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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유산 (68/72)

68. 유산

재혁은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처참하게 뒤집혀 불타는 차 안에는 이제 엄마 대신 이나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이나야!’

꿈속 재혁이 있는 힘을 다해 이나를 불렀지만,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제 아버지가 달려가는 모습 대신, 이나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당황하고, 다급하고, 간절한 모습으로….

화마가 점점 이나를 덮치고 있었다.

수천 번도 더 꾸었던 꿈이기에, 이제 이 꿈의 끝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꿈속이었지만 두려웠다.

달려가 저 문을 잡으면 자동차는 터져 버릴 테니까.

자동차가 점점 가까워지고, 이나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문을 잡는 그 순간!

“헉!”

“잘 잤니?”

강 회장의 목소리에 재혁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괜찮으세요?”

재혁을 보자 강 회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움직임 없이 눈만 뜬 채로 웃고 있었다.

“항상 준비는 하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때가 오니까 아쉬운 게 많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일어나실 거니까. 앞으로 관리 잘하시면 돼요.”

“그래. 그래. 앞으로 잘하면 되겠지. 재혁아.”

“네. 할아버지.”

“이리 와 봐라. 얼굴 좀 보자꾸나.”

재혁이 일어나 강 회장에게 얼굴을 보였다.

강 회장은 힘겹게 손을 올려 재혁의 볼을 쓰다듬었다.

“부모 없이 자라느라 고생 많았지? 참 잘 자라 줘서 고맙다. 우리 손자.”

“맘 약해지지 마세요. 할아버지. 곧 쾌차하실 거예요.”

“네 아비를 묻던 날, 내가 네 결혼식은 꼭 보고 가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러지 못할 거 같아서 걱정되는구나. 극성맞은 네 아비가 얼마나 잔소리를 하겠니. 그러니 너무 서운해 말아라. 네 아비랑 한 약속 지키려고 그랬던 거니까.”

“자꾸 그런 말씀 하시면 저 갈 거예요. 힘내셔야죠. 제 결혼식 보고 가셔야죠.”

“그래야 하는데…. 이 할애비가 성격이 급해서…. 먼저 가야겠다.”

“할아버지!”

“재혁아.”

“네. 말씀하세요.”

“그래도 네가 있어서 할애비는 참 행복했다. 네가 없었다면 나도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돌이켜 보니, 내가 너를 지킨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지켰구나. 참 고맙고 고맙다.”

말이 끝남과 함께 재혁의 볼을 감쌌던 강 회장의 손에 힘이 풀렸다.

힘겹게 뜨고 있던 눈이 감기는 순간, 심장 박동 측정기에 직선이 그어지며 삐 소리가 울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재혁의 눈에서 그간 참아 왔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가 절규하는 소리를 듣고, 밖에 있던 비서들이 들어와 강 회장의 상태를 살폈다.

심장 박동 측정기의 상태를 확인한 비서는 의사를 부르기 위해 다급하게 뛰어나갔고, 다른 한 명은 강 회장의 가슴에 매달려 울고 있는 재혁을 떼어 냈다.

다시 한번 겪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 재혁은 한 마리의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세상은 어찌 이리도 가혹한 것일까?

슬픔이 비처럼 내리던 날.

재혁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났다.

***

강 회장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재혁은 망부석처럼 식장 한구석에 서 있었다.

이나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나가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장례식장 한쪽 구석에는 정수를 중심으로 몇몇 이사들이 무언가 열띠게 논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왕위 찬탈을 모의하는 역적들의 모습처럼 보였다.

저들에게 강 회장의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그의 죽음이 한자리를 차지할 기회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한참 동안 고민하던 재혁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저들이 그토록 탐하는 권력은 재혁에게는 전부 부질없는 것이었다.

장례식장에 유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강 회장의 영정 앞에 조의를 표했다.

절을 마친 유리가 재혁 앞에 섰다.

그녀의 모습에 재혁은 주먹을 동그랗게 말았다.

“너무 갑작스럽네.”

유리의 말에, 재혁은 그녀에게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만약 유리가 대본을 고치지 않았다면 자신에게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이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재혁의 분노가 끓어오르는데, 유리가 말했다.

“미안해.”

유리의 말에 재혁은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풀었다.

누구의 책임으로 만들면 뭐 하겠는가. 그런다고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시는 것도 아닌데.

“그래.”

“할 말이 있어.”

“해.”

“여기서 말고.”

“그냥 해.”

유리는 강 회장과 이사들 쪽을 한번 보고는 말했다.

“주주 총회가 있을 거야. 우리 쪽에도 강정수 부회장에게서 요청이 왔어. 몰아 달라고. 난 오빠가 원하지 않으면,”

재혁이 유리의 말을 끊었다.

“마음대로 해.”

재혁의 시선을 본 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

혐오의 눈빛이 그녀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유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휙 돌아섰다.

때와 장소가 별로였다고는 하지만, 이런 취급을 받을 일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고마워하며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런 태도라니.

“그래.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 봐.”

그녀는 독기를 품고 돌아섰다.

마침 현준이 들어오고 있었다.

유리를 본 현준은 헐레벌떡 그녀를 따라 나갔다.

