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 몰랐습니다.”
순박한 지혁은 기습펀치에 K.O 되었다.
‘아, 뭘 그리 순수하게 자백하시나.’
은재는 답답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희성아, 잠깐만.”
패가 까발려졌기에 쉬이 단념하고, 마냥 해맑은 아이의 손을 풀었다.
“지혁 씨, 미안해요. 가보셔도 돼요.”
“예.”
지혁이 희성의 손을 그러쥐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저는 관광객이 집적이는 줄 알았어요. 괜히 오지랖 떨어서 죄송합니다.”
“이해하겠습니다.”
강윤이 심드렁하게 받아주자, 부자(父子)는 도망치듯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가짜 남편을 물끄러미 주시하며 그가 얄궂게 중얼거렸다.
“섭외하려면 제대로 하지.”
“도강윤 씨.”
차라리 냉담하게 내쳐야겠어.
“당장, 저 배 타고 돌아가세요.”
은재는 차갑고 정중하게 선착장 페리호를 가리켰다. 그러곤 바닥에서 나뒹구는 카메라 가방을 집었다.
휙―
발길을 옮기는데,
“할아버지가 아프셔.”
그가 말했다.
움찔.
놀란 심장이 덜컹거렸으나 은재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쏘아봤다.
하염없이 담담한 투라 농담인가 싶었다.
하지만 강윤의 얼굴엔 웃음기가 없었다.
“……뇌졸중이 왔었어.”
“뭐?”
“수술한 후에 명예회장직으로 물러나서 요양 중이셨는데, 몇 달 전 또 쓰러지셨지.”
“위중하신 거야?”
뒷골로 두려움이 엄습했다.
“응. 널 찾으셔.”
강윤은 ‘위중’이라는 언사를 담고 싶지 않은 듯했다. 짐짓 가벼이 까닥, 턱짓했다.
“왜…….”
원망으로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왜 이제야 말해?”
“고민했어. 아무리 널 아끼셨다고 해도, 너한테는 시할아버지니까. 네가…….”
“가자.”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
은재는 서둘러 카메라를 가방에다 쑤셔 넣었다.
‘할아버지…….’
그러곤 강윤보다 앞서가서 페리호에 올랐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결정에 약간 놀란 기색이었으나 강윤은 묵묵히 따랐다.
***
VIP 병동의 복도는 적막했다. 앞서 나가던 강윤은 곧장 간호대기실로 갔다.
“회장님 면회 가능합니까?”
“지금 주무셔서, 오늘은 어려울 듯해요. 안 그래도……. 아, 오셨어요, 사모님.”
선망의 눈초리로 강윤을 올려다보던 간호사가 별안간 은재의 등 너머에다 폴더인사를 했다.
또각또각.
뒷골을 서느렇게 하는 구둣발 소리.
“도 상무.”
우아한 목소리를 인식하는 순간, 은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렇게 빨리.’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신화호텔 행사에서 말없이 사라졌다는 말이 나오던데…….”
도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하고 싶지도 않고.
은재는 그녀와 마주 보고 섰다.
민경애는 강윤 외의 사람들에겐 무신경했다. 은재를 알아본 것은 그녀의 최측근인 안 비서였다.
“헉!”
“왜 그래요, 안 비서?”
기함한 그녀의 초점을 민경애 여사가 의아하니 좇았다. 또각, 구둣발이 정지했다.
“서은재?”
“안녕하셨어요.”
은재는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단정하게 인사했다.
그녀의 동공이 휘둥그레 커졌지만, 입가엔 관대한 미소가 번졌다.
“은재구나. 이게 얼마 만이니? 건강한 모습을 보니 좋구나.”
“어머님도 여전하시네요.”
“아버님 소식 듣고 왔구나. 도 상무가 기별한 겁니까?”
“네, 어머니.”
“잘했어요. 워낙 아버님께서 은재를 아꼈으니…….”
흐뭇한 미소를 걸며 그녀가 간호사대기실로 시선을 옮겼다.
“명예회장님께선 어떠세요?”
“네, 사모님. 아까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오후 들어서 컨디션이 안 좋아지셨어요. 기운 없다고 저녁도 거르시고.”
“아휴, 회장님이 왜 이러실까. 얼른 쾌차하셔야 할 터인데.”
간호사의 대답에 민경애는 애통해했다. 대기실의 간호사들이 함께 안타까워했다.
“은재야. 회장님 면회는 했니?”
“아직이요.”
“그럼, 일단 나하고 얘기 좀 하자꾸나. 안 그래도 네 소식이 궁금하던 차였다. 네게 할 말도 있었고…….”
민경애가 은재의 손을 양손으로 다정히 붙잡았다. 그러곤 강윤을 올려다봤다.
“잠시 우리 둘만의 시간을 줄 수 있나요, 도 상무?”
“나중에 하시죠.”
강윤이 일축했다.
“오늘은 은재가 경황이 없을 테니.”
그러면서 보호하듯이 은재의 곁에 섰다.
“……!”
“……!”
은재도, 민경애도 경악하다시피 놀랐다.
당연한 반응이다.
집안 전통이라는 구실로 삼현가에서 이뤄졌던 1년여의 결혼생활 동안, 강윤이 은재를 보호하거나 고부 관계에 관여한 적이 없다.
아니, 아내에게 무관심했다는 말이 적확하다.
“도 상무…….”
“말씀하세요, 어머님.”
강윤은 강경히 가로막았지만, 되레 나선 건 은재였다.
