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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진실 (69/72)

69. 진실

담담한 변호사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위의 내용에 불만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내 뜻에 따라 주기를 바란다. 먼저 아들 강정수에게는 주식 2%와 강씨 집안의 선산을 남긴다. 나와 네 형의 무덤을 잘 지켜 주기를 바란다.”

뜻밖의 내용에 정수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다음, 정수의 아들 현준에게는.”

화난 정수가 변호사의 말을 끊었다.

“잠깐, 이게 끝?”

변호사는 눈만 힐끗 들어 정수를 보더니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정수가 벌떡 일어나자, 변호사가 말했다.

“앉으시죠.”

“앉길 뭘 앉아! 사기 치지 마!”

“여기서 그만두길 원하십니까?”

변호사의 강경한 태도에 정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변호사는 정수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유언장을 읽어 내려갔다.

“정수의 아들 현준에게는 주식의 3%와 제주도에 있는 가족의 별장을 남긴다. 그리고.”

“3%라고? 장난해?!”

정수의 외침에 변호사가 그를 다시 노려보았다.

“불복하십니까?”

“당연하지!”

“불복하실 시 본인에게 할당된 유언이 취소되고 자동으로 사회에 환원됩니다. 그래도 불복하시겠습니까?”

“익!”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태수의 아들 재혁에게는 태수가 가지고 있던 10%의 주식과 이 종이를 남긴다.”

말을 마친 변호사가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재혁에게 넘겨주었다.

재혁은 말없이 할아버지가 남긴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나머지는?!”

정수가 변호사에게 물었다.

“나머지 유산의 상속인은 공개하지 않으셨습니다.”

“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머지 5% 주식 어디에 남겼냐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나머지 유산에 대한 상속인은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이봐!”

정수의 시선에, 재혁이 들고 있던 서류로 향했다.

“야! 그거 이리 줘 봐!”

정수가 손을 뻗자 재혁은 무심하게 그의 손을 휙- 피했다.

그리고 변호사를 향해 물었다.

“끝난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재혁은 미련 없이 일어나 서재를 빠져나갔다.

“아버지, 이제 어떡해요?”

현준의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정수는 대답하지 않고 재혁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과연 저 안에 든 것은 무엇일까?

만약, 나머지 주식 5%가 재혁의 손에 들어간다면?

전부 들어간다 해도 미세한 차이로 자신이 이길 것이다.

특별히 누군가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100%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정수에게 뜻밖의 변수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

재혁은 서울에 묵고 있는 본사 호텔로 돌아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할아버지의 유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내게 뭘 남긴 걸까?’

바로 열어 보면 되었지만, 왠지 망설여지는 재혁이었다.

그는 뜸을 들이며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마침내 봉투를 열어 보았다.

직- 종이가 뜯어지며 닫혀 있던 봉투가 그 속을 드러냈다.

안에는 한 장의 서류가 들어 있었다.

재혁은 안에 든 서류를 꺼내 들었다.

서류 맨 위로 [유전자 검사 시험 의뢰 결과 확인서]라는 글씨가 보였다.

그의 한쪽 눈썹이 반달 모양을 그리며 치켜 올라갔다.

천천히 서류를 빼내자 재혁과 찬의 이름이 보였다.

이리저리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지막 단락의 한 줄이었다.

양자 간 친자 확률 99.99%.

“?!”

재혁은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류를 읽고 또 읽었다.

“찬이가 내 아들이었어….”

충격에 사로잡혀 멍하니 서 있던 재혁의 머릿속에, 이나가 썼던 편지 내용이 떠올랐다.

‘찬이는 장영인의 아들이에요.’

그건 어떻게 된 일일까?

할아버지의 서류가 잘못되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장영인이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었다.

상황이 파악되자, 분노가 마음속에 치밀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잠시 자리에 서서 생각하던 재혁은 휴대 전화를 꺼내 그의 소속사에 전화를 걸었다.

“썬라이즈 강재혁입니다. 대표님 좀 바꿔 주시죠.”

***

영인의 붉은 스포츠카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다.

주차 선에 차가 멈춰 서자, 영인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내리며 문을 꽝 소리가 나게 닫았다.

“갑자기 오라 마라야.”

그는 잔뜩 짜증이 난 상태였다.

모든 일이 잘 안 풀리고 있었다.

이나에게 거짓말을 하면 그녀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이나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막상 거짓말을 하고 나니 들통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며칠을 안절부절못하며 지내다가, 오랜만에 전 여자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길이었다.

아쉬운 것은 없었지만, 외로운 건 또 싫어서 다시 잘해 보자는 말을 할 생각이었다.

그녀와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 대표에게 문자가 왔다.

급하게 회사로 들어오라는 연락이었다.

무시하고 하던 작업을 마저 하려는데, 이번에는 전화가 왔다.

받아 보니 대표는 아주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안 들어오면 계약 파기할 줄 알아!”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도 대표는 빨리 들어오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전 여자 친구에게 회사에 가 봐야겠다는 말을 했고, 좋았던 분위기는 단번에 깨져 버렸다.

짜증이 잔뜩 묻은 얼굴로 대표실로 향하려는데, 로비 입구에 대표가 앉아 있었다.

