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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영원한 이별 (67/72)

67. 영원한 이별

이나의 손이 파르르 떨리자, 손에 들려 있던 서류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

충격에 빠진 듯 넋이 나간 이나의 모습을 보며 영인은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친자 검사 결과가 나온 날.

검사 결과를 확인한 영인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분명 자신의 아들이라 생각했던 찬은 자기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검사 결과가 잘못 나왔거나, 표기 오류가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검사 기관에 전화까지 걸어 다시 한번 확인했다.

확인 결과는 확실한 유전자 불일치.

그간 이나의 행동으로 미루어 봤을 때, 찬은 분명 자기 아들이어야 했다.

찬의 나이와 정황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는데, 아니라니.

불쑥 마음 안에 분노가 치밀었다.

만약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면, 이나는 자신을 만나는 동안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정이나 이 xxx.”

심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서류를 갈기갈기 찢은 영인은 이나와 재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나를 갖지 못하더라도, 눈앞에서 두 사람이 잘되는 꼴만은 막고 싶었다.

가끔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할 때가 있는데, 영인에게는 지금이 그런 때였다.

그는 서류를 조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는 들키겠지만, 상관없었다. 당장 이나와 재혁을 떼 놓으면 되니까.

이나의 눈에 눈물이 차오를 새도 없이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영인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히 나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

그는 6년 전 이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온 힘을 다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겠더라고. 네 기분은 알지만, 그 아이가 내 아들인 이상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어.”

고개 숙인 이나가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정이나, 강재혁하고 안 돼. 네가 정 결혼하겠다고 하면 내가 강재혁에게.”

“그만해!”

참다못한 이나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카페의 모든 사람이 이나와 영인을 바라보았다.

배우로 이름이 알려진 두 사람, 안 그래도 아까부터 그들을 향해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던 참이었다.

이나는 눈물을 훔치며 카페를 뛰쳐나갔다.

“이나야!”

영인이 그녀를 불렀지만, 이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카페를 나온 이나는 막무가내로 달렸다.

방향이 어딘지,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영인과 믿기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뛰었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동안 했던 다짐은, 실제로 다가온 현실 앞에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도저히 재혁에게 찬이가 영인의 아들이라 말할 자신이 없었다.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이렇게 된 걸까?

왜 빨리 확인해 볼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재혁에게 마음을 완전히 뺏기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아니,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이나가 정신을 잃고 정신없이 도로를 건너갈 때….

끼이익-

그녀의 눈앞에 달리던 차가 멈춰 섰다.

놀란 운전자가 뛰어나와 이나를 향해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죽고 싶어!”

이나가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도로에 앉아 이나는 하염없이 죄송하다고 반복했다.

마치 운전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듯이….

***

“어? 빨리 왔군.”

잠시 화장실을 갔다가 돌아오니 이나가 와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었고,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꼭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이나?”

“네? 네. 아 일이 좀….”

이나가 말끝을 흐렸다.

재혁은 이상하다는 듯 그녀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무슨 일 있었나?”

“아니요. 그냥 피곤해서요.”

“아닌 거 같은데?”

“진짜예요.”

“흠. 그래. 내일 바로 퇴원해야겠어. 아무래도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으니까.”

“….”

“이나야?”

“네.”

“내 말 들은 거야?”

“아. 뭐라고 했죠?”

“내일 퇴원해야겠다고.”

“네, 알겠어요. 저, 피곤해서 먼저 잘게요.”

“….”

이나는 재혁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그런 그녀의 등이 어쩐지 멀게 느껴졌다.

***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요란한 폭죽 소리가 들렸다.

펑- 펑-

“대표님, 축하합니다~”

문 앞에는 고깔모자를 쓴 비서들이 케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이런 이벤트에 약한 재혁이 뭐냐는 듯 이나를 바라보자, 이나는 재혁에게 분위기 맞추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겠는가, 이나가 하라면 해야지.

재혁이 초를 불자, 비서들이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재혁은 선물을 확인도 해 보지 않고 쑥- 지나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재혁이 쌀쌀맞게 들어가자, 비서들은 뭘 잘못했나 싶어 눈치를 봤다.

이나는 비서들이 들고 있던 선물을 하나씩 받아 들며 말했다.

“원래 이런 거 잘 안 하시는 분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들 마요. 좋아하셨을 거예요.”

“네.”

“아직 완전히 회복되신 거 아니니까 보고할 것들은 나한테 주면 순차적으로 보고할게요. 오전은 자제해 주시고요.”

“네!”

