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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명성 그룹의 상속자 (71/72)

71. 명성 그룹의 상속자

빠르게 다가오는 트럭은 이미 멈추기에는 늦은 것 같았다.

찰나의 순간, 이나는 움직일 생각조차 못 하고 자신을 덮치는 트럭의 모습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같은 순간, 다가오는 트럭을 발견한 재혁이 이나를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다시금 그날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불타는 자동차 속에 죽어 가는 이나의 모습.

갑자기 숨이 가빠 오며 눈앞이 컴컴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내가 쓰러지면, 이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환상 속 재혁은 불타는 자동차의 문고리를 잡았다.

꿈속에서는 단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는 그 문.

그 짧은 순간에, 재혁은 자신의 다짐을 생각했다.

‘다시는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으리라.’

재혁의 몸이 이나를 향해 날았다.

그리고 그 순간, 환상 속의 재혁이 닫혀 있던 문을 열어젖혔다.

덜컹-

트럭이 이나를 덮치려던 찰나, 재혁이 이나를 낚아채며 옆으로 굴렀다.

트럭은 굉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진 이나와 재혁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이 도로에 쓰러지자, 반대 차선으로 달려오던 차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두 사람은 죽은 듯 바닥에 넘어진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괜찮아?”

재혁의 질문에 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이에요? 찬이가 재혁 씨 아들인 거?”

“정말이야.”

“확실하죠? 거짓말 아니죠?”

“확실해. 찬이는 내 아들이야.”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야.”

이나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움직이지 않자, 도로의 차들이 요란하게 클랙슨을 울려 댔다.

빵-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도로 위에 누워 있었다.

***

공무원의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재혁과 이나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재혁이 잡은 손을 너무 세게 잡자 이나가 타이르듯 말했다.

“아파요.”

“또 도망갈 수 있으니까.”

“이제 안 도망가. 약속해.”

재혁은 그제야 손에 힘을 풀었다.

두 사람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재혁은 그녀에게 해 줄 말이 너무 많았다.

네가 떠나고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말해 주고 싶었다.

이나 역시 재혁과 같은 마음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이 계속해서 입가를 간질거리게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침묵이 주는 평안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잡은 두 손에 느껴지는 감촉과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면 충분했다.

많은 말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택에 도착하자 공관 공무원과 애니카, 그리고 찬이가 마중을 나왔다.

“동료 아저씨!”

재혁을 본 찬은 반가운 마음에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제는 재혁이 찬의 아빠라는 사실을 알기에, 이나는 아이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재혁은 찬을 높이 안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찬이, 잘 지냈니?”

“네!”

이나는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재혁이 찬과 해후를 나누는 사이, 공무원과 애니카가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재혁.>”

“<예상보다 빨리 뵙게 되는군요. 애니카도 잘 지냈니?>”

애니카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찬이 자랑스러운 듯 재혁에게 자랑했다.

“동료 아저씨! 우리 결혼하기로 했어요.”

“누구랑?”

“애니카랑요!”

재혁이 놀라며 뒤에 서 있던 이나를 돌아보았다.

이나는 이미 포기했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

그야말로 꿈만 같은 하룻밤이 지나갔다.

두 사람은 밤새도록 그간 있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안해요. 힘들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요.”

“괜찮아. 지금 옆에 있어 주는 걸로도 충분해.”

“돌아가면 묘소부터 찾아봬요.”

“그래. 그러자.”

이야기를 나누다 지쳐 잠들 때도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나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잠에서 깼다.

호텔 객실의 너른 창으로 오후의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잘 잤어?”

눈을 뜨자마자 재혁의 얼굴이 시야 한가득 보였다.

재혁은 상체를 벗은 가벼운 차림으로 이나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이나 얼굴 구경하고 있었어.”

“언제부터요?”

“한 시간쯤 전부터?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네.”

“나와요. 자고 일어나서 얼굴이 엉망이란 말이야.”

“엉망인 게 이 정도면, 대체 엉망이 아닐 때는 얼마나 이쁜 거지?”

“아이, 정말.”

“괜찮아. 정말 예뻐.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가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야.”

“눈곱 낀 얼굴이 뭐가 이쁘다고 그래요.”

“놀랍게도 전혀 끼지 않았어. 어젯밤 그 모습 그대로야.”

재혁은 그녀를 향해 미소 지으며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부드러운 그의 입술의 느낌이 감미롭게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이나가 눈을 떴다.

재혁은 얼굴이 거의 맞닿을 듯한 거리에서 이나를 보며 말했다.

“줄 게 있어.”

“뭔데요?”

“저번에 못 준 거.”

재혁이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이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침대 아래로 내려온 재혁은 이나를 자신의 쪽으로 당겨 침대에 걸터앉게 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작은 파란색 상자를 열어 보였다.

안에는 반지에 박힌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며 빛을 내고 있었다.

