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재회
“나도 답답해 미치겠어요. 애가 연락도 없고, 갑자기 왜….”
서글퍼 하는 이나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혁은 전화를 끊었다.
이나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이나는 세상에서 증발한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곧 다가올 주주 총회를 앞두고, 이사진들은 재혁과 정수 사이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들을 찾아다니며 세력을 불려야 할 골든 타임에, 재혁은 이나를 찾아 헤매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애꿎은 시간이 흘러가고 주주 총회가 이틀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황 이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좀 뵙고 싶습니다.”
황 이사는 강 회장의 최측근으로, 강씨 일가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었다.
방문하겠다는 그를 말릴 수도 없어서 재혁은 머무는 호텔 객실을 알려 주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황 이사가 방문했다.
딩동-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여니 황 이사뿐만이 아니라 몇 명의 이사들이 함께 서 있었다.
의외의 방문에 놀라며 재혁이 그들을 맞이했다.
“들어오시죠.”
총 다섯 명의 이사들과 재혁이 거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은밀히 찾아뵙고 싶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괜찮습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재혁의 물음에 황 이사는 주변 이사들과 눈빛을 공유했다.
“모레 있을 주주 총회 때문에 왔습니다.”
“황 이사님은 강정수 부회장님 쪽 아니었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우리 모두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강 회장님의 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재산 상속을 지켜보며 강 회장님의 후계 의지가 강재혁 대표님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시군요.”
황이사가 재혁을 향해 은밀하게 몸을 기울였다.
“저희 다섯 명 이사들의 지분을 합치면 총 3%가 넘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지분이 상속까지 합쳐서 16% 정도 되니까, 전체 19%네요.”
“네. 반대쪽 이사들의 지분을 합치면 25% 정도 됩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힘을 합쳐도 패배하겠네요.”
재혁은 감정이 섞이지 않은 기계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재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황 이사가 말을 이었다.
“네. 현재로서는 6% 정도 지고 있죠. 하지만 회장님께서 따로 남기신 5%의 지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만 있다면 저희가 승산이 있습니다.”
“그 5%의 주인이 누구인지 저도 모릅니다.”
“….”
“그리고 설령 5%의 지분을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1%가 모자랍니다.”
“중립 의사를 가진 이사가 한 명 있습니다.”
“누굽니까?”
“최유리 이사입니다.”
“….”
장례식장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던 유리의 얼굴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5%의 행방은 저희가 어떻게든 찾아보겠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최유리 부대표를 설득해 주시죠. 그것이 우리가 이길 유일한 방법입니다.”
“최유리 이사와는 얘기를 마쳤습니다.”
“한 번만 더 대화를 해 보시죠.”
“생각해 주시는 건 고맙습니다만.”
할 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황 이사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철컥-
열린 문으로 유리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재혁은 그제야 모든 일이 계획된 것임을 알았다.
아마 황 이사가 유리를 설득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유리가 황 이사를 설득했을 것이다.
유리는 성큼 걸어와 재혁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주위 이사들에게 말했다.
“둘이 얘기해 볼게요.”
그러자 앉아 있던 이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혁은 모두가 나갈 때까지 말없이 유리를 노려보았다.
“네 생각이야?”
“글쎄.”
재혁의 차가운 물음에 유리는 거만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녀는 여유롭게 몸을 뒤로 젖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번에는 오빠가 할 얘기가 있을 거 같은데.”
재혁은 도무지 자신을 향한 유리의 집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는 건데?”
“한 번쯤은 가져 보고 싶어서 그래. 그래야 내가 버릴 수 있잖아.”
“할 말이 없군.”
“도와주겠다는 사람한테 이런 식으로 굴어서 좋은 거 없잖아?”
“그래서 5%의 소유자는 찾았나?”
“아니. 못 찾았어.”
“그럼 네가 도와준다 해도 못 이기네.”
“걱정하지 마. 이틀 내로 찾을 거니까.”
“찾는다고 그 사람이 우릴 도와줄까?”
“그거까지도 내 몫이지.”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너. 강재혁.”
재혁은 실소를 터트렸다.
“이런 협박을 다 받고 새롭네.”
“눈 딱 감고 나랑 다시 만나. 어차피 정이나도 한국에 없잖아.”
“….”
유리의 말에 재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표정을 본 유리는 아차 싶었는지,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이나가 한국에 없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 그건, 그냥 안 보인다길래.”
“안 보이는 것과 한국에 없는 건 다른 일이지 않나?”
“….”
당황하는 유리의 모습을 보며 재혁은 확신했다.
아무리 찾아도 이나의 흔적을 찾을 수 없던 이유에는 유리가 개입 되어 있다는 사실을.
벌떡 일어난 재혁은 소파 사이에 놓인 테이블을 돌아 유리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앞에 서자, 검은 그림자가 유리의 위에 드리웠다.
“바른대로 말해. 이나 지금 어디 있어?”
***
블라디보스토크의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이나는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움을 가득 품은 그녀의 눈빛 속에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공항에서 재혁을 먼저 보낸 후, 이나는 곧장 썬라이즈로 향했다.
그녀는 한국을 떠날 생각이었다.
이미 배우로 유명해져 버린 이상, 대한민국 어디로 숨는다고 해도 재혁이 찾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난다고 해도 재혁에게 들키지 않고 떠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은밀하게 그녀를 해외로 보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녀가 떠나는 것을 반길 사람.
이나는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리를 찾아갔다.