아들의 태도에 충격받았던 민경애 여사가 입꼬리를 바르르 떨더니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은재는 괜찮니?”
“그럼요, 어머님.”
“접견실로 모시겠습니다.”
눈치 빠른 안 비서가 끼어들었다. 끄덕, 하고 턱짓한 민경애가 먼저 또각또각,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의 뒤를 은재가 따르려는데.
턱.
강윤의 큰 손이 덥석 팔을 잡았다.
‘굳이 왜?’
강윤이 눈빛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할 말이 있을 게 없잖아?’
‘있어.’
은재는 모호한 미소를 걸며 그의 손을 치웠다.
강윤은 모른다.
그의 한마디, 작은 몸짓 하나가 얼마나 고약한 상황을 초래하는지.
“유럽에 있었던 거 아니니?”
모를 수밖에 없다.
교활한 여우는 대외적으로 심성 고운 삼현그룹 사모님이기에 항시 품위 넘치며 고상했는데, 그 가면의 두께는 아들 앞에서는 더없이 두꺼웠다.
“네가 우리 아들과 함께 있는 그림을 또다시 보게 되다니……. 정말 끔찍하구나.”
접견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게 되자, 민경애의 우아한 가면이 벗겨졌다.
“더구나 그런 남루한 행색으로.”
“보통은 이리 입어요. 청바지는 극히 일상적인 복장입니다.”
“네가 날 가르치는 거니?”
“그럴 리가요.”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심산으로 온 모양인데, 아버님 면회는 불가해. 어떠한 이유에서건 다신 발 들이지 마라.”
노골적인 하대도 여전했다.
“너 같은 것과 엮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집안의 수치니까.”
그녀는 둘만의 대면에서 본색을 드러냈다.
“어머님.”
“누가 네 어머님이야? 어디서 함부로 그 추잡한 입에다 어머님 소리를 올리니?”
“죄송합니다, 민경애 여사님.”
“뭐라고?”
“여사님께서 어머님 소리를 하지 말라시니,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요.”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진 민경애에게 은재는 비릿하게 반격했다.
“민경애 씨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네가 감히……!”
끼익― 의자를 엉덩이로 밀며 민경애가 일어났다. 사정없이 공중으로 올라온 손바닥을 보며,
“자중하세요.”
은재는 의연히 읊조렸다.
“밖에 아드님 있습니다. 손자국이 남을 거예요.”
“말 참, 괴상하게 하는구나. 누가 들으면 널 때리는 줄 오해하겠다.”
날리려던 손을 거두며 민경애가 코웃음 쳤다.
‘손찌검이 습관이셨잖아요.’
자칫 마음의 소리가 목구멍으로 나올 뻔했다.
그녀와의 실랑이를 끝내고 싶기에 속말은 삼키고, 단호하게 표명했다.
“거슬리시겠지만, 할아버지 면회는 하겠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아간다면, 여사님의 소중한 아드님이 무척 이상히 여길 거예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심중을 간파한 은재는 또박또박 피력했다.
“염려하진 마시고요. 콩고물 같은 건 애써 챙겨주신다 해도 제 쪽에서 사양입니다.”
“서은재.”
민경애는 어금니를 갈았지만, 은재는 묵례하고 접견실에서 나왔다.
“사모님!”
대기하던 안 비서가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달칵, 잠금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무얼 말씀하셨지?”
“안부.”
마찬가지로 잠자코 기다리던 강윤이 물었다.
속내를 꿰뚫어 보는 눈초리가 내려와 은재는 회피했다.
“할아버지 면회 가능할 때 연락해 줘.”
“서은재.”
엘리베이터로 가려는 은재의 팔을 강윤이 붙잡았다.
거부하려는 찰나.
“도강윤 상무님!”
간호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녀가 은재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서은재 씨 되세요?”
“아, 네.”
“회장님께서 깨셨는데, 서은재 씨를 찾으세요.”
강윤과 은재는 시선을 교환했다.
연이어 그가 고갯짓하며, 은재의 늘쓴한 등허리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
“……우리 은재 왔구나.”
노쇠한 할아버지의 입술이 허옇게 들떴다. 그토록 정정했던 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디, 가까이서 보자.”
“할, 할아버지.”
망연자실한 은재는 나약한 손짓에 울컥했다. 무릎을 꿇고서 쭈글쭈글한 손을 양손으로 바락 잡았다.
“은재야…… 이리 널 보니까 좋구나.”
“네.”
“내가 죽는 마당이라 그런지 자꾸 네 생각이 났어.”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너한테 미안해. 네가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니길 바라였는데… 결국은 이렇게 내 욕심으로 널 불렀구나…….”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독한 결심이 허망하게도, 굵고 뜨거운 눈물이 눈동자를 이탈했다.
“진작 찾아뵀어야 했는데…….”
“네가 왜……. 그저 늙은 내가 미안할 따름이지.”
“아니에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은재야, 이 할아비가 욕심을 좀 부려도 될까? 내가 너한테 부탁이 있는데……. 네가 반드시 들어줘야 할 이 할아비의 마지막 염원이야.”
당신께서 힘겨운 와중에도 한마디 한마디에 힘줬다. 은재는 당신의 손을 굳게 감싸며 거듭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뭐든 할게요.”
“약속해 줄 수 있어?”
“네. 약속할게요.”
“그러면 은재야, 네가…….”
은재는 제 숨소리조차 죽이며 경청했다.
“강윤이 곁에 있어라.”
“네?”
“둘이 함께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