비서들이 돌아가고 지영이 이나에게 따라붙었다.

“팀장님~ 뉴스에서 난리 났었던 거 아시죠? 두 분 러브 스토리요! 대박!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니까요!”

예전에 그토록 이나를 괴롭혔던 사람이 맞는 건지, 지영은 완전히 이나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 것은 여전해서, 이나가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나가 갑자기 정색했다.

“장지영 씨, 일 안 해요?”

“네? 하…죠.”

“빨리 자리로 돌아가요.”

이나가 차가운 기운을 풀풀 날리며 자리에 앉자 지영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구시렁댔다.

“치…. 뭘 화까지 내시고 그런대.”

이나는 자리에 앉아 텅 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영인이 했던 말들이 계속 머릿속에 떠다니며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지난밤, 잠든 재혁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뭉개지듯이 아팠다.

새벽 내 이어진 고민은 아무런 결론을 맺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한숨을 푹 쉬고 컴퓨터를 켜는데, 강 회장의 비서에게 문자가 왔다.

[회장님이 위독하십니다.]

“!”

***

끼익-

공항 게이트에 차가 멈추어 서자마자 이나가 튀어나왔다.

그 뒤를 이어 나오는 재혁을 향해 이나가 소리쳤다.

“표 끊어 놓을게요!”

갑작스러운 소식에 서울로 올라갈 교통편이 마땅치 않았다.

헬기를 동원하기에도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어서 공항에 전화했다.

항공사 측에 문의하니, 취소 표가 있을 수 있으니 현장에서 발권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나는 다급한 마음으로 국내선 항공사 쪽으로 뛰어갔다.

데스크에 도착한 그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서울행 가장 빠른 비행기가 몇 시죠? 지금 탈 수 있는 거 중에서요.”

다급한 이나의 말에 항공사 직원이 컴퓨터를 두드리더니 대답했다.

“20분 후 출발하는 비행기에 취소 표 두 자리가 있네요.”

대답을 들은 이나는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그럼 두 자리….”

이나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더니 직원에게 다시 말했다.

“한 자리만 주세요….”

표를 끊은 이나는 입구에서 대기하던 재혁에게 다가갔다.

“구했나?”

“네.”

표를 건네는 이나의 표정은 어쩐지 잘못을 한 어린아이 같았다.

재혁은 의아해하며 표를 받아 확인해 보았다.

“한 장이네?”

“네. 취소 자리가 한 자리밖에 없대요. 먼저 가 있으시면 따라갈게요.”

재혁은 시계를 보았다.

비행기에 타려면 지금 탑승 수속을 밟아야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 나중에 봐.”

재혁은 서둘러 게이트 안으로 사라졌다.

이나는 그의 뒷모습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게이트를 통과하던 재혁은, 문득 이나가 있던 자리를 뒤돌아보았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

기분이 이상했다.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지 않고 갔다니.

묘한 불안감이 그의 발길을 잡아끌었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런 재혁의 모습을 이나가 구석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

병실에 도착하니 정수와 윤 여사 그리고 현준이 와 있었다.

“왔구나.”

재혁을 본 정수가 침대 옆에서 물러서며 말했다.

재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강 회장에게 다가섰다.

수척해진 얼굴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신 거죠?”

“너 수술 날. 병문안 가셨다가 이렇게 되셨다.”

“….”

“아픈 너 걱정한다고 말씀하지 말라시더니, 어제부터 사경을 헤매고 계신다.”

재혁은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누군가 자신에게 걸어 놓은 저주 같았다.

그가 태어나 사랑했던 사람들은 전부 그의 곁을 떠났다.

엄마와 아빠, 그런데 이젠 할아버지까지….

“할아버지와 둘이 있고 싶습니다.”

재혁의 말에 현준이 발끈했다.

“네가 뭔데!”

재혁은 그 어느 때보다 고압적인 눈빛으로 현준을 노려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반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현준은 재혁의 눈빛에 압도되어 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이 대치하자, 정수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래, 그래라. 나가자.”

정수가 잡아끌자, 현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병실을 빠져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나간 후, 재혁은 강 회장에게 다가가 앉았다.

몇 주 만에 뒤바뀐 입장에, 자신을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러게, 손주 말 좀 들으시지…. 왜 무리하셔서….”

원망의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것은 강 회장이 아닌 무심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이었다.

재혁이 누워 있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재혁은 고개를 숙여 할아버지의 차가운 손에 볼을 갔다 댔다.

“이대로 돌아가시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예요. 일어나세요. 제발.”

재혁의 간절한 말에도 강 회장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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