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할, 할아버지, 그건…….”
은재의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더니… 치매가 오셨나?
“은재야.”
말문이 막힌 그녀에게 도성만 회장은 슬픈 눈빛으로 쐐기를 박았다.
“내가 살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죽기 전에 너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
“한집에서 다정하게 사는 모습.”
은재는 벙했다.
한집도 어려운데, 다정하기까지 해야 해요?
“약속해 줄 수 있지?”
아니요.
약속도,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돌아가시는 마당이지만, 너무나 욕심이 과하시다.
얼토당토아니한 염원이고.
***
탁.
자동차 뒷좌석에 오르자, 안 비서가 차분히 문을 닫고 보조석에 올랐다.
민경애의 시야에 맞은편에 주차된 세단이 들어왔다.
‘먼저 나가더니만.’
“댁으로 모실까요?”
“그 아인?”
“명예회장님과 면회 중이라고 합니다.”
“기어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붉은 핏발이 섰다. 매서운 눈초리로 강윤의 차를 직시하며 입술을 뗐다.
“안 비서.”
“네.”
“그 아이가 언제 귀국했지? 안 비서도 아예 몰랐던 모양이야. 안 비서답지 않게 안일했네?”
“……죄송합니다.”
“사람은 감정적이라 늘 미련을 갖기 마련이야. 하물며 연어도 돌아가는데.”
힐난이 이어지자, 안 비서의 단발머리가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차분히 새겨들었다.
“그 감정이 문제의 발단이지만…….”
룸미러로 분위기를 파악한 김 기사가 얼른 운전석에서 내렸다.
“어떻게 할까요?”
“그 싹이 트기 전에 미리 제거해야겠지.”
픽, 민경애는 비소했다.
“여태 그 아이가 무얼 했는지 낱낱이 조사해 봐. 혹시 모르지. 손쉽게 내쫓을 만한 꼬투리를 잡을지도.”
“네.”
“서정탁도 추가해서. 회장님 귀엔 들어가지 않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출발해.”
“예.”
안 비서가 차창으로 손짓했다. 밖에서 대기하던 김 기사가 재빠르게 올라 시동을 걸었다.
안정적으로 주차선에서 나온 차량이 강윤의 세단을 지나쳐 주차장에서 빠져나갔다.
교차하듯.
지하주차장으로 강윤과 은재가 나왔다.
할아버지 면회를 끝내고 넋이 나간 나머지 얼떨결에 강윤의 뒤를 따라온 은재였다.
“타.”
“아, 아니.”
강윤이 보조석 문을 열어준 후에야 화들짝 현실을 지각했다.
“나는 따로 가겠어.”
“타.”
거부하려는 은재를 그는 놔주지 않았다. 강압적이다시피 보조석에 태웠다.
“할아버지께서…….”
“가서 얘기해.”
“어딜?”
운전석에 타자마자 다급히 말하려는 은재를 강윤이 단칼에 막았다. 질문에도 답하지 않고, 무작정 운전을 시작했다.
“그래. 가자.”
은재는 쉬이 단념했다.
그녀로서도 그와의 대화가 시급한 상태였다. 조용한 공간은 필요했다.
***
어둡고 음침한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선 세단에서 내린 후,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른 은재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 폐쇄적인 공간에 도강윤과 단둘이 있게 되니, 전신이 그를 여실히 의식하고 있었다.
도강윤을 쫓아오는 게 아니었다.
그가 발산하는, 지나치게 치명적인 기운이 온몸의 감각을 깨우듯 머리카락도 곤두섰고, 살갗은 소름이 돋듯 쭈뼛쭈뼛했다.
숨쉬기마저도 거북했다.
“왜? 불편해?”
그의 눈길이 내려왔다.
부드럽게 훑는 듯한 눈초리가 마치 맨살에 와 닿는 듯해서 신경이 예민해졌다.
‘나는 왜 또.’
이 관계를 시작하려고 하는 걸까.
또다시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듯 괴로울 거다.
“아니야.”
머릿속이 비틀거렸다.
“이쪽이야.”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머릿속처럼 다리도 휘청하듯 어정쩡하게 발을 내딛자, 그의 손이 허리춤을 짚으며 은재의 걸음을 편안히 유도했다.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찌릿한 전율이 척추뼈를 타고 전신으로 번졌다.
“여긴 어디야?”
은재는 튕기듯 한 발 크게 움직여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녀의 빛과 같은 빠른 반응 속도에 강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턱을 까딱했다.
“네가 잘 곳.”
여유롭게 현관문으로 들어서자, 펜트하우스의 조명이 훤히 들어왔다.
낯선 공간을 경계 어린 눈초리로 훑은 은재는 저만치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뭐?”
“그간 엉뚱한 섬에서 살았으니, 서울엔 잘 곳이 없잖아. 그래서 너 재워주려고.”
“누가 재워달래?”
“원하면, 토닥토닥 재워줄 수도 있어.”
노련한 어투가 다분히 놀림조였다. 그에게 동요하는 마음을 들킨 나머지 조롱받는 듯해서 은재는 바짝 정신을 차렸다.
“헛소리에 취미 붙었어?”
“걱정하지 마. 안 잡아먹어.”
