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강윤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결정했어?”
“응.”
그러나 똑똑한 남자인 만큼 수포가 될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
“말해.”
“어디까지나 할아버지를 위해서니까,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만이야. 그 후 난 떠날 거야. 이 점에 협조해 주기를 바라.”
“유념하지.”
강윤이 가뿐히 응낙했다.
어렵다면 어려운 동거 결정이 뜻밖에도 쉽사리 났다.
감격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강윤의 반응이 몹시 태평하여 조금은 시시했다.
한편으론,
‘휘말린 건가?’
싶어서 몹시 께름칙했고.
***
―은재는?
제 방으로 들어서는데, 때마침 문자가 도착했다.
활자를 읽은 강윤의 입술에 오묘한 미소가 뱄다. 답장 대신 전화기 모양을 눌렀다.
[은재는 어디 있느냐?]
애타게 기다린 듯 상대가 득달같이 받았다. 하늘이라도 날 듯 목소리가 쌩쌩했다.
“2층에요. 잘 준비할 거예요.”
[안 갔어?]
“어떻게 가요? 할아버지께서 위중하신데.”
강윤의 너스레에 상대방이 껄껄껄 웃어젖혔다. 짓궂은 어투로 그가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나긴 했냐? 은재는 뭐래?]
“오래 사세요.”
[응?]
동문서답에 도성만 회장이 의아해했다. 강윤의 입매가 길게 늘어났다.
“할아버지랑 짰어?”
“소원이든 계략이든….”
똑똑한 여자라 직감도 정확했다.
은재는 무심코 던진 말일 테지만, 강윤과 도성만 회장만의 짜인 각본이 실재했다.
덕분에, 이 사기극의 전말은 까맣게 모른 채 그녀는 현재 이 펜트하우스 2층에 있다.
“픽.”
쭉 머무르게 하는 것이 관건.
[은재는 전혀 눈치 못 챈 거지?]
“워낙 놀라기도 했고, 경황도 없었을 거예요.”
어머니까지 마주했으니.
[내 연기가 완벽했던 게야. 너 기다리다가 깜박 잠든 것이 애로사항이었지만. 하마터면 은재를 못 볼 뻔했잖냐.]
자신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자 도성만 회장이 한껏 거들먹거렸다.
몇 시간 전.
섬에서 목포로 향하는 페리호에서 강윤은 그녀 모르게 메시지를 보냈다.
―할아버지. 은재 찾았어요. 함께 병원으로 가는 중입니다. 저녁에 도착할 거예요.
―준비하마.
그 덕분에 조부는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할아버지’ 연기를 완벽히 소화했다.
물론 100% 속임수는 아니다.
도성만 회장은 은재의 출국 직후 실제로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명예회장직에서 물러나 요양 중이었는데, 얼마 전 이상징후로 입원했다.
다행히 큰 병은 발견되지 않았고, ‘심신 안정 후 퇴원’이라는 진단까진 진실.
“할아버지, 여쭤볼 것이 있어요.”
[뭐?]
“호텔 프런트로 제게 메모 전달하셨어요?”
[응? 무슨 메모?]
영문 모르는 도성만 회장이 반문했다.
예상했던 바이기에 강윤은,
“별거 아니에요. 오늘 고생하셨는데, 어서 쉬세요.”
라고 에둘러댔다.
할아버지라면 번거롭게 호텔 프런트를 이용하진 않았을 터.
[은재는 내게 또 온대냐?]
“네. 내일 갈 겁니다.”
[아이고, 오기 전에 연락해라. 내 채비하고 있을 터이니. 은근히 긴장된단 말이야.]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곤 있으나 도성만 회장은 어린아이처럼 신났다.
그들의 이혼에 누구보다 속상해했던 조부였다.
“흠.”
강윤은 슈트 재킷 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냈다.
또박또박한 필체는 호텔 매니저일 테고, 주소 외의 다른 내용은 없다.
―정호석, 호텔로 연락하여 메모 발신지 조사하도록.
―상무님~ 작은 사모님 찾으셨으면 불금을 즐기세요~ 밤 10시입니다~
호석에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빠른 답변이 왔다. 그러나 상당히 반항적이었다. 물결이 하나도 아니고, 세 개고.
“…….”
체내 알코올 지수가 극도로 높다는 뜻이므로, 강윤은 실눈인 채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불금이라.’
힐끗, 천장을 올려다봤다.
즐겨볼까?
***
흠칫.
“응? 뭐지? 왜 소름이 돋지?”
말끔한 침대 시트를 젖히던 은재는 불현듯 부르르 떨었다. 경계의 눈초리로 문밖을 쏘아보다가, 살금살금 까치발로 나갔다.
‘잠자리에 들었겠지?’
계단 난간에 서서 빠끔히 아래층 동태를 살폈다.
‘이게 뭔 짓이니.’
예전엔 부부로 산다는 개념이 아닌 삼현가에서의 시집살이 같은 결혼생활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단둘이 한집에서 산다는 전제가 붙은 상황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어차피 결론 나온 거니, 지지부진하게 미루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단단히 홀린 거야.’
그래서 오늘부터 이 펜트하우스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이 널따란 공간에서 1층, 2층 각각 따로 생활하기로 합의했는데.
