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결혼이라는 마침표
“저도 출마합니다.”
갑자기 울린 외침에 이사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재혁과 이나였다.
재혁이 등장하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특히 황 이사, 그리고 그와 동조했던 이사들은 눈에 띄게 당황한 듯 보였다.
재혁이 안으로 들어가고 이나가 따라 들어가려는데, 문 쪽에 서 있던 사람이 그녀를 막았다.
그러자 이나가 공항에서 변호사에게 받은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에는 찬이가 보유한 주식 명세가 적혀 있었다.
서류를 확인한 남자가 문 옆으로 비켜섰다.
이나가 안으로 들어오자, 재혁이 들어왔을 때와는 다른 파문이 일었다.
‘남은 유산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느긋하게 허리를 빼고 앉아 있던 정수 역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재혁과 이나가 걸어 들어오는 동안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여유롭게 이나의 자리까지 빼 준 재혁은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황한 듯 눈을 피하는 사람도 있었고, 황 이사와 같이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재혁의 시선이 정수에게 닿았다.
정수는 죽일 듯한 표정으로 재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명성 그룹 이사회의 주주 자격으로 대표 이사직 선거에 출마합니다.”
“아…. 그… 그러시면….”
회의를 진행하던 이사가 정수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재혁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무난하게 정수를 추대하는 것으로 예정되었던 회의는, 재혁의 등장으로 경쟁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다.
“두 분 출마하셨습니다. 더 이상 의견 없으십니까? 없으시면, 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모두의 앞에 투표용지가 놓였다.
투표자의 이름을 먼저 적고 선출자의 이름을 적는 방식이었다.
처음부터 지지자가 있던 이사들은 고민 없이 이름을 적어 넣었고, 중도에 있던 이사들은 망설이는 듯 정수와 재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사이 유리는 투표용지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이름도 적지 않았다.
탁- 탁-
책상 위로 볼펜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시선을 들어 재혁과 현준을 바라보았다.
자신 없이 성공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과 꼭 망했으면 좋겠는 사람.
이렇게만 생각하면 재혁의 이름을 적어 주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적기가 싫지?’
한참 동안 고민하던 유리는, 끝났냐는 진행자의 말에 펜을 움켜쥐었다.
***
“이제 개표하겠습니다.”
긴장되는 가운데, 진행자가 첫 번째 투표용지를 펼쳤다.
“이사 황두섭, 강재혁.”
황 이사가 재혁을 선택하자, 좌중이 술렁였다. 황 이사가 재혁을 바라보자, 재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사 박일재, 강정수.”
이후 황 이사와 그 외의 5명을 제외한 모든 이사가 정수를 지지했다.
“주주 정찬, 강재혁.”
마지막으로 유리의 표만이 남아 있었다.
현재까지의 결과는 재혁 28% 대 정수 29%
유리가 어디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회장의 자리가 바뀌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진행자가 마지막 표를 펼쳤다.
정수의 지지자였던 그는, 결과를 확인하고는 당황한 듯 정수를 바라보았다.
정수가 어떻게 된 거냐는 듯 바라보자, 진행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결과를 말했다.
“이사 최유리, 강재혁.”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희비가 교차했다.
황 이사 쪽 인사들의 환호성과 정수를 지지했던 이사들의 탄식이 동시에 들렸다.
“명성 그룹의 새로운 대표 이사는 강재혁 이사님으로 결정되었습니다.”
화가 난 정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축하해요.”
옆에 앉아 있던 이나가 재혁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재혁이 대답하는데, 반대쪽에 앉아 있던 유리가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이나가 재혁에게 말했다.
“나가 봐요.”
재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유리의 뒤를 쫓아갔다.
“최유리!”
재혁의 부름에 유리가 뒤돌아보았다.
재혁의 시선 끝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현준의 모습이 보였다.
재혁은 유리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왜 나를 도와준 거지?”
재혁의 말에 유리는 헛웃음을 켰다.
“허. 이럴 때는 ‘고마워’라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를 도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맞아, 그러려고 했는데. 둘 중 누가 더 미운가 생각해 봤더니 강현준이 더 미웠어. 됐어?”
“그랬군.”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재혁을 보며 유리는 다시 한번 어이없게 웃었다.
뱀처럼 능글맞아 보이지만, 어떨 때는 곰처럼 둔한 남자였다.
“갈게.”
유리가 돌아설 때, 재혁이 그녀를 불렀다.
“고맙다.”
멈칫.
“뭐라고?”
유리가 다시 돌아보자 재혁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다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유리의 얼어 있던 마음은 봄눈 녹듯 녹아 버렸다.
평소에 그렇게 차갑게 대해도, 가끔 해 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녹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이 이런 거니까.
