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만진 적 없거든.”
은재는 버럭 화냈다.
“놔!”
거칠다시피 그를 밀어내고 격렬히 노려보았다.
그의 살에 닿았던 손바닥이 덴 것처럼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욕실에 달려가서 차디찬 물에 식히고 싶었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어서 은재는 주먹을 바락 움켜쥐었다.
“어째서?”
의외로 도강윤이 순순히 물러났다.
그러곤 터럭만큼도 여유를 잃지 않은 채 자못 능청스레 눈썹을 들썩였다.
“우린 적어도 세 번 이상의 잠자리를…….”
“그 입 다물어.”
“예.”
싸늘한 경고에 그가 예의를 갖추며 물러났다. 적응 안 되는 능청스러움에 신경이 거슬렸지만, 은재는 무덤덤한 척 연기했다.
그러나 주책스러운 뇌리는 어느덧 그와의 잠자리를 상기하고 있었다.
그는 대충 센 듯했으나 정확히는 다섯 번의 잠자리였다.
정상적이지 않은, 지독한 초야부터 시작된 매달 도장 찍듯 가졌던 그와의 정사.
은재는 그의 벗은 몸을 보지도, 느끼지도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악착같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쥐거나 시트를 움켜쥐고서 버텼다.
그의 몸을 끌어안지 않으려 부단히도 애썼고, 그에게 완전히 함락되지 않으려 사투를 벌이듯 입술에 피가 배어나도록 참아냈다.
그럴수록 강윤의 폭주는 극렬했다. 그녀의 저항에 미쳐 날뛰는 폭군처럼.
죽음보다도 더한 괴로움이었다.
지독히 치명적인 남자를 거부하며, 마약처럼 정신을 취하게 만드는 남자에게 빠져들지 않기란.
불행인지 다행인지, 둘의 그 전쟁과 같은 잔혹한 밤은 시부모의 바람대로 아기를 잉태하며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은재는 어쩌면 도강윤에도 해방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배 속의 아기를 느꼈을 땐…….
“음.”
은재는 울혈처럼 심장에 맺힌 상념을 얼른 떨쳤다.
여차하면 그의 앞에서 붉은 눈동자를 드러낼 수 있기에 서둘러 거실로 나갔다.
“이 시각에 어디 가?”
“집에.”
그녀의 속내를 모르는 강윤은 제 분신 같은 카메라 가방을 챙기는 그녀를 담담한 시선으로 좇았다.
“그 섬에? 왜?”
“짐을 모조리 놓고 왔잖아. 집도 그대로 둔 채이고.”
“데려다주지.”
“혼자 다녀올 거야.”
“기차 타고? 아님, 고속버스? 되돌아오는 길엔 짐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서? 왜 편리함을 두고 미련함을 선택하지?”
현명한 지적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은재가 말없이 갈등하며 침묵하자, 강윤이 피식, 가벼이 웃으며 허리를 돌렸다.
“기다려. 옷 입고 나올게.”
‘아.’
미끈한 동작으로 실룩하는 그의 섹시한 치골에 시선이 저도 모르게 꽂힌 순간, 은재는 좌절감 같은 걸 맛봤다.
***
“여사님.”
안 비서는 가든 테이블에서 푸릇한 아침 공기를 쐬고 있는 민경애에게 다가왔다.
“상무님께서 서은재와 함께 외출하셨습니다.”
“언제?”
“동이 틀 때쯤.”
“새벽에 함께 외출이라는 말은, 어제 결국 서은재가 펜트하우스에서 잤다는 거야?”
“그렇게 추정됩니다.”
“아, 머리야.”
“약 가져올까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민경애는 됐다고 손사래 쳤다.
“둘이 아침부터 어딜 갔는데? 아버님 병원인가?”
“아닙니다.”
“그러면?”
“죄송합니다. 상무님께서 미행을 눈치채셔서…….”
“놓쳤다고?”
“네.”
“목적지도 모르고?”
“그렇습니다.”
도강윤은 워낙 명석하고 약빨랐다.
감시자의 동태를 파악했음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오늘처럼 중대한 미행에선 정보원을 완벽하게 따돌렸다.
정보원은 혀를 내두르며 ‘여태 겪지 못했던 까다로운 대상자’라고 전했다.
“유능한 안 비서가 연이틀 내게 실망감을 안겨주네?”
“죄송합니다.”
“어쨌건, 그 멍청한 정보원에게 전해. 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두 사람의 사진을 가져오라고.”
“사진이요?”
“이왕이면 밀착한 사진이 좋겠어. 서은재를 당황하게 할 만한.”
우아하고 기품 있는 여사의 심리에 매서운 독기가 파고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극진하게 키운 아들 곁에 서은재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견딜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안 비서는 민경애 여사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대략 간파했다. 즉각 수용하며 끄덕였다.
***
탁.
명쾌하고 자신만만한 걸음새만으로도 시선을 가로채는 남자가 날렵하게 페리호에 승선했다.
그의 자태에 여성 승객들이 이끌리듯이 훔쳐보는 걸 감지하며 은재는 남모르게 한숨 쉬었다.
‘정말 적응 안 되는구나.’