“재혁 씨를 떠나겠어요. 도와주세요.”
그녀의 생각대로, 유리는 흔쾌히 도와주었다.
집을 정리하는 일과 은밀히 표를 구하는 일, 거기에 더해 생활비까지 지원받았다.
조건은 다시 한국에 돌아오지 않는 조건이었다.
이나는 유리의 도움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왜 블라디보스토크였을까?
목적지를 결정할 때, 이나의 머릿속에 예전에 만났던 애니카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나도 애니카와 같은 나이의 아들이 있거든. 나중에 우리 아들이랑 만나게 해 줄게.>”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다음 날, 이나는 곧바로 공무원을 찾아갔다.
그는 이나와 찬이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 이나! 어서 와요.>”
애니카는 부끄러운지 여전히 아빠의 다리에 매달려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안녕, 애니카? 오랜만이야.>”
이나가 수화로 인사하자 애니카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나 기억하지?>”
애니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나가 찬이를 소개해 주었다.
“<그때 말했던 우리 아들. 이름은 찬이야.>”
찬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애니카를 바라보았다.
마치, 줄리엣을 처음 본 로미오처럼.
“아…. 안녕…. 나는 찬이라고 해.”
찬이 딱딱하게 굳어 로봇처럼 인사했다.
얘가 대체 왜 이래? 싶어 이나가 바라보고 있을 때, 가만히 있던 애니카가 찬을 향해 웃어 주었다.
애니카의 사랑스러운 미소에 찬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물들었다.
애니카 역시 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가까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러시아식으로 찬의 볼에 뽀뽀했다.
“!!”
찬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이 짧은 순간에도 사랑에 빠지는 찬을 보며 이나가 어이없어할 때, 공무원이 그녀에게 말했다.
“<두 아이가 참 잘 어울리는군요. 며칠 묵고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찬이를 공무원의 집에 맡겨 두고 이나는 혼자 블라디보스토크를 돌아다녔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이나에게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거닐다 보면 재혁과 함께했던 곳들에 도착해 있었다.
이제는 호텔 공사로 비어 있는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의 집, 그와 함께 머물렀던 블라디보스토크의 호텔, 늦은 밤 함께 일을 하다가 출출함에 밖에 나와 펠리니를 사 먹었던 야시장. 그리고 오늘, 이곳은 재혁과 함께 식사했던 선상 레스토랑이 있는 바닷가였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녀는 매 순간 재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힐지도 모르지만, 그 시간을 견뎌 내는 동안의 아픔이 이나에게는 너무나 두렵게 느껴졌다.
혼자 도시의 거리를 걷다 보면 그와 함께하고 싶어졌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나, 관광지를 돌아다닐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순간 재혁이 떠올랐고, 그럴수록 재혁을 향한 그리움은 켜켜이 쌓여만 갔다.
항구에 흰색 돛을 단 요트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뒤로 갈매기들이 무리 지어 따라가는 모습이 참 평화로웠다.
그녀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재혁과 함께하면 참 좋을 텐데’라고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어디선가 재혁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이나.”
그녀는 처음에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덜컥 내려앉는 심장은 그가 이곳에 있다고 말했다.
고개가 기계처럼 소리가 난 곳으로 돌아갔다.
제발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과 제발 환청이길 바라는 마음이 그 짧은 순간에 자리다툼을 했다.
시선이 옆에 닿았을 때, 그녀는 하마터면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곳에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재혁이 서 있었다.
그녀는 망부석이 되어 한참 동안 재혁을 바라보았다.
재혁 역시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로를 향하는 눈빛 사이로 수많은 감정이 지나갔다.
그리움, 원망, 기쁨, 분노, 사랑….
그 수많은 감정이 쌓이다 넘쳐 이나의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떨어지는 눈물에 놀란 재혁이 그녀에게 한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본 순간 이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재혁의 반대편을 향해 달려갔다.
“이나야! 잠깐 얘기 좀 해!”
재혁은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가는 이나를 뒤쫓아 갔다.
이나는 정말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뒤에서 점점 다가오는 재혁의 발걸음 소리가 두렵게 들려왔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는데, 막상 눈앞에 나타나니 그를 대할 용기가 없었다.
얼굴을 보고 해야 할 말이 있듯이, 얼굴을 보면 할 수 없는 말도 있는 법이다.
그와 나눌 모든 대화가 이나에게는 얼굴을 보면 할 수 없는 말로 느껴졌다.
“정이나!”
그녀를 부르는 재혁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는 곧 따라잡힐 듯, 재혁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나는 쉽게 따라잡히지 않았다.
매일 아침 그녀를 데리고 운동을 한 것을 재혁은 그 짧은 순간에 후회했다.
이나는 항구를 빠져나와 골목길로 뛰어갔다.
골목 사이로 아직은 정비되지 않은 도로들이 놓여 있었고, 차들은 횡단보도 하나 없는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손만 뻗으면 잡힐 수 있는 거리에 재혁이 있었다.
그 공포감이 그녀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높게 서 있는 삼 층짜리 붉은 벽돌집을 지나, 이나가 도로로 뛰어들었다.
그때 재혁이 소리쳤다.
“장영인이 너에게 거짓말을 했어! 찬이는 내 아들이야!”
소리를 들은 이나의 발이 땅에 멈췄다.
그곳이 도로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본능적인 멈춤이었다.
그 순간, 빵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이나를 덮쳤다.
“이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