너무 둘만의 세상이었나 보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술을 우물우물한 모습이 타인의 눈엔 애정의 속삭임으로 보였으리라.
“…찍어도 될까요?”
남학생은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우물쭈물했다.
“그럼요.”
“찍으십시오.”
돌연 강윤과 은재는 부부였던 시절의 습관대로 상냥한 미소를 띤 가면을 쓰고, 우아한 고갯짓을 동시에 했다.
찰칵―
연이어 터진 셔터음과 함께 은재는 자신의 미소를 자각했다.
‘아.’
한심해.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 하나 보다. 아무리 도강윤의 영향이라지만, 어떻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한 장 더 부탁해요.”
은재가 자신을 질책하는 사이, 강윤이 남학생에게 요구했다. 그러더니 은재의 허리를 감싸서 안다시피 제 몸에다 밀착시켰다.
“네!”
찰칵―
의식할 새도 없이 두 번째 사진이 찍혔다. 주위에 몰려 있던 구경꾼들이 너도나도 한 소리씩 했다.
“어찌 저리 배우들처럼 곱게 생겼을까.”
“신혼부부인 갑네.”
이혼 부부입니다!
“고마워요.”
은재는 우렁차게 표명하고 싶었다. 강력히 부정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진이 빠졌다.
“제대로 찍었는지 모르겠는데, 한 번 더…….”
“아뇨!”
이 사태의 해결책은 저 눈치 없는 남학생으로부터 카메라를 회수하는 길뿐이었다.
“고생 많았어요.”
“필름은 현상해야지만 잘 나왔는지 알 수 있죠?”
현상도 안 할 겁니다.
“네, 주세요.”
“아, 예.”
질척거리는 학생에게 단호하게 가로채고서, 은재는 몹쓸 물건이라도 되는 양 카메라를 가방에다가 깊이 쑤셔 넣었다.
“하.”
오전일 뿐인데, 한나절을 보낸 듯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픽.”
그녀의 속내를 읽은 강윤이 설핏 웃었다.
매섭게 노려보자, 그는 느긋하게 난간에 기대며 광활한 바다를 주시했다.
독백처럼 읊조리며.
“폭풍이 왔으면 좋겠네.”
흠칫.
‘폭풍?’
은재는 저도 모르게 오소소 떨었다.
천재지변은 염두에 두지 못했다.
만일 폭풍이 들이닥친다면 유일무이한 뱃길이 끊긴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그와 섬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아, 내가 왜 이런 시한폭탄을 떠안고.’
우매한 자신을 탓하며 은재는 하늘을 켜켜이 덮은 뭉게구름을 올려다봤다.
이 여정이 지극히 불안했다.
***
강윤은 은재의 집에 첫발을 내디뎠다.
바다가 배경인 작은 텃밭을 둔 마당과 청명한 초록 지붕을 가진 시골집이었다.
“짐 챙겨서 나올게.”
“도와주지.”
“아니, 필요 없어.”
은재는 냉담히 차단했다.
“한 발짝이라도 들였다간 주거침입죄로 고소할 거야.”
“이미 반은 침입했어. 너의 허락하에.”
강윤은 눈썹 하나 꿈틀 안 했다. 제 목표 타진을 위해 물러섬이라는 없던 남자였다.
“집 안은 해당 없어.”
“손바닥만 한 집에 구역이 있군.”
“오만 떨지 마. 그 누구의 손바닥도 이리 크진 않아. 물러나.”
“볼일 보십시오.”
그러나 이번엔 은재의 뜻을 공손히 따랐다.
어디까지나 은재의 거처였으며, 무리한 접근은 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세웠기에.
쾅!
곧 쌀쌀맞게 문이 닫혔다.
뜬금없이 갈 곳을 잃은 강윤은 느긋하게 마당을 가로질러 돌담으로 다가갔다.
“흠.”
집은 짙은 청색의 바다를 품었고, 부둣가의 페리호와 드넓은 수평선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네가 사는 곳이군.’
도회적인 여자와 불균형한 장소라 여겼는데….
강윤은 제 머리카락과 살결을 수줍게 건드리는 바닷바람을 느끼며, 왜 서은재가 이곳에 머물렀는지 조금은 이해됐다.
이곳은 은재의 평화였다.
‘내가 너의 평화를 깨트리는 걸까.’
강윤은 심장이 아릿했다.
정략결혼이 뭔 줄도 모르고, 은재를 향한 욕심으로 그녀의 동의 없이 멋대로 자신의 인생에 끌어들인 결과는 참혹했다.
서로를 가장 끔찍한 적으로 만들었으니.
‘서은재, 나는 또 실수하는 걸까.’
제 욕심으로 비롯된 결혼으로 인해 은재가 불행해진 것처럼, 자신이 은재 앞으로 나타나므로 해서 그녀를 또 불행의 늪으로 빠트리는 건 아닐는지 강윤은 두려웠다.
“도강윤의 아내였을 때의 서은재는 도외시하고선, 왜 이제야 서은재가 궁금할까?”
너의 질문처럼.
왜 이제야, 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은재야.
서은재.
가슴속에서 두려움 이상의 감정이 용솟음치고 있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애틋함과 절실함이 심장을 짓누른다.
그러니, 돌아설 수 없다.
서은재.
은재야.
나는 간절히 널 원한다.
***
징―
한참 동안 강윤은 돌담에 기대어 하릴없이 수평선을 응시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인식하지 못할 때, 그의 상념을 깨트리는 전화가 왔다.
어머니 민경애 여사로부터였다.
강윤은 은재의 공간에서 어머니와 통화하는 어리석은 짓거린 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냉담히 거절 메시지를 발송하고 안쪽 주머니에 도로 넣던 시선 끝에 먼발치의 하늘이 포착되었다.
일순.
“픽.”
강윤의 아름다운 입매가 비릿하게 휘었다.
아주 멀리, 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