호위하듯 자신에게 바짝 따라붙는 남자의 존재로 압박감이 가중되었다.
심지어 다른 이와 동반한 적 없던 길이었다.
“날이 좋군.”
늘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던 강윤이었기에 그는 인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가 일상인 뱃사람처럼 난간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광활한 수평선을 내다봤다.
“토끼도 있고.”
이 자연스러움이 하나의 작품 같았다.
기막힐 지경으로.
은재는 도강윤보다 자신이 미웠다. 부러 무관심을 일관하며, 푸른 하늘의 하얀 토끼한테만 초점을 뒀다.
그러나.
찰칵―
집중하여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도, 그의 모든 것을 의식했다.
아른아른한 실루엣.
바람결처럼 풍겨오는 좋은 향.
심해처럼 깊은 시선.
뿌웅―
이윽고 여객선이 긴 뱃고동 소리를 뿜으며 바닷길을 갈랐다. 하늘로 중심을 뒀던 은재는 휘청했다.
“앗.”
“조심해.”
강윤이 반사적으로 휘청하는 허리춤을 감쌌다. 덕분에 은재의 몸은 그에게 안기는 꼴이 됐다.
“…고마워.”
“천만에.”
넓고 단단한 품이 체감되자 당황스러웠다. 얼른 벗어나려는데, 오히려 팔뚝의 힘이 강해졌다.
“서은재.”
강윤이 음미하듯 불렀다.
“연애부터 시작하자.”
매력적인 미소를 마주하자, 은재는 홀리듯 정지했다.
“처음처럼. 마치 서로가 처음인 것처럼.”
심장도 두근거렸다.
“하나씩.”
은재의 동요를 알아챈 도강윤이 허리를 굳게 끌어당기고, 다른 팔로는 은재의 등을 묶듯이 감싸서 자신의 가슴팍에 밀착시켰다.
“하나씩, 서로를 알아가며.”
그러고선 손바닥으로 은재의 뒤통수를 감싸고서 아이를 어르듯 다정히 쓰다듬었다.
얼음처럼 차갑기만 한 남자의 체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뜻했고, 밀착한 가슴팍을 통해 서로의 맥박이 생생히 전해졌다.
그의 감각도 뛰고 있었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자신의 맥박처럼 도강윤 또한 자신으로 인해 불끈불끈 뛰고 있다는 사실에 은재는 멍했다.
“연애? 나하고 연애를 하자고?”
취한 것처럼 정신도 몽롱했다.
“응.”
그윽한 저음에 옅은 웃음기가 배어 나왔다.
“너와 나, 둘이.”
그의 웃음에 흔들릴 것 같아, 은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며 벗어났다.
도강윤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은재를 놓아주고, 한 발 물러섰다.
“우리가 어떻게 연애를 해?”
은재는 멀미 나듯 매스꺼웠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려 눈을 부라렸다.
“못 할 건 없지.”
“왜?”
“우린 시작과 결말만 있지 중간 과정이 없잖아. 그걸 경험해 보자고.”
입술을 길게 늘이는 도강윤은 사고를 교란할 정도로 치명적이다. 그는 자신의 무기를 정확히 사용하는 데 도가 텄고.
“그게 연애야?”
“네가 보지 못했던 나를, 내가 보지 못했던 너를, 서로를 알아갈 시간을 갖자는 거야.”
서로를 알아가야 할 시간.
“보통의 사람들처럼 연애부터.”
짙고 깊은 눈동자는 진심처럼 보였다. 믿고 싶어질 정도로, 은재의 감정을 자극했다.
“서은재.”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은재를 강윤이 나직이 불렀다.
“나는 네가 궁금한데, 너는 안 그런가?”
“……왜 이제야? 6년 전엔 내가 안 궁금했어?”
정곡이 찔린 것처럼 은재는 심장이 따끔했지만, 야박하게 굴었다.
“도강윤의 아내였을 때의 서은재는 도외시하고선, 왜 이제야 서은재가 궁금할까?”
“널 잃은 후니까.”
강윤이 픽, 비소했다.
“잃어선 안 되었음을 뒤늦게 지각했지. 멍청하게도.”
세상 누구보다 영민하고, 세상 누구보다 잘난 도강윤이 스스로 멍청하다고 자조했다.
“…후회했다고?”
“많이.”
단호할 정도로 강윤이 대답했다. 은재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그는 늘 자신을 통제할 줄 알았고,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감정에 치우쳐 후회했다니….
더 깊게 파고들었다간, 은재는 그에게 함락될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렵사리 감정을 가다듬고서 외면하듯 눈길을 돌렸다.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래.”
강윤은 덤덤하게 머리를 주억거렸다.
돌아선 은재는 침묵했다.
페리호에 부딪히는 바닷물의 함성 같은 소리와 소금기를 머금은 물방울을 전신을 감쌌다.
비릿한 바닷바람으로 부드럽게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은재는 달뜬 몸의 기운을 식히려 애썼다.
“서은재.”
강윤이 푸른 바다로 눈길을 머문 채 말했다.
“그건 알아둬.”
“…….”
“너와 처음처럼 연애하자는 건, 진심이야.”
담백한 목소리와 반대로 힐끗 던지는 눈길은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