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2화 (3/84)

2.

“사진 다 찍으면 우리 집으로 온나. 국수 삶아줄게!”

“예.”

등 뒤다.

강윤의 구둣발이 빙그르르 돌아섰다.

해안가의 석문에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민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때.

바닷바람이 휘몰아쳤다.

회오리처럼 윙, 소리를 낸 바람이 강윤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이어진 바람이 그녀도 괴팍하게 건드렸다.

“아, 이놈의 바람.”

그녀가 투덜거리며 렌즈에서 눈을 뗐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묶다 말고, 문득 이쪽을 일별했다.

너였다.

‘찾았네. 서은재.’

6년 만에 보는, 스물세 살이 마지막이었던, 스물아홉 살의 서은재였다.

***

“이놈의 바람.”

재능기부로 섬마을 홍보 사진을 찍느라 여념 없던 시점을 심술궂은 바람이 방해했다.

은재는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잡아채며,

“응?”

무신경하게 시선을 넘겼다.

일순 손아귀의 힘이 풀렸다. 하마터면 카메라를 놓칠 뻔했다.

‘어떻게…….’

그였다.

스물다섯의 얼굴보다 한층 무르익어, 더하게 농염한 남자다움을 풍기고, 여전히 치명적인 분위기를 발산하는 서른한 살의 남자.

대외적으로 남편이라 소개했던 남자.

도강윤.

***

강윤의 목울대가 실룩했다.

매사 철두철미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주저라고는 태생부터 모르던, 도강윤이 말소리를 내는 일이 어려웠다.

“서은재.”

6년 만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데,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녀가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도망치려 했다.

강윤은 낚아채듯 그녀의 팔목을 거머쥐었다.

“서은재!”

“놓으세요.”

싸늘한 일축.

“당신이 아는 사람 아니라고요.”

“아니라고?”

꿈틀, 그의 목울대에 핏발이 섰다.

행여 놓칠세라 가느다란 팔목을 쥔 손아귀에 악력을 가했다.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

자못 거칠게 그녀를 당겼다.

“서은재가 아니라고, 나와는 전혀 모르는 타인이라고 말해.”

휘청하는 어깨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은재면서, 너 자신을 부정할 정도로 나의 등장이 끔찍한가?”

“…….”

“그래?”

은재는 아랫입술을 떨면서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냐고!”

격하게 흔들자, 나뭇결 같은 동공에 바람이 들었다.

“놔.”

드디어 서은재의 입술이 열렸다.

“놔줘.”

강윤은 순순히 놓아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좁은 틈에 차분한 찬기가 서렸다.

우린 왜 이런 재회를 하나…….

서로 살집을 뜯어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천적처럼.

차라리 오랜만이야, 같은 상투적인 인사가 나을 뻔했다.

“도강윤이 맞네.”

숨을 고른 은재가 비소를 머금었다.

“그 대단한 도강윤이 날 찾아오리란 상상은 꿈에도 안 했는데.”

‘못’이 아니라 ‘안’이다.

“심지어 이런 촌구석 섬까지 행차하시다니.”

스물셋의 눈빛과 달랐다.

도발적인 눈초리는 그대로였으나 안광의 색은 한결 농익었다. 성숙한 여인의 눈동자로 신랄하게 쏘아봤다.

“어떻게 왔어?”

비정상적일 테지만, 강윤은 안도했다.

자신이 알던 서은재와 마주했다는 안도.

긴 눈매를 늘이며 천연한 농담이 나올 정도로.

“배 타고.”

“배?”

어안이 벙벙한지 은재의 미간에 구겨졌다. 그의 등장에 순수성을 의심하며 눈을 치떴다.

“왜 왔는데?”

“너 데리러.”

“뭐?”

“내 아내, 서은재 데리러 왔다고.”

“도강윤. 왜 이러니, 진짜! 돌았어?”

평정을 유지하던 은재가 폭발했다.

강윤은 살쾡이 같은 자신의 아내였던 여자를 들여다보며, 아름다운 선홍의 색을 띤 입술도 매력적으로 휘었다.

“응.”

끄덕, 고갯짓하며 인정했다.

“돌았어.”

널 못 봐서 말이지.

***

“나는 너무 혼란스러워요, 도강윤 씨.”

은재는 그의 농염한 미소에 어질했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 부러 비꼬는 경어체를 쓸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혼했어요. 그것도 6년 전에.”

그와의 연결을 끊고 싶었기에 정확히 선 그어야 했다.

얼마 못 갈 줄 알면서도.

“응. 이혼했지, 우리.”

그가 능청스레 ‘우리’라는 단어를 음미했다. 마치 듣기 좋다는 듯.

“하.”

은재는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도강윤은 한겨울의 철창 같던 인간이었다.

1년여의 결혼생활은 물론이거니와 이혼할 때도, 공항으로 어쩔 수 없이 배웅 왔을 때도, 지나치게 냉철한 안광을 고수했던 남자였다.

“끝이군.”

이랬나?

‘아니구나.’

이건 이혼 결정이 내려진 날이고, 공항에서는.

“가.”

그 건조한 언사가 6년 전 공항에서의 마지막.

조심히 가, 도 아닌 ‘돌아오지 말라’는 의미가 담긴 듯한 단언.

그리고 진짜 끝.

‘참, 인간미 없었다, 도강윤.’