그렇게, 재혁에게는 너무나 길었던 장례식이 끝나 가고 있었다.

여전히 이나는 연락이 없었다.

***

강 회장은 아들의 옆에 묻혔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의 묘소가 나란히 놓인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할아버지를 마음에 묻고 돌아오는 길, 정수가 재혁에게 말을 걸었다.

“일주일 뒤에 주주 총회가 있을 거다.”

“….”

“황 이사랑 다 얘기해 놨어. 너는 힘들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알겠지만, 회장님 주식을 절반 이상 받지 않으면 네가 이길 확률은 없어. 생각해 봐라. 아들과 손자 중 누구에게 더 많은 재산을 남기셨겠니?”

듣고 있던 재혁은 죽일 듯 무서운 눈빛으로 정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며칠만 참았다가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원하시는 대로 안 나갔을 텐데요.”

“화내 봐야 소용없어. 대신 썬라이즈는 주마. 그거면.”

“그거나 먹고 떨어져라?”

“그렇게 들었다면 어쩔 수 없겠지.”

“그날 뵙죠.”

재혁은 정수를 지나쳐 걸어갔다.

재혁의 뒷모습을 보며 정수는 강 회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절반 이상은 안 됩니다.’

강 회장이 주로 했던 말이 정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쯧. 제 아비 닮아서 상황 파악 못 하기는.”

***

재혁은 이나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딩동-

초인종 소리에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눌러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잡아당기려던 재혁의 손길에 망설임이 느껴졌다.

‘더 이상 뭘 무서워하는 거야. 강재혁.’

그는 마음을 다잡고 이나의 집 문을 잡아당겼다.

빈집 특유의 차가움이 거실 바닥에서 밀려왔다.

저벅-

한 발 안으로 들어가니, 현관 불이 켜지며 거실의 모습이 보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 안은 이나가 이 집에 들어오기 전 처음 그대로였다.

안으로 들어간 재혁은 부엌의 아일랜드 식탁을 쓱 문질러 보았다.

손에는 먼지 하나 묻어나지 않았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청소는 하고 떠난 모양이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정말 정이나답군.”

굳이 방 안까지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떠난 것이다.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서려는데, 아일랜드 식탁 끝자락에 놓인 편지 봉투가 보였다.

재혁은 봉투를 들어 안을 살펴보았다.

안에는 익숙한 이나의 글씨로 적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재혁 씨에게]로 시작하는 편지였다.

재혁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언젠가 이별이 다가올 줄 알고 있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어요. 그건 재혁 씨도 마찬가지였겠죠. 미안해요.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나는 당신을 떠날 용기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어요. 용서해 달란 말은 하지 않을게요. 나는 당신에게 두 번이나 상처를 줘야 하니까요.

장영인을 만났어요. 친자확인서를 확인했고 찬이가 장영인의 아들인 것을 확인했어요. 그래서 영인 씨랑 떠나려고 해요. 찾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서로의 사랑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잘해줘서 고마워요. 좋은 기억만 갖고 떠나요. ㅅ]

마지막. ‘사’라고 적었다가 지운 자국이 보였다.

편지를 다 읽은 재혁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은 정말 못 하는군.”

재혁은 편지 속에서 이나의 아픈 마음을 느꼈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서 억지로 떠났을 것이 뻔했다.

아마 장영인과 떠나지도 않았을 테지….

당장이라도 이나를 찾고 싶었다.

찬이 영인의 아들이라는 것은 이나를 사랑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찬은 영인의 아들이 아닌, 그냥 찬일 뿐이다.

고민되는 것은 이나의 마음이었다.

갑자기 떠나야 할 만큼 그녀에게는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나에게, 나는 괜찮으니 돌아오라는 말은 어쩌면 너무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나의 삶에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 행복할까, 아니면 없는 것이 행복할까.’

생각하던 재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이런 여자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 목을 매는지….

재혁의 입에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정말, 보고 싶다. 정이나.”

사무치도록 이나가 그리웠다.

***

며칠 후, 강 회장의 유언장 발표가 있는 날.

갈색 나무로 인테리어한 고풍스러운 서재에 정수와 현준, 그리고 재혁 세 사람이 모였다.

“아버지, 저는 얼마나 받을까요?”

“가만히, 입 좀 다물고 있어.”

재혁은 그런 두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10분쯤 기다리자, 정장을 입은 남자가 검은 서류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자리에 앉자 정수가 호의를 보이며 말을 걸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변호사는 대꾸 없이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크흠.”

정수의 언짢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강 회장님의 생전 공증 도장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봉인된 유언장 겉면에 강 회장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정수와 현준, 재혁은 봉투를 돌려 보며 확인했다.

“맞네.”

“맞는 거 같네요.”

“…“

모두가 한 번씩 본 후 변호사가 봉투를 들었다.

“모든 내용은 강 회장님의 뜻이며, 이미 법적인 절차를 마친 상태입니다. 그럼 개봉하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유언장으로 향했다.

봉투를 개봉한 변호사는 안에 있는 봉투를 들고는 읽기 시작했다.

“이는 살아생전 내가 축적한 재산의 분할과 상속에 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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