“이… 이건.”

“저번에 제대로 못 했으니, 이번에는 제대로 해야지. 한 번 이별했기도 했고. 다시 이별을 해 보니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 난 정말 정이나 없이는 못 사는 남자라는 걸. 평생 정이나의 남편으로, 찬이의 아빠로 살고 싶어. 이나야. 나랑 결혼해 줄래?”

이나는 감격에 목이 멨다.

언제나 겁이 많아 도망만 다니는 자신을, 재혁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 주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주는 재혁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꼭 일어나자마자 해야겠어요? 나 지금 안 예쁜데. 당연히. 좋아요. 내 남편이 되어 줘요.”

말과 동시에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재혁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이나에게 키스했다.

***

행복한 프러포즈를 끝낸 후, 저녁 시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점심에 이어 저녁까지 룸서비스를 시켜 식사했다.

이나는 식사를 하는 재혁을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밤새 이야기를 하며 재혁이 포기한 것들에 대해 들었다.

내일 오전에 주주 총회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이나를 찾기 위해 회사의 승계를 포기하고 온 것이었다.

“왜 그러지?”

“아니에요.”

이나의 시선을 느낀 재혁이 묻자, 이나는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사라진 5%의 유산을 찾고, 유리를 설득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이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꺼 두었던 휴대 전화를 켰다.

재혁이 자신을 찾을까 봐,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이후로 처음 켠 휴대 전화이었다.

전원이 들어오자 그녀는 밀린 연락부터 확인했다.

연결되자마자 그동안 밀렸던 문자와 연락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갑자기 사라진 것은 정말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나는 그동안 왔던 문자들을 확인했다.

대부분은 재혁과 엄마에게 온 연락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재혁의 눈치를 보며 문자들을 내리는데, 낯선 번호에서 연락이 와 있었다.

“유산 상속에 관한 법률?”

이나의 말에 재혁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가 뭐냐는 듯 이나를 바라보자, 이나가 문자를 읽어 내려갔다.

“강인식 회장의 유산이 정찬 군에게 승계되었습니다. 연락이 닿지 않아 이렇게 문자를 남기니 보시는 대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산은 회장님께서 보유하신 주식의… 5%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설마….”

이나의 말에 재혁이 대답했다.

“할아버지의 유산을 찬이가 받았어….”

이나의 시선이 급하게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오후 8시. 서울은 지금 7시예요. 주주 총회가 몇 시라고 했죠?”

“내일 아침 10시야.”

“급하게 가면 갈 수 있어요!”

“….”

재혁은 망설였다.

돌아간다 해도 유리를 설득해야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나가 다시 한번 재혁에게 소리쳤다.

“재혁 씨!”

잠시 생각하던 재혁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항으로 가자.”

***

다음 날 아침, 유리는 명성 그룹 본사로 향하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재혁이 떠나던 마지막 순간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나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그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지금 가면, 주주 총회는 포기하겠다는 거야?’

그녀의 외침에 재혁은 문을 잡고 멈춰서 유리를 돌아보았다.

‘어.’

짧은 대답에 그녀는 어이없어서 소리쳤다.

‘대체 그 여자가 뭔데?! 뭐길래 그렇게 목매는 건데?’

‘전부.’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오빠!’

그녀의 외침은 객실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가 떠난 후, 이틀 동안 그녀는 홀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재혁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명성 그룹 본사에 도착했다.

주주 총회가 있는 날이었다.

***

명성 그룹 본사 대회의장에는 회사의 주요 이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현재 공석인 회사의 수장을 결정하는 자리. 이사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삼삼오오 모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회의가 시작하기 직전인 9시 59분에 정수와 현준이 나타났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그를 지지하는 이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정수는 이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내부로 들어왔다.

그는 황 이사와 인사를 할 때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만남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황 이사가 움찔하자, 정수는 괜찮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 실수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정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황 이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유리의 설득으로 재혁에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져 봤지만, 결국 정수를 배신한 꼴만 되었다.

오늘 정수의 눈에 확실하게 띄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자리에 앉았다.

10시 정각이 되자, 이사 중 한 사람이 회의를 주최했다.

“오늘 주주 총회의 안건은, 아시다시피 공석인 대표 이사직을 선출하는 자리입니다. 먼저 출마를 원하시는 분께서는 의사를 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수가 손을 들었다.

“강정수 이사님 출마하셨습니다. 더 의사가 있으신 분 없으십니까?”

더 이상 손을 들 수 있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정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주위를 둘러보았다.

형의 그늘에 가려 평생을 이인자로 살아온 그였다.

드디어 그의 눈앞에 명성 그룹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의사가 없으시면.”

할 때, 갑자기 회의장 문이 열렸다.

모두의 이목이 문 쪽으로 집중되었고, 열린 문 사이로 재혁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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