내심 쯧쯧거린 후, 은재는 애써 심드렁하니 쳐다봤다.

“내가 이 섬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오래 걸렸어. 지구를 한 바퀴 도느라.”

넉살에다 허풍까지.

이 남자, 재수 없게 굴다가 밤길에 돌 맞은 건가.

“무슨 수작인데?”

“단순해.”

성큼, 강윤이 한 발 접근했다.

“아까의 내 말에 모든 답이 있어.”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최면 걸린 듯 그의 말을 복기했다.

“내 아내, 서은재 데리러 왔다고.”

“나는 너와 함께 갈 거고….”

동시에, 그가 돌발적으로 손목을 그러쥐어 제게로 당겼다. 휘청하는 등허리를 자연스레 감으며, 자신의 몸체를 밀착했다.

“…….”

밀어낼 수 없었다.

지극히 뇌쇄적인 안광이 코앞이었고,

“나는 서은재를.”

야릇한 숨결이 입술이 닿았다.

“내 아내로 되돌릴 거라는 뜻.”

도강윤의 체온이나 숨결은, 차디찰 거란 예상과 달리 늘 불타듯이 뜨거웠다.

닿자마자 치명상을 입을 것 같았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

키스한 것도 아닌데, 키스한 것처럼 입술로부터 감전 같은 달뜬 전율이 퍼졌다.

***

“…누구 마음대로?”

네가 흔들린다.

이 반응만으로도 체온이 달궈진다.

갈색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강윤의 입술이 은근히 휘었다.

그때.

“민서 씨!”

느닷없이, 비탈길에서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목청을 높였다.

“앗.”

화들짝 놀란 은재가 비로소 강윤의 가슴팍에서 벗어난 순간, 남자와 손잡고 있던 아이가 종종 달려왔다.

“엄마!”

그러곤, 덥석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듯 배에다 얼굴을 비비는 아이는 다섯 살가량의 사내아이였다.

‘엄마?’

강윤은 제 눈을 의심했다.

걷잡을 수 없는 충격으로 사고회로가 펑, 끊겼다.

“민서 씨, 누구예요?”

남자도 그들의 곁으로 왔다.

강윤의 표적이 순차적으로 바뀌었다.

허리춤의 아이에게서, 은재의 뒤통수로, 그리고 선한 인상의 남자에게로.

“음…….”

은재는 침묵했다.

살점을 갈기갈기 찢을 듯한 강윤의 기세를 그녀는 감지하고 있을 터.

“지혁 씨, 인사해요.”

은재가 결심한 듯 드디어 돌아봤다.

“아는 오빠예요, 도강윤.”

한결 평온한 안색으로 교묘한 미소를 걸며 소개했다.

“강윤 오빠, 인사해. 내 남편이야, 권지혁.”

***

“너는 그렇게 못돼먹어서 얻다 쓰니?”

“지는 건 싫어.”

“그 못된 자존심 때문에 넌 기어이 네 무덤을 팔 거야, 이년아.”

친구 민서의 타박이 귓가에 맴돈다.

그녀의 잔소리처럼, 난 다시금 그 못된 자존심 때문에 내 무덤을 판다.

‘뭐, 선수는 당신이 쳤으니까.’

나라의 경제를 아우르는 대기업 총수의 유일한 후계자로, 그 어떠한 자보다 영민하고 우월한 도강윤이 난생처음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는 오빠?”

우습게도 ‘남편’이라는 단어보다 ‘아는 오빠’라는 소개말이 더더욱 기막힌 모양이었다.

“씩.”

한없이 고소한 기분이 들어, 은재는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현(現) 남편한테 전남편이라고 소개할 순 없잖아?’

상큼한 눈짓도 하며.

“…….”

알아먹은 강윤의 미간에 음습한 골짜기가 생겼다.

내장이 부글부글 끓는지 슈트 재킷 너머의 탄탄한 가슴팍도 크게 들썩였다.

‘여전히 태평양 가슴이네.’

얼결에 꽂힌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다.

이방인에게 무관심하던 섬마을 주민들의 이목도 그에게 모이는 걸 보면, 그는 여전히 시각을 홀리고, 뇌의 이성을 야금야금 갉아먹을 정도로 근사한 도강윤이었다.

아니.

솔직히 실토하면.

앞자리 숫자가 바뀐 서른한 살의 도강윤은 성인 남자의 도발적인 농밀함마저 취득한 압도적인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민서 씨 아는 오빠라고요?”

지혁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현 상황을 망각할 정도로.

“아, 안녕하세요. 권지혁입니다.”

지혁이 살살거리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낯선 이에다 재계의 인물도 아닌 이와 악수 따위를 나눌 도강윤이 아니었다.

오만하지 않은 냉정함.

무례하지 않은 서늘함.

그것이 도강윤의 범접할 수 없는 포스였다.

그런데,

“도강윤입니다.”

지혁의 손을 냉큼 맞잡았다. 그러곤 냉소적인 눈빛으로 대뜸 물었다.

“재혼입니까?”

“네?”

다분히 공격적인 언사와 악력에 지혁이 흠칫했다.

“이 여자 이름은 김민서가 아니고, 서은재입니다.”

“에?”

“아내 이름이 가명인 줄은 아셨습니까? 아내가 아니니, 모르셨죠?”

‘젠장맞을 도강윤.’

영악한 남자는 쇼를 단박에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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