유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때 그랬잖아. 다 포기해도 좋을 만큼 정이나가 좋다고. 나도 그게 뭔지 조금은 알아 보고 싶었어. 잘 살아라, 강재혁. 혹시 헤어지면 언제든지 돌아오고. 그럼 갈게.”
마지막 말을 남긴 유리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재혁은 그녀가 들리지 않게 혼잣말을 했다.
“미안하지만, 헤어질 일은 없을 거야. 영원히.”
***
1년 후.
블라디보스토크. 명성 그룹의 새로운 호텔이 개장하는 날이었다.
호텔의 이름은 블라디보스토크 썬라이즈.
러시아 동부 연안에서 제일 큰 호텔인 이곳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호텔 로비로 들어가면, 거대한 로비 한가운데에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풍선 집을 연상케 하는 낡은 집이 보존되어 있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로비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고위 공무원들을 비롯해 한국 재계의 순위권 그룹의 회장과 그 일가들, 유명 연예인도 보이는가 하면 장관급의 정치인들도 자리했다.
호텔 개장식치고는 너무 많은 사람.
로비의 장식 역시 여느 개장식과는 달라 보였다.
하얀 레이스와 프리지어로 꾸민 로비 가운데를 웨딩 아일이 가로질렀다.
오늘의 행사는 썬라이즈의 개장식이자 이나와 재혁의 결혼식이었다.
모두가 식이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가운데,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사회는 현재 이나의 코디로 활동하고 있는 지영이었다.
“흠흠. 자, 그럼 강재혁 군과 정이나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녀의 말과 함께 로비 입구로 재혁이 나타났다.
평소 슈트가 잘 어울렸던 재혁답게, 턱시도를 입은 모습은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을 자아냈다.
재혁이 웨딩 아일 위에 오르자 입장곡이 흘러나왔다.
재혁은 당당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가 그녀의 신부를 기다렸다.
“자,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할 시간입니다. 하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지영의 말에 앉아 있던 하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부 입장!”
지영이 외치자 입구로 꽃바구니를 든 화동들이 나타났다.
찬과 애니카였다.
두 아이가 꽃을 뿌리며 지나가고, 그 뒤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이나가 들어왔다.
“오오!”
이나의 등장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면사포를 내린 이나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그녀가 조심스레 웨딩 아일에 오르자 재혁이 그녀를 향해 마중을 나갔다.
이나에게 다가선 재혁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주친 두 눈으로 사랑이 꿀처럼 떨어져 내렸다.
이나가 그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하객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갔다.
그야말로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 이나의 엄마와 만재, 그리고 그와 그녀를 아는 수많은 사람이 축하와 축복의 박수를 보냈다.
단상 앞에 선 두 사람은 하객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주례 없는 결혼식이었기에 두 사람은 결혼 서약서를 들고 서로를 향해 마주 보았다.
“나 강재혁은 정이나에게 사랑을 맹세합니다. 평생을 그녀의 곁을 지키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녀만을 영원히 사랑할 것을 오늘 오신 많은 하객분 앞에 맹세합니다.”
“나 정이나는 강재혁에게 사랑을 맹세합니다. 평생 그의 곁에 서서 따뜻하게 그를 보필하겠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영원히 사랑할 것을 오늘 오신 많은 하객분 앞에 맹세합니다.”
성혼이 끝나자 반지가 재혁의 앞에 놓였다.
재혁은 반지를 들고 이나에게 다가섰다.
그는 흰 장갑을 낀 이나의 네 번째 손가락에 맹세의 반지를 끼워 주었다.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간 있었던 수많은 일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함께 이곳에 오기까지 너무나 힘들었지만,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마침표 위에 서 있었다.
“자, 그럼! 두 사람의 입맞춤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영은 사회자가 아닌 한 사람의 하객이 되어 소리쳤다.
재혁이 이나에게 한 발 다가섰다.
그가 말했다.
“고마워. 여기까지 함께해 줘서.”
“나두 고마워요. 이런 나를 참고 견뎌 줘서.”
“영원히 사랑할게. 이나야.”
“영원히 사랑할게요. 재혁 씨.”
재혁이 고개를 숙여 이나에게 키스했다.
박수가 쏟아졌다.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 두 사람은 결국 하나가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찬이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그럼 이제 동료 아저씨가 아빠인 거야?”
찬이의 말에 엄마는 감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찬아. 아빠 생겨서 좋지?”
찬이는 해맑은 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했다.
“응! 아빠 생겨서 좋아!”
찬이의 해맑은 목소리와, 두 사람의 아름다운 키스 속에서.
강 팀장은 하룻밤이 부족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