“찜찜해.”
왜 마수에 걸려든 기분일까.
“흠…….”
잠잠한 아래층에선 소음도, 기척도 없었다.
치밀한 눈초리를 거두며 은재는 못내 불안해하며 침실로 돌아왔다.
‘불면의 밤이 되겠어.’
기우와 달리 몇 번의 뒤척거림을 하다가 세상모르게 콜콜 잠들어 버린 은재였지만.
밤바람처럼 문 너머를 다녀가는 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
“안 비서, 도 상무 어디 있지?”
“펜트하우스에 계십니다.”
아들로부터 거절 메시지로 응답받은 민경애는 안 비서를 호출했다.
늦은 시각임에도 그녀가 즉각 달려왔다.
“혹, 서은재와 함께 있나?”
“모르겠습니다. 워낙 보안이 철저한 곳인지라……. 차량 이동만 확인하였습니다.”
“흠.”
마뜩찮은 민경애의 눈치를 살핀 안 비서는 침착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사모님, 서정탁 행적 보고하겠습니다.”
“감옥에서 잘 지내고 있디?”
“아니요. 6개월 전 출소했더라고요.”
“벌써 출소했어? 몇 년 형 선고받았었지?”
“7년이요.”
“근데 왜?”
“모범수로 가석방되었습니다.”
“제까짓 게 모범수는.”
서은재의 아버지면서, 삼현그룹과 사돈지간인 하도급 업체 ㈜정진의 대표이사 서정탁은 배임 및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 고발되었고, 7년 징역이라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이 확정된 날, 은재의 어머니는 실족사로 사망했고, 임신 6개월 차였던 은재는 유산했으며, 얼마 후 강윤과의 이혼이 성립됐다.
그리고 은재는 떠났다.
민경애 입장에서는 내쫓았다는 표현이 맞았다.
“아! 그 인간이 출소해서 서은재 이 앙큼한 것도 돌아왔구나?”
그런데 서은재가 돌아왔다.
떡하니 강윤과 동행해서.
“확실치 않습니다. 출소 후의 서정탁 종적은 묘연합니다. 현재 파악하고 있으니 조속한 시일 내 보고하겠습니다.”
“서은재 그년 뒤를 캐봐. 서정탁과 분명히 상통하고 있을 터이니. 그런 인간도 제 아버지라고 애틋한 모양이지.”
“알겠습니다.”
“하! 그 아비나 그 딸이나 골치 아픈 족속들이야.”
더군다나 도성만 명예회장과 접촉했다.
시아버지는 유독 서은재를 손녀 대하듯 아꼈으며, 무일푼으로 내쫓을 요량인 민경애의 뜻을 무시하고 이혼한 은재에게 거액의 위자료를 안겨줬다.
“영영 보지 않아야 속 시원할 텐데…….”
내심 불안감이 증폭됐다.
민경애는 은연중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
“앗!”
동트기도 전에 기상한 은재는 주방으로 들어서다 말고 아연실색했다.
샤워를 막 끝낸 반라의 집주인과 마주해서였다.
무결점의 균형을 이루는 빗장뼈부터 이어지는 어깻죽지와 야성적이면서 미치도록 관능적인 이두박근을 가진 팔뚝, 군살 없이 매끄러운 허리 라인 그리고 무엇보다 잘 다듬어진 탄탄한 복근과 널따란 가슴팍.
‘아.’
시선을 교란하는 장골까지.
독보적이며 월등한 얼굴과 비례를 이루는 빚어낸 듯한 몸매의 남자한테 사로잡히지 않을 여자는 아마도 이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무정하게 굴려고 밤새 결심했던 은재의 눈길마저도 함락 직전으로 희롱하고 있으니.
“잘 잤어?”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은 도강윤이 거기다 더 보태어 농염하게 웃었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인사에 은재는 목의 힘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줬다.
“왜 새벽부터 벗고 있어?”
그러고선 부러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바지 입었는데?”
“함께 살자면서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예의를 갖춰주길 바라.”
은재는 신랄하게 쏘아붙이고, 투덕투덕 정수기로 걸어가 물을 따랐다. 냉수로 불끈불끈한 속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그의 다음 말엔 정신이 아찔했다.
“나름 배려한 거야. 원래 샤워 후엔 아무것도 안 입고 다니는데.”
음흉한 뇌가 딸랑거리며 다닐 그를 상상하고 말았으니.
아, 제기랄.
“상당히 번거롭더라고. 내일부턴 평소대로 다니면 안 되나?”
“될 리가 있나.”
“새삼 뭘 내외해?”
그때였다.
불쑥, 곁으로 온 강윤이 은재의 팔목을 잡아서 힘차게 휙 돌렸다. 그러더니 그녀의 늘씬한 허리를 한쪽 팔로 여유롭게 끌어안고서, 느긋하게 다른 팔로 은재의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헐벗은 가슴팍에다 그녀의 손바닥을 대며.
“만지기도 했던 사이인데.”
벽돌처럼 딴딴하게 이를 데 없었지만, 그의 살결은 놀랍도록 매끈했다.
말초신경을 뜨겁게 달굴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