대표는 영인을 보자마자 고압적인 태도로 따져 물었다.

“야. 너 대체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야? 어?!”

“아, 뭔데 이러는 건데?”

“너, 혹시 명성 그룹 건드렸어?”

“어?”

영인이 놀라자, 대표는 망했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하, 이 자식, 이럴 줄 알았어.”

“왜, 뭔데?”

“강재혁 썬라이즈 대표가 찾아왔어, 인마! 다짜고짜 널 봐야겠다잖아!”

“강재혁이?”

“그래! 이유는 말도 안 해 주고, 너 안 부르면 투자금 다 빼겠대! 너, 명성이 우리 회사 제1 투자처인 거 알지?”

“저… 정말?”

“그럼 정말이지! 네가 이번 드라마 왜 하게 됐는데!”

전혀 몰랐던 사실에 영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너,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몰라도 무조건 싹싹 빌어. 알았어?”

“어…. 알았어.”

“빨리 가 봐. 오래 기다리고 계시니까.”

자신의 방을 남의 방처럼 말하며 대표가 영인의 등을 떠밀었다.

영인은 불안한 표정으로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안으로 들어가니, 재혁이 대표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표실을 점거한 것은 확실한 힘의 차이를 보여 주려는 재혁의 의도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재혁은 느릿하게 시선을 옮겨 영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는 통에, 영인은 뻘쭘하게 입구에 서 있어야 했다.

“저….”

영인이 참다못해 말을 꺼내려는데 재혁이 그에게 말했다.

“앞으로 오지.”

명백한 하대가 영인의 자존심을 긁었다.

재혁이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세로 나갈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기죽지 않은 태도로 재혁 앞에 다가섰다.

“재벌들은 원래 이렇게 무례합니까? 필요하면 따로 부르면 되지, 남의 회사에 쳐들어와서,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그럴 만하니까 그랬겠지?”

“돈 많다고 뭐든 다 될 줄 아나 본데, 나한테 불만 있으면 나한테 풀면 되지. 쪽팔리게 회사 인질로 잡고 뭐 하는 짓입니까?”

“쪽팔린다고.”

재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영인과 마주 서자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시선이 허공에 뒤엉켰다.

“돈이 많다고 뭐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런데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돈만큼 확실한 것도 없어.”

“반말하지 마.”

“존대를 할 만해야 말을 올려 줄 거 아닌가.”

“이게 정말.”

“장영인. 사문서 위조 및 사기 혐의가 몇 년 나오는지 알고 있나?”

“뭐라고?”

“2년. 그 2년의 꼬리표는 평생 널 따라다니면서 괴롭힐 거야. 평생 방송 영화 광고까지 아무 일도 못 하고 배우 인생이 끝나게 되겠지.”

“무슨 소리 하는 겁니까?!”

“이나에게 위조된 서류를 보여 줬나?”

“?!”

재혁의 말에 영인은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그의 두 눈은 다음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듯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

재혁은 뚫어져라 영인을 바라보며 품 안에서 서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

서류를 본 영인의 두 눈이 커졌다.

“이나에게 위조된 친자 확인서를 보여 준 거 아닌가?”

“그… 그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일이 눈앞에 다가오자, 그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한마디 변명조차 말할 수 없었다.

재혁은 그런 영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말없이 서류를 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영인에게 차갑게 말했다.

“발뺌을 안 하는 건, 인정한다는 건가?”

“아니야! 난… 그런 적 없어!”

“그렇다면, 언론사에 물어보지. 장영인의 숨겨진 아들에 관한 기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야.”

재혁이 책상을 돌아 나가자 영인은 다급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수많은 선택지가 머릿속을 오갔고, 그가 선택한 것은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저기요!”

멈칫.

재혁이 돌아보자. 영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이나에게 위조 서류를 보여 줬나?”

“네….”

“이나는 지금 어디 있어?”

“몰라요. 그날 이후로 연락한 적 없어요….”

“정말인가?”

“정말이에요. 정이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냥 약만 올리고 나중에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었는데…. 죄송해요.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영인은 두 손을 모아 재혁에게 싹싹 빌었다.

그런 영인을 바라보던 재혁이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

녹음기였다.

“그 말은 법정에 가서 해.”

그는 싸늘하게 말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대표님!! 강 대표님!!”

영인이 다급하게 재혁의 뒤를 쫓아갔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소속사 대표가 재혁의 뒤에 붙어 상황을 묻고 있었다.

등 뒤로 영인이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재혁이 뒤돌아섰다.

영인이 움찔하며 자리에 멈추자, 재혁이 그를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장영인 배우와 계약 해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곧 범죄자가 될 테니까요.”

***

탁-

주차장까지 따라온 영인을 뒤로한 채 재혁은 주차장을 떠났다.

그가 할 일은 이제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나를 찾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 찬이가 내 아들이라고 말해 주는 것.

그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다른 한 손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안쪽 주머니에서 작고 네모난 상자 하나가 손끝에 닿았다.

“….”

상자를 만지며 그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나를 찾아내겠다고.

재혁의 차가 서울의 도로 위를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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