사나운 빈정거림에도 도강윤은 느긋하게 넉살을 떨었다.
은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냉혈한 도강윤이 분명한데, 어떻게 저런 식의 넉살이 생겼을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따라온 내가 등신이지.”
도로 나가려는 은재를 그가 대번에 막았다.
현관문에 등대고 서서 팔짱까지 끼고 자길 뚫고 나가라는 듯 거만스레 눈짓했다.
얄밉도록 듬직해서 빠져나갈 구석이라곤 없었고, 그도 그걸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갈래.”
“어딜? 우리 나눌 얘기도 많잖아?”
“하!”
맞는 소리라 은재는 극심한 두통이 일었다.
‘저 남자가 돈 게 아니고 내가 돈 거야.’
도저히 도강윤에 적응되지 않았지만, 머리카락을 쥐어뜯듯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소파에다 카메라 가방을 던지듯 놓았다.
“얘기해.”
“밥부터 먹자.”
“밥? 이 와중에 무슨 밥?”
“이쪽으로.”
은재가 볼멘소리를 냈으나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가벼이 턱짓한 후, 길쭉한 복도를 걸어갔다.
“예, 예.”
은재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시큰둥하게 이동했다.
복도의 끝은 세면의 벽이 통창으로 이뤄진 다이닝룸이었다. 식탁에 정갈한 한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다.
“뭐지? 설마하니 날 위한 밥상, 이런 유야?”
“제대로 아네.”
역시나.
그의 뻔뻔한 응수는 오소소한 소름을 동반시켰다.
한없이 느긋한 강윤이 의자 하나를 빼내고선 맞은편에 앉았다.
“어서 앉지?”
“…….”
은재는 주인 기다리는 의자를 빤히 내려다봤다.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대외적일 때나 행하였던 도강윤의 매너였다.
보는 눈도 없는데…….
‘누가 있나?’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는 가셨어. 우리 둘뿐이야.”
독심술이 있는 듯 강윤이 밝혔다. 하는 수 없이 은재는 무뚝뚝하게 의자에 앉아서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픽, 그의 입술이 묘하게 휘었다.
“너하고 둘이서 밥 먹는 건 처음이네.”
부부였는데.
“…….”
들리지 않은 뒷말을 들은 기분이다.
아이러니긴 했다.
단둘이 밥조차 먹은 적 없던 부부가 이혼 후 6년 만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는 현실이.
“마음 편히 식사해. 이곳의 비밀번호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만 아시니까.”
그가 손대지 않은 고급 요리를 은재의 앞에다 밀어주며 부언했다.
부모님은 비밀번호를 모르니 쳐들어올 일은 없다는 뜻이다.
“쭉 머물러 있어도 되고.”
“할아버지랑 짰어? 나한테 손자와 함께 살라고 억지를 부리시던데.”
“억지 아니고 소원이시래.”
“소원이든 계략이든, 난 확실히 선 긋고 싶어.”
“난 긋지 않을 건데.”
“어쩌자고?”
“함께 살자.”
“사고라도 당했어? 뇌를 다쳤다든가.”
“이런 건 노력이라고 하지?”
신랄하게 쏘아붙였으나 강윤은 여유만만했다. 으쓱, 그가 사뭇 뻔뻔하게 피력했다.
“나는 서은재한테 노력하는 중이야.”
“왜?”
“말했잖아. 너를 내 아내로 되돌릴 거라고.”
짙은 안광은 일말의 장난기도 없었다. 그의 말에 은재는 짜증스레 대꾸했다.
“뭐든 성취하기 쉬워서, 내가 여전히 쉬어?”
“아니.”
강윤이 흑막 같은 눈동자를 지그시 내리깔며,
“서은재는 어려워.”
허스키하게 읊조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빠직―
심장에 찌릿한 균열이 갔다.
어느 틈에 유리 심장이 된 모양이다.
그저 사소한 언사와 눈빛에 불과한데, 현저하게 다름을 인식한다. 그로 인해 심장은 동요한다.
징―
찬물을 끼얹듯 식탁에 놓인 강윤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푸른 액정 위로 ‘어머니’라는 활자가 떴다.
“…….”
은재는 무심코 긴장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통화할 수 없습니다.
강윤이 즉각적으로 거절 문자로 대처했다.
전전긍긍할 민경애의 표정이 연상되어 은재는 쿡, 웃을 뻔했다. 물 한 모금으로 삼켰다.
“어머님은 나하고 있는 줄 아실 텐데?”
“아시겠지.”
“화…… 신경 쓰이실 거야.”
어머니이기에 예의상 포장은 해줬다. 강윤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
“어머니껜 내성이 필요한 시점이야. 자주 겪게 되실 거니.”
“자주?”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실 테니.”
픽, 그의 한쪽 입꼬리에 주름이 생겼다.
“아하.”
문득.
머릿속에 심술궂은 새싹이 싹텄다.
오롯이 아들한테 집착하는 양반께 자신이 도강윤과 재결합한다고 폭탄 선언하면 어떤 반응일까?
‘기절초풍하시겠지.’
그녀에게 당한 설욕을 가장 시원하게 되돌릴 방법일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염원도 들어드리는 거니…
일거양득일 수도.
“그래, 같이 살자.”
은재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